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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하운드-8화 (8/79)

〈 8화 〉 2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2)

* * *

(2)

달이 꼭 하늘에 뚫린 구멍같이 생겼다.

황황히 타오르는 빛의 고리가 표면을 이루고, 안쪽은 커다랗게 뻥 뚫린 시커먼 구멍은 밤보다도 검고 어두워, 주변의 별빛괴 지나는 바람까지도 먹어치울 것처럼 보였다.

마계의 달이라.

마족들은 저 달을 통해 왕이 자신들을 굽어보고 보살핀다고 믿었다.

단순한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그렇게 믿는 모양이다.

뭐, 술안주로는 나쁘지 않다고 슬슬 생각하게 되었긴 했다.

분명 저 달이 뜬 밤에는 가슴 속이 어쩐지 줄곧 울렁거리곤 했으니까.

“뭐해?”

툭, 하고 어깨를 치며 곁에 주저앉는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이거 꿈이구만. 바로 옆에 무릎을 손으로 감싸고 주저앉은 녀석의 머리는 요 1년 사이에 꽤 자라있었다. 저 달이 주변의 별빛을 모조리 잡아먹는다면 이 녀석의 머리카락은 그 별빛을 모두 품는 듯한 금색이었다.

“알잖아? 내가 좀 개과라 야행성인 거. 잠이 안 와서 한잔하고 한숨 눈 붙이려고.”

이렇게 대답했었고, 뭐야 그건 하고 녀석은 웃었었다.

마시던 자그마한 술병을 내밀자 녀석은 웃으면서 받아 한 모금 삼켰다. 마시면 죽지는 않을 것들로만 모아서 만들었다고. 맛은 좀 그렇지만.

“너무 과음하지 않도록 해. 지나치게 마시면 오히려 잠을 깊게 못 자니까.”

술병을 돌려주면서 녀석이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조금 썼던 탓에 눈썹을 찌푸리고 조금 코를 훌쩍거리는 녀석의 얼굴이, 정신 차려보니 가까웠다.

“읍….”

이게 다 저 달 탓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쁘지 않은 게 맞겠지.

“…엔, 너어…. 으읍, 응….”

당황했다가, 흘겼다가, 살짝 눈을 덮는 눈꺼풀.

맞춘 녀석의 입술에서 조금 씁쓰레한 술맛이 났다.

캠프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도 파티 멤버들이 이 상황을 모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프 오우거 궁수 아질은 귀가 너무 밝아서 그 귀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뭐 그게 지금 중요한가?

녀석의 팔이 목에 감겼다. 꾸욱 끌어당겨 요구해온다.

입술이 입술을 탐하고, 포개어서 지분거렸다. 살짝 바들거리는 숨이 긁힌 흉터 위를 더듬었다. 감고 있다가 조금 뜬 푸르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었다. 달떠있다.

“아침이 되면… 곧바로, 마왕성… 에 갈 건데, 이러면 안….”

“밤일하느라 허리가 빠진 용사님이라니 전대미문이겠네.”

한번 놀리자 조금 샐쭉한 표정이 되어선 등을 꼬집는다.

악력이 장난이 아니라 아프지만 여기서 아픈 티를 보이면 남자가 아니지. 기합 넣고 참아내면서 천천히 녀석을 바닥에 눕혔다.

하아, 하아, 하아…

서로를 탐닉하고 있던 입술을 떼어가자, 고여 있던 숨이 일순 터져 나오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렇게 아래에 두고 보면 그냥 여자에 불과한 그녀에게 이 세상은 용사라는 이름을 주고, 마왕 타도라는 업을 지웠다. 풀어둔 성검이 손이 닿는 거리에서 그를 증명했다.

“…엔. 같이 도망가지 않을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답잖게.”

천천히 옷깃을 풀어 젖가슴을 드러내게 한 채로 목께에 입술을 대자 녀석의 숨이 살짝 높아져 헐떡이는 소리를 냈다. 파르르 떨리는 하얀 살결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만지면 손가락이 살살 눌리며 단맛이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크흥, 하고 콧김을 뿜으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냥, 이제 마왕 타도니 여신의 사명이니 하는 것에는 슬슬 신물이 나. 그냥 이대로 나랑 같이 도망치자. 엔…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 둘이서만.”

“다른 녀석들은 어쩌고?”

“우리가 사라지면 걔들도 무모하게 마왕성에 쳐들어가진 않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엉. 확실히 그럴지도 몰라. 네 말이 맞긴 하는데. 그런데.”

꽈아악, 손이 움켜쥐었다.

녀석의 풍만한 가슴도, 야들야들하게 풀어진 허리도, 매끈하게 뻗친 멋진 각선미의 다리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 녀석은 이렇게 죽여주는 몸매가 아니었다고. 좀 더 단단하고 거친 전사의 몸이었단 말이다.

움켜쥔 손 안에서 흉검 가름의 칼날이 콰아아앙, 녀석의 배를 내리찍었다.

“흉내를 내려면 좀 제대로 내지 그랬냐, 앙?”

칼끝에 찍힌 녀석의 희디흰 몸뚱이가 꿈처럼 흩어져갔다.

아니, 꿈이었다. 몸을 일으키고 보니 아질의 이층집 이불 속이었고. 내 위에 올라탄 채 생글거리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부웅, 급한 대로 주먹을 휘두르자 꺄앗 하고 과장된 비명과 함께 주먹을 피하며 등과 허리에 걸쳐 이어진 날개를 펼쳐 뒤로 물러서는 밤손님. 그 녀석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게 왜 밤마다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냐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손 닿는 곳에 둔 흉검의 자루를 움켜쥐어 칼날을 겨누며 대치했다.

꺄르르, 하고 요사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면서 박쥐날개가 허공을 파닥대다가 힐 끝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아질이 바로 달려오질 않는 걸 보면 이것도 꿈이겠거니 생각했다.

찰랑거리는 핑크색의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 사이에서 구불구불하게 휜 뿔.

등 너머로 날개가 그림자처럼 펼쳤고, 그 새카만 날개의 연장선처럼, 농익은 몸선의 요염함을 보태는 검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었다.

머리카락 색보다 조금 더 짙은 핑크색 눈동자가 한쪽 눈만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오랜만이야, 검성 군♡”

구면이었다.

지금은 죽은 마왕의 직속 수하 중 한 명인 서큐버스. 그것도 꽤 고위.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침대를 박차 돌진하며 칼을 휘둘렀다. 세간살이가 와장창 하고 박살났지만 꿈이니까 상관없겠지. 현실이라면 아질에게 쪼끔 미안하다!

꺄앗, 하고 한 걸음 더 물러나면서 물어뜯으려는 흉견의 송곳니를 피해낸 서큐버스. 앗 하고 얼굴에 당혹한 색을 띠었다. 그 뒤는 벽이다.

휘두른 칼을 회수한 뒤 옆으로 눕혀 쾅! 벽에 몰아붙인 씨발 서큐버스의 배때지에 칼빵을 먹여주었어요. 드디어 저 얼굴을 고통으로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마조년이지만.

“왜 왔냐. 나르콜렙시(Narcolepsy).”

“아, 하하… 하나도, 안 변했…네, 검성 군은…. 끅.”

원래도 흰 살갗이었지만 지금은 칼이 박힌 배에서 핏덩어리가 부글거리며 새고 있어서 더 하얗게 보인다. 뺨을 바들거리면서도 허세인지 모를 웃음을 지어보이는 이 서큐버스의 이름은 나르콜렙시라고 한다.

칼자루를 조금 비틀자, 고통과 쾌락감이 어째선가 반반쯤 섞여있던 녀석의 얼굴에서 고통의 비율이 증가했다. 떡상 레벨로 되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뭐,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로 죽을 리가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왜 왔냐고 물었는데.”

“아팟! 아파아파, 칼 좀 치우고오! 얘기해, 검성 군. 나,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바들바들 이어가던 허세를 단박에 버리고 칼등을 탁탁탁 손바닥으로 때려대며 이번엔 울상이었다. 쯧. 벽에 박아두었던 칼을 벽과 배에서 뽑아내자 주르륵 녀석이 주저앉았다.

정말 아팠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워낙 속임수와 기만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니 방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칼을 겨눈 채 눈을 부릅뜨자 상처를 검은 그림자 같은 것으로 막아 회복시킨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정마알. 늘 너무 거칠다니까. 그런 점을 좋아하지만.”

“닥치고. 왜 왔냐고, 빌어먹을 갈보 몽마년아.”

“말이 너무 심하네!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오랜만인데!”

왜냐고? 이 녀석은 내가 왜 뚜껑이 열릴락말락 부들거리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친절하게 가르쳐줄 수밖에.

“왜냐고? 넌 하필이면 그 녀석의 얼굴로 그 녀석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태연히 지껄였어. 알아듣냐? 그걸 생각하면 당장 네 뱃속 내용물을 뽑아다가 성인만 열람가능 장난감으로 만들어서 개밥으로 던져줘도 시원치 않다고.”

“윽….”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움찔거렸다. 조금 시무룩한 걸 보니 이렇게까지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

“아, 정말. 그 점은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사과할 테니까…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별로 검성 군을 화나게 하러 온 것도 아냐. 그러니까 얘기 좀 하지 않을래? 부탁이야.”

…뭐냐. 수상함이 펄펄 끓어 넘쳤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흉검을 등 뒤로 되돌리고는 팔짱을 끼며 말해보라는 양 내려다보니 나르콜렙시가 덧니를 살짝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그래서. 왜 왔냐고.”

“하아… 검성 군은 정말. 잠자리에 슬쩍 찾아온 미소녀한테 너무 건조하게 구는 거 아냐? 그런 점도 좋아하… 칼 뽑지 마, 스톱! 스톱 플리즈!”

파닥파닥 손을 내젓다가, 이쪽이 칼자루를 쥐려는 손을 떼어 내리자 툴툴댔다.

“검성 군이 마왕을 키우고 있다고 해서 와본 거야. 덧붙여 모시던 왕을 쳐죽이고 탈주했다고 들어서. 스카웃할까 해서!”

“그 녀석 말이냐. 키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왕을 쳐죽여. 뒈지실?”

“그 반응을 보니 아닌 것 같네.”

나르콜렙시가 또각, 또각 발을 옮겨서 침대에 앉고는 올려다보았다.

앳되지만 요염함과 색기가 감도는 미모를 가진 이런 서큐버스가 제 침대에 앉아있다. 로망이라면 로망이긴 한데. 가만. 왕을 쳐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건…

“너, 왕도에서 왔냐?”

“응. 한동안 왕도에서 지냈어. 나, 어지간하면 정체 들키지 않잖아?”

기만과 속임수, 변장에서는 마왕군에서 따라잡을 자가 없었던 녀석이다.

만만치 않은 싸움 실력도 갖추고 있어서 적으로 돌렸다면 꽤 성가신 상대. 아까도 녀석이 진심으로 나와 맞붙었다면 지금쯤 서로 피투성이가 됐을 테고.

끅끅, 하고 녀석이 허리를 굽힌 채 웃기 시작했다.

“검성 군, 화려하게 저질러버렸더라? 여왕을 암퇘지마냥 뒷골목에서 먹고 내다 버리는 짓을 하고오. 여왕 배에다가는 큼지막하게 Fucking Bitch라고 써줬다며? 그런 취미 있는 줄은 몰랐어. 혹시…”

“그 이상 말하면 죽인다.”

분명 녀석과의 사이를 거론할 것 같아 엄포를 놓으니 정곡이었던 모양. 툴툴대면서 입술을 닫았다. 치이, 하고 새침한 소리를 내더니 이번엔 팔을 뒤로해서 받치고 허리를 폈다.

“덕분에 왕도가 한바탕 난리가 났다구? 널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여왕이 기사단을 소집하네 군대를 소집하네, 검성 군을 받아주는 영지는 반역으로 다스릴 거라고 떠들어대는 걸 들었어. 갓 즉위한 여왕이 실행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너 대체 어디 있었냐?”

“응? 여왕의 시녀 중 하나였는데 나.”

…전혀 몰랐네.

이 녀석이 마음만 먹었으면 왕이든 여왕이든 쓱싹해버렸을 거란 얘기 아닌가.

그래도 죽은 마왕에 대해 복수를 꾸미거나 하진 않는 것 같고. 애당초 여기는 대마법사가 사는 곳이다. 만삭의 몸이라 조금 둔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집에 이렇게 쉽게 침투해온 것을 보면 수완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서큐버스 중에서도 메이트리악(Matriarch)이라고 불리는 최고위 클래스에 속하는 높으신 몸이니 꿈을 통해 잠입하는 것쯤이야.

“별말씀을.”

“태연하게 속마음을 읽지 마. 이 몽마 녀석아.”

“참고로 아직 검성 군은 꿈속에 있어. 그 말은 말야….”

슬쩍, 녀석이 색기어린 몸을 내게 가까이 붙이면서 배시시 웃음지었다.

혀가 슬쩍 나와서 제 입술을 핥고는 다시 쏙 들어갔다.

“나랑 이것저것… 요런 저런 재미를 좀 볼 수도 있는데 말야♡ 응? 검성 구운.”

“어떤 거? 네 배때기에 칼 박는 거?”

“…나쁘지 않지만 다른 재미 볼 생각은 아예 안 해?”

다시 샐쭉거리는 표정으로 바뀐다. 참 표정이 휙휙 바뀌는 녀석이구만, 하고 생각하며 대신 이마에 손가락을 따­악, 튕겨줬다. 꺄윽, 하고 조금 머리가 뒤로 밀려나면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친하게 굴지 마. 내가 네 친구냐.”

“검성 군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는걸.”

쳇, 하고 토라져서는 다시 조금 거리를 두고 앉는 나르콜렙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보면 아까 스카웃이 어쩌고저쩌고 말했던가.

“검성 군이 약소한 마왕 후보 중 한 명을 데리고 있다는 건 우리 쪽 소식통에서 들은 소식이야.”

“그런 거 아냐. 그냥 녀석이 졸졸 따라오고 있… 온 김에 네가 데려가서 마왕 시켜먹어라.”

굿 아이디어. 나는 혹을 떼놔서 좋고, 녀석은 잃어버린 마왕을 다시 세울 수도 있는 찬스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녀석은 투명한 분홍색 눈을 깜빡거린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 같다.

“내가 데려가면 검성 군 죽는데?”

…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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