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급할수록 돌아가면 늦음(2)
* * *
"이, 이제 그만 안아줘도 돼."
에린델이 안아준 덕분에 상당히 진정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 좀 더 기운날때까지 안겨있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오히려 나를 더 꽉 끌어안는 그녀.
아니 다른이유가 있는데 말입니다 에린델씨.
정신을 차리고나니 에린델의 가슴이 몸에 닿아서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게다가 이 엘프는 묘하게 좋은냄새가 나는게 문제다.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게 느껴진다.
"아니 이대로면 내가 못참을거 같아서 그래."
"못 참다니 뭘?"
나는 대답을 곧바로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왠지 에린델에게는 이런 화제로 얘끼를 꺼내기가 어렵다.
"아."
뒤늦게 에린델이 눈치챈 듯 날 안아주던 팔을 풀었다.
"그런 거였구나."
"그래 알아줬으면 됐어."
"근데 있잖아. 강단백."
"응?"
"지금 안아줬던 게 세키돌이나 비렌데여도 그만 안아달라고 했을거야?"
"!"
세키돌이나 비렌데였다면 아마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 때문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냥 주저 없이 만졌겠지. 둘만 있는 상황이었으면 주저 없이 섹스까지 했을 것이고.
"아니, 아마 그러지 않았겠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만하라 한 거야?"
"에린델은 이런 쪽으로는 면역이 없잖아.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져."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어?"
150년이나 순결을 지켜온 그녀이기에 이 말은 상당히 놀라웠다.
"150년이나 하지 않았잖아. 그 말은 아한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 아냐?"
"이젠 생겼어."
백오십 년의 세월을 지켜온 진짜 초일류 처녀가 야한 일에 흥미가 생겼다니, 게다가 그녀의 주변에 남자라고는 지금 나밖에 없다. 사실상 나랑 하고 싶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
"정말이야?"
"네가 하도 옆에서 해대서 그런 거잖아! 나도 성욕이라는 건 있어! 자꾸 옆에서 그러고 있는데 아무 마음도 들지 않을 리가 없잖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얘기하는 에린델. 이 녀석은 확실히 귀엽다. 순간적으로 못 참고 덮쳐버릴 뻔할 정도로.
"그건 태그력을 채워야 하니까 별수 없었어. 미안해."
"정말 그것 때문에만 한 거야?"
아니다. 그럴 리가. 애초에 섹스 못 한 한이 맺혀 죽고도 성불 못 한 귀신이 나라는 존재인데.
"아니. 솔직히 참기 힘들었어. 생각해봐 너희들 같은 미소녀들하고 생활하는데, 맘 같아선 온종일 야한 짓만 하고 싶다고."
"변태."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신사 씨는 나랑은 안 하고 싶었어?"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에린델.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 영롱함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고 싶었지. 아주 많이."
"그럼 안 참아도 될 거 같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여태까지 자제하고 있던 에린델을 향한 욕구가 폭발했다.
"으응흡"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에린델의 얇은 입술은 상당히 보드라웠다. 조금 부드러운 키스를 즐기다가 입안에 혀를 넣었다.
"흐응츄웁"
에린델이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입을 열고 내 키스를 받아주려고 노력했다. 서투른 모습이 오히려 나를 더 꼴리게 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그녀의 몸을 만지려고 했다.
"다녀왔어~"
세키돌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에린델은 황급하게 멀어졌다.
"주인, 무사히 돌아왔구나."
"대장님~!"
비렌데의 말과 내게 달려드는 세키돌.
"어라? 근데 왜 주인과 에린델이 한 침대에 있어? 둘이 뭐한 거야?"
"어? 아, 아무것도? 그냥 에린델과 얘기하고 있었어."
"묘하게 둘 얼굴이 붉은 것 같고 이거 수상한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비렌데가 집요하게 놀리기 시작한다. 큰일이다.
"아, 아무 일도 없었어 비렌데. 알잖아 나 그런 쪽에 흥미 없는 거."
에린델도 나서서 변명했지만, 말을 더듬어서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그런데 내 눈에는 왜 이리 두 분이 당황하는 거 같지? 흐음?"
"뭐야~ 대장님 아깐 부족했어? 에린델 언니랑도 한 거야?"
"어이 주인. 아까 나랑 에린델이 기절해 있을 때 세키돌이랑 한 거야?
"아, 아니 그게 말이야."
"기절해 있는 우리 둘 옆에서 한 거야~? 설마??"
세키돌의 폭탄 발언으로 수습하기 어려운 총체적 난국이 되어버렸다. 그냥 절실히 도망치고 싶어졌다.
****
간밤에 비렌데의 추궁과 에린델의 삐침에 시달린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버렸다.
오늘은 리스티앙이 떠나는 날이다. 인사를 해야겠지. 식사도 하지 않고 지휘 막사로 갔으나 그녀는 막사 안에 없었다.
'어디 간 거지'
다시 막사로 돌아가서 빵이나 뜯을까 했는데, 맞은편에서 리스티앙과 안드레아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십인장, 내게 용무가 있나?"
"그렇습니다. 언제 출발하시는 건가요?"
"한시간 뒤에 출발하기로 했어."
"잠깐 얘기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아, 안드레아 잠깐 자리 좀 비켜주겠어?"
"알겠습니다. 조금 이따 오겠습니다."
나와 리스티앙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켜주는 안드레아.
"막사 안에서 얘기할까?"
"그러시죠."
그녀를 뒤따라 지휘 막사 안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지?"
"갑자기 떠나시게 돼서 인사를 드리려고 왔죠."
"나도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될 줄 몰랐어. 서쪽 격전지는 나보다 강한 바스판 님이 계시기에 걱정하지 않았는데."
"아쉽습니다. 리스티앙님을 이제 좀 알게 되나 싶었는데."
"훗 그 의미는 뭐지? 군인으로서? 아니면 이성적으로?"
직설적인 그녀의 질문. 평소엔 얌전한 것 같아도 확실히 지를 땐 지르는 사람이다.
"양쪽 다 라고 하면 될까요?"
"자네는 욕심쟁이군."
"물론이죠. 저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보병 사령관을 가지고 싶다?"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왕을 해치우고 와."
"물론 그래야죠. 제가 다녀오는 동안 결혼준비나 하고 계시라고요."
"서쪽 수비가 잘 된다면 해보도록 하지. 내가 네 번째라고 했던가?"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 첩의 개념은 아직 내 감각으로는 조금 적응이 어렵다.
"그, 그렇죠?"
"그럼 드레스를 네 벌 준비해두지. 그럼 되겠지?"
"턱시도도 한 벌 부탁드립니다."
"풋, 양심이 없군. 자네는."
"애초에 리스티앙님 정도 되는 사람을 넷째 부인으로 들이려고 하는 거 자체가 양심이 없는 거 같은데요?"
"물론이야. 사실 날 탐내는 귀족들은 많다고? 예쁘지, 실력 있지, 가문 짱짱하지."
"그걸 본인 입으로?"
"크흠, 뭐 아무튼 부탁할게."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이어서 얘기했다.
"꼭 살아서 돌아와."
"물론입니다. 영웅은 죽지 않는 법입니다."
"난 사실 결혼 따위는 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건 왜죠?"
"아무래도 내 지위나 능력만 보고 달려드는 남자들이 많았기 때문이겠지. 그런 것들에 환멸이 났으니까."
"확실히 그건 환멸 날만 하군요."
"결정적으로 맘에 드는 남자가 없었어."
"그럼 저는 맘에 드셨다는 거군요?"
"그렇지. 오자마자 바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나 전투력, 게다가 전설로만 듣던 전생자라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어라? 그건 아까 말씀하신 지위나 능력만 보고 달려들었던 그 사람들과 비슷한 거 같은데요?"
"하아 이게 그렇게 되나. 아니야 뭔가 그 외에도 순수한 끌림이 있어."
"끌림?"
"자넨 장본인이니 모르겠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단 말이야."
"잘생겨서 그런 걸까요?"
"물론 내 취향으로 잘생겼지. 하지만 잘생긴 사람은 귀족 중에도 많아."
타고난 높은 카리스마 덕분인가. 확실히 이곳에 와서 나를 싫어하는 여자는 본적이 없다. 나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되기 시작하면 다들 나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
"자네는 뭔가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느낌이 들어."
"그건 맞습니다. 때로는 제 태도가 건성으로 보일 때도 있겠지만, 사실 몇 번이고 고민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아 아무튼 그만하지. 계속 자네를 좋아하는 이유를 더 말할 것 같아서 부끄럽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조금 돌리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어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군사들에겐 엄격하고 진지한 사령관인 그녀가 내 앞에선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간만 좀 있었다면 사령관님을 덮쳤을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해! 자네는 부끄러움도 없나?"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조금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로 변해버릴까 봐 참기로 했다.
"그, 그런 행위는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실컷 하도록 해."
"그런 날이 오겠죠?"
"물론이지 난 자네를 믿어."
신뢰, 믿음 같은 것들은 나와는 거리가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 점점 그것들과 가까워진다.
타인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워진다. 믿음이라는 기쁨이 주는 무게. 감사히 받아들이고 그 믿음에 보답해야겠지.
"얌전히 드레스 입고 기다리고 있으세요."
"아아,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그녀와 작별인사를 하고 막사 밖으로 도망치듯이 나왔다. 사실 굿바이 키스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다음 행동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로지에를 찾아가야 한다. 마법에 관해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로지에에게 마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서쪽 격전지도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니 시간은 많지 않다. 최대한 단기간에 그녀에게 배울만한 점을 흡수하고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분명 앞으로도 태그에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기에 마법활용도를 더 높일 것이다.
그런 생각하며 곧장 로지에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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