소설리스트

히토미의 태그술사-37화 (37/57)

〈 37화 〉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꽃(3)

* * *

얼마나 쉬었을까. 간이침대에 누워서 잠깐 생각을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다. 잠을 잔 덕에 머리는 조금 멍했지만, 첫 전투의 긴장감은 많이 해소됐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옆침대의 에린델이 눈에 들어왔다. 뒤돌아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에린델, 자?"

"."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진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

"마차에선 괜찮아 보여서 걱정 안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어?"

나도 처음 겪어보는 전쟁에 놀란 상태였지만, 나보다 에린델이 더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왕군 때문에 살 곳을 잃고,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던가.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전쟁에 나서니까 옛날 생각이 났어."

"그랬구나."

"자꾸 나쁜 생각이 들어.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핌베르트도 점령당하고 우리도 갈 곳을 잃고 헤매다 결국 다 죽을 것 같고."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어. 내가 있잖아."

"물론 단백은 강해. 그렇지만 마왕, 아니 사천왕 중에 하나라도 우리가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야."

내 사기적인 능력을 갖추고도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한 건가 그들은?

"사천왕이 그렇게 강해?"

"응. 나도 직접 만나 본건 아니지만, 마을에서 가장 강하던 장로님도 상대하지 못했다고 해."

"그 장로님은 얼마나 강한 엘프였는데?"

"천 년 이상 사신 분이었으니까 엄청나게 강하셨지. 마법은 현자급은 되셨고 검술도 소드마스터급은 되실 거야."

"현자나 소드마스터는 매우 드물지?"

"그럼, 인스페인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이십 명도 안될 거야."

"각각 이십 명?"

"아니 합쳐서."

몇 명 있지도 않은 현자와 소드마스터, 그걸 다 가진 사기적인 엘프 장로도 사천왕에는 당해내지 못했다라. 아직까지 대륙이 넘어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그럼 대체 사천왕은 얼마나 강한 거야? 마왕이 나타난 지 삼 년이라는데 어떻게 버티고 있던 거지?"

"마왕군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사천왕이 없었어. 마왕이 하나하나 소환한 거지. 그리고 우리도 필사적이었으니까."

"그렇구나. 사천왕이 그렇게 강하다면 최대한 각개격파 해야겠네."

"그래야 할거야. 그런데 어차피 사천왕을 동시에 상대할 일은 없겠지만."

뒤에서 듣고만 있던 비렌데가 대화에 참여했다.

"동시에 상대할 일은 없다고? 왜지?"

"사천왕들은 각자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하거든. 걔들은 협력을 안 해. 서로 협력적이었으면 벌써 핌베르트는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확실히 마왕군에 소속됐었던 만큼 비렌데는 내부정보에 빠삭했다.

"아주 좋은 정보네. 솔직히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다굴맞는거만 아니라면 가능성은 있지.

"다, 다굴이 뭐야?"

"아, 원래 살던 데서 쓰던 말이야. 여러 명이 하나를 동시에 공격하는 거."

"이상한 말이네, 근데 어감은 좋다. 다굴? 다굴. 뭔가 귀여운 느낌."

그렇게 다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반복해서 얘기하는에린델. 그런 그녀가 계속 저렇게 놀 수 있게 해주고 싶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에린델과 대화 후 지휘 막사로 가서 간단히 회의를 했다. 병사들의 구성에 대해 얘기를 했고, 마물들의 침공이 더 없었기에 오늘은 쉬면서 재정비를 하기로 했다. 마왕군 게이트에 대한 얘기도 하려했지만 갑자기 급한 얘기가 있다며 전령이 찾아와서 내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를 위한 막사로 돌아와 맛없는 보급품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

"대장님! 얼른 일어나!"

"강단백! 지금 급해!"

분명 눈을 감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세키돌과 에린델의 다급한 소리에 눈을 떴다.

"으 무슨일이야? 아직 새벽 같은데?"

"마왕군이 쳐들어왔어, 기습이라 대처가 잘 안 되는 거 같아."

"젠장, 이 자식들 수면시간 보장 안 해주네."

허겁지겁 일어나 블랙 미스릴 소드를 챙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로 성벽 쪽을 쳐다보니 어제 보지 못한 클래식한 종류들의 몬스터들도 많이 보였다. 특히 오크처럼 보이는 몬스터가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보는 오크라 반가울 정도였지만, 병사들에 베이고 찔리면서도 무지성으로 돌진하는 모습은 섬뜩했다.

"미소쨩이 불을 뿜을 시간이다. 마나 블레이드 (Mana Blade)"

몬스터의 숫자가 많았기에 리자드맨에게 실험했던 마나 블레이드를 켠다. 그리고 곧장 성벽으로 달리는 나에게 걸어지는 비렌데의 신체 강화 마법. 탄력을 받아 곧장 점프해서 성벽 위로 올라간다.

새벽에 갑작스런 습격이라 싸우고 있는 병사는 아직 많지 않았기에 마나 블레이드를 건 검을 휘두르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쿠에엑! 쿠엑!

좌우로 크게 베어 마물들을 두 동강 낸다. 하지만 내 동작이 큰 틈을 타 오크하나가 내게 도끼를 휘둘렀다. 간신히 피하고 가슴팍에 검을 찔러넣었다.

­크워어!

하지만 오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도끼를 들지 않아 자유로운 왼손으로 내 안면을 강타했다.

"크악!"

두개골이 흔들리는 강한 충격. 분명히 치명적인 공격일 텐데 오크는 이상하게 멈추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오크를 쳐다보니 눈이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다. 평범한 오크가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려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붉은 눈의 오크에게 펀치한방으로 쓰러질뻔했지만, 가슴팍에 꽂은 검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간신히 버텼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오크의 몸을 베었다. 블랙 미스릴 소드의 예리함은 오크의 몸을 뼈째로 갈라버렸다.

"하아 하아"

제대로 한방 얻어맞은 탓에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체력소모가 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또 오크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눈을 붉게 빛내며 미친 듯이 돌진하는 오크들. 지금 내 검엔 마나 블레이드가 걸려있다. 리치는 상당히 길다. 앞서 달려드는 오크들을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서 베고, 높게 점프한다.

­크어어억!

남은 오크를 내려오면서 찍어서 그대로 세로로 두 동강 내버린다. 블랙 미스릴 소드의 경도와 예리함, 그리고 마나 블레이드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전투.

그렇게 달려드는 오크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뒤에서 달려드는 개와 흡사한 마물을 눈치채는 게 늦었다.

꼼짝없이 한쪽 팔을 물어뜯길 위기.

­슈우욱

어디선가 빛이 나는 화살이 날아와 그대로 마물의 머리를 관통했고, 마물은 쓰러졌다.

"에린델!"

"방심하지 마 강단백. 어제보다 훨씬 숫자가 많아."

"믿고 있었다고! 우리 엘프씨."

어제처럼 서쪽과 동쪽성벽을 나눠서 수비하기에는 마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먼저 올라온 서쪽부터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키돌은 앞에서 맘껏 날뛰어줘. 나는 세키돌이 포위당하지 않게 봐주며 싸울게. 에린델과 비렌데는 지원 부탁하고."

"알겠어. 대장님."

"믿어달라고.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나 오늘 컨디션 좋아 주인. 고급 지원마법 팍팍 걸 테니까. 얼른 없애줘."

그렇게 오랜만에 네 명이 합을 맞춰서 전투하게 됐다. 세키돌은 어제보다 더 활발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건틀렛과 발차기를 이용해 말 그대로 마물들을 부수고 다녔다. 빠르고 거침없는 움직임에 감탄했다.

세키돌이 치고나간 후 남은 몬스터들을 빠르게 정리해서 그녀가 고립되지 않게 만들었다. 내가 미처 커버하지 못한 마물들은 에린델이 처리했기에 빈틈이 거의 없는 완벽한 전투를 할수 있었다.

아무튼 세키돌이 여유를 만들어준 덕분에 성 밖을 살필 시간이 생겼다. 횃불이 있어도 어두웠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파악은 어려웠으나, 어제보다는 숫자가 적어 보였다. 하지만 오크들은 엄청나게 호전적이었고 즉사시키지 않는 한 계속 움직였기에 위협적이었다. 개와 흡사한 마물을 타고 성벽을 올라왔기에 성벽 위의 오크 숫자는 점점 늘었다.

"헬파이어 월 (Hellfire Wall)"

망설이지 않고 어제 사용했던 불의 장벽을 세웠다. 가능한 최대한 높고 넓게. 체감상 마나 소모가 큰 마법이었지만, 어제 사용했을 때 효과가 확실했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제와는 양상이 달랐다. 어제는 헬파이어 월이 있어도 몬스터들이 계속 전진했었고 후속병력들이 전부 타죽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일인지 후속 병력이 움직임을 멈췄다. 누군가가 명령한 거마냥 장벽 뒤에서 멈춰 섰다.

'젠장, 뭐지? 갑자기 지휘라도 받은 것처럼.'

어쨌든 불의 장벽이 지속되는 동안 후속 병력은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 서둘러서 성벽위의 마물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린델, 한 번에 많이 정리해 줄 수 있겠어?"

"조금 무리하게 되겠지만 가능해. 동쪽으로 가려고?"

"응. 우선 불의 장벽이 유지되는 동안 성벽 위를 빠르게 정리할 생각이야."

"알겠어. 이쪽은 맡겨. 세키돌도 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활을 들어 마나 집속탄을 연사했다. 정확도는 대단했고 다수의 오크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나는 서둘러 동쪽벽으로 달렸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이미 이쪽에는 병사들이 거의 없었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지 않는 이상 계속 전투를 이어나가는 오크들을 당해내지 못한 모양이다.

'제기랄, 늦었나.'

소리를 한번 크게 질러 기합을 넣고 달린다. 동작을 작게, 크게, 좌우 사방 가리지 않고 검을 휘둘러댔다.

신경 쓸 아군이 없기에 전투는 분명히 편했다. 마물들은 내 블랙 미스릴 소드를 방어할 수단이 없었다. 몬스터들은 두 동강 나거나 목과 몸이 분리됐다. 개처럼 생긴 몬스터가 움직임이 빨라서 조금 성가셨지만 동작 자체는 단순했기 때문에 익숙해지니 피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니 대다수의 마물이 정리됐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헬파이어 월의 지속시간이 끝난다면 다시 써야 하나? 그걸 반복하면 내 몸이, 그리고 마나가 버틸 수 있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불안감 속에서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고 머지않아 동쪽 성벽의 몬스터들은 전부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속에 직접 때려 박는듯한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뭐야, 귀찮게 .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는 거야?"

"누구냐?"

"아, 나는 피그리티라고 해. 군단장이야. 아마 5번짼가 그럴걸?"

앳된 소년 같은 목소리는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이쪽이야. 절벽 위를 봐."

성 밖 높은 절벽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았기에 천리안 마법을 써서 시야를 비약적으로 올렸다.

그러자 보였다. 머리 위엔 검붉은 뿔이 두 개 달려있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마족하나가.

"아까 파이어월도 네가 쓴 거지? 넌 뭐야? 검도 잘 쓰면서 마법도 잘 쓰다니. 영웅 행세라도 하려고?"

멀리서 내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것 같았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말을 이어갔다.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안 막으면 안돼? 어차피 다 죽을 거야 너희."

"헛소리 하지 마. 우린 안 죽어. 내가 마왕도 잡을 거니까. 너도 딱 기다려라."

"풉, 네가 미왕님을? 오랜만에 보는 허세 심한 놈이네. 재밌어."

그렇게 말하고 피그리티라 칭한 그가 손짓했다. 그러자 어제 봤던 날개달린 마물들이 높게 날아서 불의 장벽 위를 넘어오기 시작했다.

"어제 보니까 너희 윙들도 상대하기 버거워 보이던데? 막아봐."

윙이라 불린 그 마물들은 대충 봐도 수십 마리가 넘어 보였다. 어제보다 확실히 많은 수. 저것들은 피부가 단단해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잡을 수 없었다. 성벽으로 올라오면 우리 부대 말고는 상대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

뒤늦게 성벽으로 올라오고 있는 병사들의 피해가 클 것이다. 올라오기 전에 막아야 한다.

"체인 라이트닝 (Chain Lightning)"

번개가 연쇄적으로 체인처럼 이어져서 공격하기 때문에 뭉쳐있는 적에게 효과적인 마법을 상상했다. 피부가 단단한 윙들이지만 역시 번개는 버티지 못하고 몸이 타버리거나 날개가 다 녹아버렸다.

"칫, 귀찮게 하네 정말!"

피그리티는 짜증이 난 듯 소리치더니 곧장 내 쪽으로 날아왔다. 그가 움직이자마자 다급하게 라이트닝 랜스를 날렸지만, 가볍게 피해버렸다.

엄청난 속도. 금세 내 눈앞까지 날아오더니 내게 말했다.

"뭐야? 가까이서 보니 꽤 잘생겼네. 나 잘생긴 남자는 싫어하지 않아. 어때? 내 컬렉션이 된다면 죽이진 않을게."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