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2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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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얼마 전. 마계를 구성하는 이들 중 가장 세력이 큰 대부족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회의… 콘클라베(Conclave)가 주인 잃은 왕좌 앞의 원탁에서 열렸다.
의제가 마왕의 선출과 향후 마족의 방침으로 정해진 가운데, 각 부족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 또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계에서 가장 세력이 큰 일곱 부족. 그중 누군가의 가랑이 아래로 들어가고 싶은 부족 따위는 없었다.
어느 부족이든 다른 부족을 짓누르고 가장 강한 자의 칭호를 얻고 싶은 게 당연했고, 그러한 약육강식이 권장되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룰이다.
“칠부족 연맹 대회의, 콘클라베를 개최하겠소. 이렇게 모여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오. 모쪼록 성과가 있는 회의이기를 바라고 있소.”
칠부족의 대표 중 가장 연로한… 죽은 마왕보다도 연로하다고 알려진 혈마족의 수장, ‘대신관’ 바알부르가 임시로 의장을 맡아 근엄하게 콘클라베의 개최를 선언했다. 엄숙한 조복을 몸에 걸치고 넓게 펼쳐진 피막의 날개를 접은 채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이 자리에서 마왕을 애도하는 것에 관심은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자기 부족에게 이득이 되는 자를 차기 마왕으로 선출할 수 있을지… 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바알부르는 한숨지었다.
“선대 마왕 영하께서는 오랫동안 지혜와 위엄으로 나라를 이끌어오셨소. 하지만 영하께서는 돌아가셨고,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둘러 새 왕을 선출하는 것이오. 왕좌가 너무 오래 비어있으면 백성들은 나아가야 할 바를 찾지 못하고, 불안에 떨 것이오.”
정치란 미묘하면서도 섬세한, 수면에 떠오른 거품 같은 것.
선왕에 대한 애도와 동시에 현안을 부각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발언자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필요하다면 힘을 과시하는 것을 망설여서는 안 되지만, 필요하지 않은 일에 힘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덧붙여 이 자리에 모인 이들처럼, 서로의 힘이 비등하다면 더더욱. 그 정도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라야, 여기 마련된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개인으로서는 투사일는지 몰라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들은 지도자의 처신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따르는 백성의 이익을 지키고, 나아가 극대화하는 데 필요한 정치술이었다.
바알부르는 발언자의 얼굴을 보았다. 발언한 자는 그 본질을 잘 알고 있었고, 말을 꺼내야 할 타이밍을 잘 골랐다. 여섯 부족의 대표의 주목을 받음으로서, 다음 발언으로 이어갈 기회 또한 손에 넣었다.
“선왕께서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신 부족들에게 ‘마왕의 알’을 내리셨소. 그중에서는 이미 후계자가 탄생한 부족도 있고, 혹은 안타깝게도… 선왕께서 내리신 기회를 허사로 만들어버린 가엾은 부족도 있소.”
발언자는 힐끔 눈을 돌려 옆자리에 앉은 이의 얼굴을 보았다. 발언자는 늑대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 눈이 바라본 자는 입술 사이로 길게 엄니가 튀어나온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였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발언자가 웃음지었다.
“군단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고견을 듣고 싶소만?”
“말할 것도 없다.”
흥, 하고 눈이 마주친 자는 불쾌하다는 듯 등을 등받이에 깊숙하게 묻으면서 팔짱을 꼈다. 잿빛 살가죽 아래에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근육과 온몸에 겹겹이 그어진 상처자국이 그가 정치가나 지도자보다 더 다른 본질에 가까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전사였다.
“선왕의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임종 또한 마왕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최후였음에 거듭 경의와 유감을 표하지. 허나 마왕은 어디까지나 당대 한정. 후임을 결정짓는 건 결국 대회의에서의 결론이 아닌가. 또한, 그 결론을 내리는 가장 명확하고 유일한 수단은 힘이다. 패왕족(?王?)은 마왕의 알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왕좌를 차지하는 데 그것이 필요하다면 가진 부족을 쳐서 빼앗겠다. 그것이 우리 방식이다.”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오크, 오우거, 트롤 등으로 이루어진 패왕족은 극단적인 전사 사회였고, 부족 전체가 하나의 군대나 다름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보급한다, 그것이 부족의 방침이요 철칙이었다. 마계의 가장 원초적인 규칙인 약육강식에 입각한.
“도대체가 회의를 하러 온 건지 엄포를 놓으러 온 건지. 패왕족에는 혀가 좀 부드럽게 돌아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말 다 했나, 다리 벌리는 재주밖에 없는 음마 계집년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한명이 말을 보태자 금새 발끈하여 으르릉거리는 남자를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보면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여자가 원탁을 톡톡 손끝으로 두드리면서 의장, 바알부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대신관님. 저런 발언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거예요? 이렇게 공공연한 위협을 받았으니 대신관님이 중재해주지 않으면 우리 몽마들도 대응할 수밖에 없는데?”
몽마족의 대표… 그들 가운데에서는 최고위에 속하는 ‘메이트리악’ 계급의 특사 ‘나르콜렙시’의 중재 요청에 바알부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잖아도 주름투성이인 얼굴의 미간에 몇 겹의 주름이 깊게 팼고, 아름다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엄중하게 패왕족 대표에게 경고했다.
“패왕족의 자무카여. 주의해주게. 그대 부족의 성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콘클라베는 각 부족의 대화를 위해 대대로 이어져 온 중요한 의례일세. 다른 부족의 특사를 겁박하는 것은 삼가도록 해 주게.”
“…먼저 도발한 것은 저쪽이오만?”
“몽마족의 나르콜렙시. 자네도 이후의 발언에 주의해주길 바라네.”
“네~에.”
양쪽 모두 납득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상황을 더 극단적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는 정도에서 받아들이고 물러나자 바알부르가 콜록콜록 기침을 뱉고는 아직 발언하지 않은 다른 부족 대표에게 시선을 옮겼다.
혈마족, 수왕족, 패왕족, 몽마족… 아직 대부족이 셋은 남아있었다.
“우리 용해(??)족은 마왕의 권좌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소. 이제껏 대대로 내려오던 독립적인 위치와 권리만 보장해준다면 어느 부족에서 마왕을 배출하든 관여하지 않겠소.”
용해족의 특사는 푸른 비늘이 군데군데 인간형의 몸을 덮은 위에 마찬가지로 자락이 긴 푸른 의복을 걸친 호청년이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땋아 뒤로 길게 늘어뜨린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양 원탁 아래에서 상자를 하나 꺼내어 내놓았다. 상자를 열자, 안에서는 거무튀튀한 어두운 청색의 표면이 반질반질한 알 하나가 그 안에서 드러났다.
“선왕께서 내리신 ‘마왕의 알’이오. 이것이 필요한 부족이 있다면 서약을 받고 양도할 의향도 있소. 이는 흑왕(?王)께서도 윤허하신 일이니만큼 신뢰해도 좋소.”
“용해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어리석은 이는 없지.”
당장 패왕족의 특사 자무카가 흥미를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쓸데없이 피를 흘리지 않고 온건하게 알을 이양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아까의 발언은 그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사들여야겠군.”
커다란 의자가 버거워 보이는 작은 체구의 특사가 손을 들고 발언을 요구했다. 워낙에 작달막한 몸인지라 방석을 몇 개씩이나 의자에 깔았건만 그가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는 의자 위에서 일어나야 했을 정도다.
하지만 누구도 그 체구가 작다 하여 빈한하게 여기지는 못했다. 작은 몸을 감추려는 것인지 얕보이지 않으려는 의도인지 몰라도, 그가 손가락마다 주렁주렁 끼고 있는 호사스러운 금제 마법 반지가 반짝거리는 것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소? 가격은 가능한 맞춰드리겠소만.”
“로렌초… 콘클라베에서 저잣거리 흥정 같은 발언은 삼가게.”
고블린, 코볼트 등으로 구성된, 마계의 운송과 상업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는 소마족(小??)의 특사인 로렌초에게 경고 같은 바알부르의 한 마디가 날아가니 투덜거리면서 다시 푹신한 비단 방석 위에 주저앉은 로렌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뚫어지게 상자 안의 알을 바라보았다.
자무카가 혀를 찼다. 로렌초가 속한 소마족의 가장 커다란 고객은 자신들 패왕족이다. 소마족이 알을 손에 넣는다면 체면이 깎이는 일 없이 조금 더 대가를 지불하는 정도로 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소마족도 용해족과는 다르지만 그저 돈을 벌 상품이 될 거라는 전망으로 마왕의 알에 침을 묻혔을 따름이고 진정으로 마왕의 왕좌를 차지할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 마왕? 소마족이? 하! 왕좌에 어울리지도 않는 조그만 놈들이 무슨.
“저기, 요정족은 아무 할 말도 없는 거야?”
나르콜렙시의 한 마디에 바알부르의 시선이 쏠렸다. 흑갈색에 가까운 피부와 뾰족한 귀를 가진 다크엘프 남성, 캄신이 시선이 충분히 자신에게 향한 것을 깨닫고는 어흠, 하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실은. 선왕의 유지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말해보시게.”
바알부르가 서두르지 않되 조용히 채근하자 좌중의 공기가 조금 가라앉고 평온해졌다. 캄신은 품 안에서 봉인이 풀린 흔적이 없는 두루마리를 바알부르에게 전달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선왕 영하의 유지입니다. 200년 전, 저의 아버지에게 어의(??)를 맡기셨고 붕어하시기 전날 밤 저를 따로 불러 이르셨습니다. 어의는 바뀌지 않았으며 후임을 정하는 콘클라베가 열리면 이를 공개하라고 명하시면서 말이지요.”
“선왕께서 남기신 유훈이라면 도저히 허투루 대할 수 없겠군. 내가 공개해도 되겠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캄신이 고개를 끄덕였고, 좌중을 둘러보며 다른 다섯 부족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후에 천천히 바알부르가 봉인을 풀었다. 펼쳐지는 두루마리를 주름진 눈이 가늘게 뜨인 채 읽어나갔다.
“…이건, 의외로군.”
허어, 하고 탄식하는 바알부르의 반응에 못참겠다는 듯 패왕족의 특사 자무카가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킬 듯이 답답해하다가, 주변의 눈총에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알 중 하나를 200년 전, 어느 인간의 손에 맡기셨다고 하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무카가 한 마디를 내뱉기 전에 더 이를 갈며 일어선 것은 수왕족의 대표였다.
수왕족은 인간들과 사냥 영역을 둔 분쟁이 잦아, 마계의 부족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인간과 원한 관계가 컸다. 특히 그가 속한 늑대 종족은… 인간들에게 원한의 깊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선왕께서 노망이라도 나셨었단 말이오? 어찌 인간들에게 왕좌의 자격을 시험할 기회를 맡기셨단 말이지? 그것도 200년이나 전에!”
“…인푸여. 이 자리에 앉은 이들 중 누구 하나 인간에게 원한을 갖지 않은 자는 없네. 우리 모두 인간에게서 왕을 지키지 못한 불충을 저지르지 않았나. 선왕 영하의 유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앉게.”
인푸. 그렇게 불린 수왕족의 특사가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지만, 그렇다고 유언장의 내용을 수긍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자리의 모두가 유언장의 내용을 불합리하다 여기는 건 같았다. 의장 바알부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로렌초가 눈을 빛내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200년 전이라… 이미 알이 깨어났을 가능성은 높겠구먼.”
흐응, 하고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몽마족의 특사 나르콜렙시도 마찬가지. 다시 주의가 한 데 모인 가운데, 유언장의 조금 더 아래를 읽어내려가며 바알부르가 떨리는 손으로 길게 자라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선왕의 유지일세. 때가 되었으니 그 알을 불러들여… 선왕께서 낙점한 후보 중 하나로 왕의 자질을 물으라… 이렇게 하교하셨다.”
왕좌를 차지하기에 어울리는 자질.
나르콜렙시는 어떠한 예감을 느꼈었다. 꿈과 아주 밀접한 종족인 몽마이니만큼,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어도…
이제부터 재밌는 일이 벌어지리라, 그런 예감이.
이 일을, 옛 적이자 흥미가 당기는 남자. 마왕을 죽인 용사의 동료 '검성'에게 말하는 지금도.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기를 그녀는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