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24화 (24/79)

〈 24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9)

* * *

(9)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는 그 누구도 앉지 않았음에도,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호사스러우면서도 경건한 만듦새에, 의자 머리의 좌우에 용과 사자의 새김이 더더욱 위압감이 더해져서.

엘프의 섬나라 니네베에서 들여온 오래 묵은 요정목을, 자유도시 에트루사에서 가장 솜씨가 뛰어난 장인을 초청해 만들었다던가.

왕이 앉기에 합당한 의자였다.

그 의자에 이 나라의 주인이 앉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왕이 있을 리가 없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왕의 집무실이었다.

영주와 관료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여는 왕의 홀은 아니지만, 엄연히 왕이 나랏일을 돌보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자아,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볼까요.”

하지만 손님이 들었음에도, 왕의 의자는 비어있었다.

왕의 형제인 왕제, 또한 왕을 보좌하는 섭정… 명실상부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 ‘발레리아 바노슈 드라쿨레아’는 현 트란 드라쿨루의 여왕 ‘메살리나 바노슈 드라쿨레야’를 대리해 이 자리에 있었다.

“네에, 그럼… 그러시지요. 어, 음… 네에, 네.”

왕의 손님은 무척이나 왜소한 몸집의 사내였다.

품이 넓은 소매에 자락이 넓은 옷을 입은 탓에 뒤뚱거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옷자락이 끌렸다. 입가는 복면으로 가렸고 머리는 두건으로 가렸으며 그나마 드러난 눈가에도 검은 칠을 한 것이 어지간히 맨얼굴을 보이기 싫은 눈치였지만, 발레리아는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으으응, 후으, 으으… 크흥. 으….”

무례로 치면, 그녀 쪽이 더 할 테니까.

발레리아는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궁둥이를 붙인 것은 의자가 아니었다.

사람이었고, 여자였고, 그것도 하얀 나신을 아낌없이 드러낸 젊은 여자였다.

“어머, 의자가 자꾸 말을 하네요… 이거 참.”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래된 의자는 으레 삐걱거리곤 하니까요.”

엎드려 두 팔과 무릎으로 바닥을 딛은 채 힘겹게 제 등에 앉은 발레리아의 무게까지 버티는 여자의 몸에 축축한 땀이 연신 방울져 떨어졌다.

바들거리는 팔 사이로 출렁거리는 젖가슴에서도 땀방울이 주르륵 맺혀 서오른 젖꼭지 아래로 톡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눈에 씌워진 눈가리개가 축축했다. 그리고 입에 물린 구멍이 뚫린 재갈에서도 진득하게 침이 새어나왔다. 안면에서 자유로운 감각이라곤 후각과 청각뿐이었으니 발레리아의 말에 안대 아래 볼이 불그레 달아올랐다.

“자, 이겁니다. 보시지요.”

조그마한 남자가 화려하게 장식된 궤짝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가락 끄트머리가 열쇠를 쥐고 궤짝의 잠금을 푼 뒤 내용물을 발레리아에게 보인 순간, 그녀의 눈에 만족과 탐욕이 함께 일렁였다.

“이게 정말로…?”

“그렇고말굽쇼. 보증합니다요. 여기저기에서 값을 부르는 곳이 많은 물건이니만큼 제대로 값을 후하게 치러주실 곳을 물색하던 참입죠.”

“사겠어요.”

발레리아의 결정은 신속했다. 하지만 자꾸만 신음을 흘리는 ‘의자’가 거슬렸다.

“조용히 해, 지금은 의자잖아. 제대로 의자 노릇조차 못 하다니.”

“끄히익…!”

신통치 않은 ‘의자’ 엉덩이를 손에 들고 있던 채찍으로 체벌하자 처연하게 ‘의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게 들려왔다. 신음을 흘리다가 숨을 가라앉히는 소리가 가물거리자 조그마한 남자와 그와 같은 체구의 수행원인 듯한 이들이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자, 얘기를 계속하죠.”

…이것도 나름대로,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방책인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변태? 어느 쪽으로도 신빙성이 넘쳐서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려웠지만, 아무튼 확실한 것은 이 나라의 2인자, 발레리아 바노슈 드라쿨레아는 틀림없는 광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을 의자로 깔고 앉아놓고선 손님을 맞이해 이렇게 천사처럼 웃을 수 있겠냐고.

제대로 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긴 한 건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사내는 일단 빨리 이야기를 매듭짓자고 다짐했다.

“그럼, 지불은 어떻게….”

“그러네요…. 이제부터가 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발레리아가 오른쪽 입가만을 살짝, 왼쪽보다 조금 더 높게 일그러뜨린 채 상대의 의중까지 전부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이 웃음지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꺼풀과 눈매, 눈썹임에도 조금도, 조금도 웃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금이나 은 좀 얻자고 이 나라에까지 오진 않으셨을 테고. 금이나 은보다 훨씬 많이 남는 장삿거리를 위해 몸소 이 먼 곳까지 오신 거겠죠. 아닌가요?”

“거기까지 알아주신다면 이야기는 빠르죠.”

사내가 품속에서 둘둘 접힌 두루마리를 꺼내어 펴고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한껏 겸양 어린 태도로 내밀었다.

“검토하지요. 어디.”

발레리아는 일부러 발뒤꿈치를 뒤로 옮겨 ‘의자’의 젖가슴을 툭툭 건드리면서 흐음, 하고 두루마리의 내용을 검토했다. 녹색 눈동자가 욕망 앞에서 한시도 주체하기 힘들다는 양, 그러면서도 인내로 번들거렸다.

“괜찮은 조건이네요. 하지만 협의할 사항은 있겠어요.”

“말씀하시지요.”

이제부터가 진짜 협상의 시작이다.

두건 아래 복면으로 감춘 커다란 코를 만지작거리며 사내가 응수했다.

상대가 단단히 맛이 가버린 미친년이라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이 먼 트란 드라쿨루에까지 와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일단… 그러네요. 이 나라의 인간은 안 됩니다. 세금을 낸다면 안 되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이 정도면 충분히 물러서지 않았나. 발레리아는 그렇게 여기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쪽도 먼 길을 왔다. 손해보고 싶지는 않겠지만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싫겠지.

이쪽으로서는 손해보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저쪽으로서는 후하다고 여길 정도의 거래 조건이어야 했다.

사내의 머릿속도 바쁘게 굴러갔다. 이 나라의 인간은 안 된다. 거기에 세금을 내는 쪽도 안 된다. 어쨌든 이 나라에서 한 푼의 세금도 빠져나가게 두지 않겠다는 것은 일국의 섭정으로서 당연한 입장이겠으나.

그렇다면 ‘인간’도, ‘세금’도 내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아니, 그 조건을 보장한다면 행동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크게 한탕 남겨 먹을 수도 있었다.

단골 거래처는 은근히 오래 이어진 관계를 내세워 최근 씀씀이를 줄이고 있는 만큼,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면서도 짭짤하게 남길 수 있다면 최상의 결과를 냈다고 보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 조건으로 거래하지요.”

“네. 트란 드라쿨루의… ‘군주’의 이름으로. 이 문서가 왕의 재가를 받은 공식 문서임을 확약하겠습니다. 네. ‘국왕 폐하’께서도 무척, 기꺼워하고 계시네요.”

히죽, 그려붙인 듯한 웃음을 지으며 일부러 한번 몸을 들었다가, 무게를 실어 내려앉히며 조금이라도 더 무게를 싣고자 다리를 꼬았다. 끄으으윽…! 비참한 비명과 함께 ‘의자’가 내려앉을 뻔했다가, 겨우겨우 버텨냈다.

“…확실히 확인했습니다요.”

사내는 끌끌, 속으로 혀를 차면서 왕의 인장과 서명이 적힌 문서를 받아 돌돌돌 다시 두루마리 형태로 말았다.

목적은 이루었으니 이제 구태여 이 미친년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빠듯하니 한 명이라도 더 ‘상품’을 확보하는 게 훨씬 더 중요했다.

이 나라의 왕이 어떻게 됐든, 이 나라의 왕제이자 섭정이 어떤 인물이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로지 가장 돈이 되는 장사가 사람 장사라는 사실이지.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요. 허가받은 대로 장사를 시작하려면 저희 쪽에서도 이런저런 밑준비가 필요해서 말입죠.”

“아아, 네에. 살펴가도록 하세요. 저도 굳이… 바깥까지 배웅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럼요, 그럼요.”

발레리아가 살짝 턱짓하자, 마치 고양이 앞에서 활로를 찾아낸 쥐떼처럼 조그마한 사내와 그 수행원들이 잽싸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간 뒤 발레리아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겉모양이나마 예의바른 웃음을 그려 붙이고 있던 그녀였음에도, 손님들이 나가자마자 지독한 권태에 찌들은 표독스러움이 독버섯의 독처럼 슬그머니 올라와 아름다운 용모에 드리웠다.

“하아… 정말. 가져온 게 그것만이 아니었다면 상대해주지도 않았을 텐데.”

발레리아가 몸을 일으켜세우는 것과 동시에,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의자’가 바닥에 엎어졌다. 쌕쌕거리며 숨을 내쉬는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발을 들어 콱 하고 허리께를 내리찍었다.

“끄하아아아악!”

“언니, 언니. 쓸모라곤 모기만큼도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내 언니…. 조금 전의 거래는 이 나라의 국익에 엄청난 도움이 될 만한 거래였어. 그런데 언니가 몇 번이고 망칠 뻔했던 거… 알고는 있어?”

마치 노련한 연극배우가 비탄 어린 대사를 소화하는 것 같이 한탄하면서, 발레리아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여자의 머리카락을 콱 잡아 머리를 들게 했다.

짜아악, 짜아악, 짜아악…

구슬 모양의 재갈을 문 채로 뺨을 연거푸 두드리자, 터진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새었다.

후욱후욱후욱… 고통과 절규로 일그러진 숨이 코에서 덩어리째 비어져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그 돼지 같은 목소리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해서 몇 번이나 거래를 망칠 뻔하고. 아아, 정말. 어디에 내놓을 수도 없다니까. 아아, 정말 어쩔 수 없어, 언니는….”

싸늘하게 식었던 눈이 갑작스럽게 온기를 되찾았다.

입가에 히주욱, 하고 웃음을 머금으면서, 공포에 부르르 떠는 여자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을 들은 여자에게만은 필시 절망적인 내용이었던 모양이었다.

“자아, 그럼. 이제… 내 나라에 들어온 쥐새끼만 쫓아보내면 되나…?”

‘내 나라’.

왕이 아닌 자에게서 나오기엔 너무도 부자연스러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 불경한 언사를 입에 담으면서, 발레리아는 다음 계획에 즐거운 마음으로 착수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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