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27화 (27/79)

〈 27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12)

* * *

날이 밝은 뒤, 내가 취한 행동은 간단했다.

본래 사냥에는 덫과 미끼가 중요한 법.

호두나무와 벌꿀술을 나와 한참 동안 번화한 중심 거리를 보란 듯이 거닌 뒤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예상대로였다. 굽이굽이 지나는 골목길을 느긋이, 천천히 걸었다.

“이쯤이 좋겠군.”

도망칠 퇴로가 없는 막다른 골목 앞에 서니 예상대로… 따라붙는 발소리가 이제 인기척을 감출 생각도 없이 다급한 소리로 바뀌었다. 세 놈인가. 딱 좋다.

“하이엔 더츠백!”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내가 아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내가 아는 냄새도 아니었다.

지난밤의 E라고 하던 그 여자의 경우에는… 워낙 향수를 짙게 뿌려놓아서 냄새를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날 아나?”

“지금 이 나라에서 댁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어? 댁의 목이 얼마나 비싼지 정도는 알라고.”

“호오, 얼마나 비싸지?”

등을 보이고 있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눈에 커다랗게 흉터가 있는 마른 놈. 불룩하게 불거진 배에 멧돼지 문신이 있는 덩치 큰 놈. 귀 한쪽이 뜯어먹힌 엘프 놈. 전부 지독하게 흉악하게 생겨선 흉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 개성 만점이다.

“헹. 마왕을 따버린 영웅이자 여왕을 따먹어버린 반역자의 목이라고 하기엔 값을 좀 후려치긴 했지만 적어도 한동안 밥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돈 된다고.”

“그렇게 비싼 분이 칼 한 자루 없이 윈돌을 보란 듯이 돌아다녀서야 우리더러 빨리 목을 가져가 주십사 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안 그래?”

“뭔 소리야. 칼 제대로 갖고 있는데.”

내 반문에, 애꾸눈 놈이 하나 남은 개구리 같은 눈을 크게 치떴다. 눈동자가 도로록 움직이면서 내 손과 허리, 등을 차례대로 훑으며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화를 냈다.

“뻥 치지 마! 칼이라곤 아무것도 없잖아!”

“등신아. 저기 돼지 같은 놈이 들고 있는 커다란 게 있잖아.”

입가 한쪽만을 일그러뜨리며 이죽거리자 애꾸눈과 짝귀 엘프 놈의 눈이 커다란 푸줏칼을 들고 있는 뚱뚱한 덩치 놈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세 곳… 아니 네 곳에서 집중되자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덩치 놈이 손을 내저으며 당황했다.

“아니, 아니, 이건 내 칼이다! 안 줄 거야!”

“지금 저 새끼, 우릴 바보 취급한 거지? 좋아, 죽여도 상관없다고 쓰여있었으니까 냉큼 죽여버리고 목을 따서 현상금을 받아 챙기자고!”

내가 그래도 나름대로 검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몸인데 칼을 안 들고 있다고 이렇게 만만히 보는 놈들이 있다니 개탄스럽다. 목을 두어 바퀴 돌리고 주먹의 관절을 풀었다. 뼈에서 두둑두둑 소리가 났다.

“자아, 우리 이름을 들어둬라! 우리는…!”

“아아, 일회용 엑스트라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애꾸눈의 코뼈를 부러뜨려주고, 돼지 놈이 아침에 먹은 빵을 게워내게 해서 체중 감량을 조금 도와주고, 짝귀 엘프 놈의 관자놀이에 먹먹한 이명을 선사해주는 데 그리 수고를 들이진 않았다.

얼마나 고마운지 지금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린 채 골골거리는 일회용 엑스트라 삼인방을 내려다보곤 손을 훌훌 털었다.

“어이, 나르콜렙시. 이놈들 중에 있냐?”

그들의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보였다.

파닥파닥파닥, 박쥐 한 마리가 이정표에 매달려있다가 떼를 지어 몰려와서는 골골거리는 엑스트라 삼인방의 뒤에서 소용돌이치며 날개를 파닥였다. 그 날갯짓 속에서 천천히, 고혹적인 의상으로 몸을 감싼 여자가 몸을 드러냈다.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저 녀석은 서큐버스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비해서는 커다랗지만 그래도 위엄이 쩔도록 커다랗지는 않은 박쥐날개를 펼친 채 또각, 또각… 박쥐 떼 사이에서 걸어 나온 녀석의 이름은 나르콜렙시.

머리에 왕관처럼 구부러진 뿔을 세심하게 만지면서 길게 자란 핑크색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흩어냈다. …대체 누구에게 뭘 어필하는 거지?

“음… 있네, 있어. 미끼가 좋으니까 낚시도 잘 되는걸. 한 방에 끝날 줄은 몰랐네. 거기 귀 한쪽밖에 없는 엘프 녀석.”

나르콜렙시는 내가 E를 만나고 있던 밤사이 분주하게 이 도시 뒷골목의 꿈을 열심히 뒤져서 경매에 관련된 불량배를 색출해냈다. 그 중 하나가 여기 엎어져 있는 짝귀 엘프 놈인 것이고.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천천히 다가가서 발끝으로 툭툭 차고 흔들었다. 미동도 없다.

“어이, 어이. 골로 갈 정도로 패지 않았어. 너 이 새끼, 엘프면서 엘프를 팔아먹는 짓에 동조했냐?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네놈도 꽤나 썩은 놈이구만. 야, 나르콜렙시 이 자식 ㄲ…”

발로 흔들어도 미동도 없는 놈의 앞에 쭈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놈의 손끝에서 날카로운 반사광이 번뜩였다.

푸욱, 정확하게 왼쪽 가슴, 갈비뼈 사이를 뚫은 칼날은 심장에 확실히 닿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히죽, 웃음을 빼물은 채 손을 뻗어 놈의 목줄기를 콱 움켜쥐었다.

“여어, 안되셨어. 한 방에 확실하게 죽일 생각이었구만.”

“꺽, 컥…! 무, 말도 안…!”

“되거든. 그런 게.”

남은 손으로는 왼쪽 가슴에 박힌 단검의 자루를 쥐고 뽑아내어 내동댕이쳤다. 조금 탁한 색의 피에 젖은 칼날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 이미 죽은 놈의 심장을 찔러봐야 심장에 기별도 안 온다 이거지.

“뭐 그대로 들으라고. 나는 이래뵈도 대화를 꽤 즐기는 편이거든. 네놈이 약삭빠르게 군다면 내 가슴에 박은 칼밥은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어.”

한번 손에 꽈아악 힘을 주었다.

팔힘만으로 짝귀 엘프를 들어 올려 살짝 공중에 뜨게 하자, 놈의 눈에 공포감이 어렸다. 잘 됐군. 지금은 그 공포감이 조금 필요한 참이었다.

“저쪽의 내 동업자에게 맡기면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지만 가능하면 신사적인 방법으로 가고 싶군. 자, 알고 있는 걸 모조리 말해라. 노예 경매가 열린다는 장소는 어디냐.”

“컥, 커헉, 끄훅… 그걸, 순순히 말할 것 같…!”

놈이 오기를 부렸다. 어차피 말했다간 경매를 주관하는 측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뭐어, 뭐어. 선택은 네 몫이긴 한데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얘기하고 싶군. 어차피 넌 어떤 식으로든…”

순간, 바닥에 엎드려 있던 놈의 일당 두 명이 눈짓을 주고받은 뒤 몸을 일으켰다. 외눈박이놈은 손에 낀 클러를 앞세워 내게 달려들었고, 뚱뚱한 놈은 커다란 푸줏칼을 나르콜렙시를 향해 휘둘렀다.

“호잇.”

나르콜렙시가 마치 지나가다가 거리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발견한 것 정도로 놀라 눈을 조금 치뜨고는 그대로 뚱뚱한 덩치 놈의 가슴팍을 가볍게 내쳤다.

콰당탕, 하고 가볍게 덩치가 날려져 벽에 처박혔다. 한동안 정신은 차리지 못할 것이다. 욥, 하고 놈이 들어 올렸다가 허공에서 놓쳐버린 푸줏칼은 나르콜렙시가 받았다.

“꺽, 끄호, 후고고고고고고고…”

클러를 끼고 달려들던 놈은 발등을 들어 가랑이를 후려찼다. 거시기는… 뭐,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조절했다. 은혜에는 감사하도록 해. 녀석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얘기는 하게 되어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느냐 아니면 네가 걱정하는 대로 죽느냐의 차이이지 않겠냐? 후자라면 뭐, 튈 정도의 시간은 있을지도 모르지.”

“괴, 괴, 괴물 년놈들…!”

어이어이, 실례구만.

“저 녀석은 정진정명 마족이지만 난 멀쩡한 인…”

“간 아니잖아. 심장에 칼을 박아도 죽지 않는 언데드지.”

그 말도 맞긴 하군.

낑낑거리며 내 팔을 불잡고 있던 짝귀 엘프의 눈에 겨우 체념이 서렸다. 후욱후욱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던 숨소리도 느릿해져서는 젠자앙, 하고 어설픈 욕설을 뇌까렸다.

“말할게, 말할 테니까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그대로 손을 놓자 철퍼덕 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짝귀 엘프 놈이 미련이 남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퇴로는 나르콜렙시가 막고 있으니 도망은 치지 못할 것이다.

“얼른 말해라. 세 놈 다 뒷골목에서 무연고 변사체로 발견되고 싶냐? 난 성질이 급해.”

“젠장! 잉스펀 지구 3번가, ‘마담 카틀레야’의 저택이다! 이번 볼룬디에 거기서 노예 경매가 열린다고 들었어, 그 이상은 몰라. 정말이야!”

“뭐어뭐어. 진정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썩 꺼져.”

E에게서 초대장을 받지 않았다면 이 녀석을 좀 더 쥐여짜서 초대장을 어떻게든 받아내려 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나르콜렙시가 옆으로 비켜섰고, 죽은 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세 놈 다 꽁지 빠지게 뒷골목을 빠져나갔다. 애꾸눈 놈은 묘하게 불편한 것처럼 절룩거리는 꼴로 빠져나갔고. 저런. 사내라면 거기 간수는 잘 해야지.

“이걸로 일단 장소와 시간, 그리고 수단은 다 손에 넣은 셈인가. 빚졌다, 나르콜렙시.”

“흐으응. 검성 군, 그 빚 말인데. 지금 바로 받아도 돼?”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르콜렙시가 다가왔다.

이번엔 또 뭘 뜯어내려고. 뭔가 기대감을 잔뜩 담은 녀석의 분홍색 눈이 빙글거리면서 올려다보는 게 제법 부담스럽다.

“나 피곤하단 말야. 밤에 잠도 못 자고 여기저기 어설픈 녀석들 꿈에 기웃거리느라.”

“어차피 하급 몽마들한테 시킨 거 아니었냐?”

“관리직도 관리직 나름의 고충이 있단 말이에요.”

악몽이나 어설픈 음몽을 보여주는, 자의식이 없는 작은 몽마를 부리는 주문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시 전역을 담당하는 데에는 나름의 수고가 있기 마련이다. 빚을 진 이상 못 본 척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이번엔 뭐가 갖고 싶…”

말이 이어지지 못했다.

다가온 나르콜렙시가 살짝 까치발을 들었고, 입술을 포개어왔다. 파르르, 펼쳐진 날개가 한 차례 너울거리면서 파닥였다.

“응… 갖고 싶은 건,”

3초? 그 정도쯤 입술을 대었다가, 천천히 물러나는 나르콜렙시의 태도에 화는 나지 않았다. 조금 부아가 치밀긴 했지만. 한 걸음쯤 떨어져선 눈을 찡긋거리며 짓궂게 웃는 녀석의 이마를 때려줄까, 1초 정도 고민했다.

관두기로 했다. 아무튼, 빚을 진 건 빚을 진 것이니.

“…역시, 이거?”

제길, 영악한 녀석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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