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34화 (34/79)

〈 34화 〉 2 / 인면수심 (6)

* * *

(6)

윈돌을 떠나거나.

아니면 녀석을 돕거나.

녀석의 제안에 당장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릿속이 조금 어지럽게 뒤엉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유쾌한 기분은 못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신이 마치 이 경매장을 빙자한 체스판에 놓인 졸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빈 잔을 내려놓고는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인데.”

“당연하지. 마음에 안 드니까.”

현자라는 이름은 도박으로 딴 것이 아니었기에 녀석은 내 표정에 얽힌 감정을 손금 보듯 쉽게 읽어냈다. 내 이런 반응도 녀석에게는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 같아서, 불쾌감이 한층 더 짙게 치밀었다.

“네가 뭘 하든 나랑은 상관없어. 여길 뜰 생각도 없고. 알겠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날 도와주곤 했으면서?”

“헹, 집어치워.”

젠장, 닭살 돋는 말만 골라서 하는 자식 같으니.

어차피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을 녀석도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한층 더 열이 뻗쳤다.

“경고는 했다. 내 원망은 하지 마.”

“할 것 같냐. 어이! 얘기 끝났어!”

어딘지 우울한 낯빛의 놈을 지나쳐 방으로 돌아갔다.

…여기도 여기 나름대로 편한 분위기는 아닌 그대로다. 수도녀와 검사, 그리고 마족 하나가 서로 대치…. 이거 참, 누가 악당 패거리인지 모르겠구만.

아무튼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는지, 이야기를 마쳤다는 말에 나르콜렙시가 금새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반색했다. 생글생글 웃는 낯은 진심으로 기뻐보였다. 그렇게나 거북했던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이엔 군.”

“유스티카는?”

“그게 말이지….”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뭐야, 왜 그러지? 침대에 눕혀둔 레오레가 화장실에라도 갔나 생각했는데 나르콜렙시의 눈치가 몹시도 수상했다.

“그게 말이지. 화장실에 간 건 맞는데 말야.”

“음. 여기 이 술병은 뭐냐?”

레오레가 누워있던 침대 바닥, 나뒹굴고 있는 고급진 술병 한 개.

흔들어보니 텅 비었네.

“…걔가 조금 술기운이 필요하대서.”

“설마 이걸 유스티카 혼자 마시게 했다고?”

“별로 안 독한 줄 알고.”

잘 하는 짓이다.

여느 때와 같이 나르콜렙시의 이마에 딱밤을 한 방 튕겨버리자, 끽 하고 머리가 뒤쪽으로 돌아가면서 우는 소리를 냈지만 제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한 양 나르콜렙시는 울먹이며 이마를 문질렀을 뿐 반항하진 않았다.

지켜보던 E…가 쿡, 하고 웃었다.

“재미있으신 분이시네요.”

“하나도 재미없어. 어쨌든 너희랑 할 이야기도 다 했고, 우린 이제 우리 대로 움직일 거니까… 어이, 유스티카!”

화장실 문을 탕탕 두드렸다.

문은 잠겨있는데 사람 기척은 없어서 잠깐 이 문을 부숴야 하나, 하고 생각했을 즈음이었다. 등에 멘 흉검의 자루에 손을 뻗으려는데 문이 덜커덕… 열렸다.

“…어이, 괜찮…냐?”

“괜찮습… 니다. 욱.”

속이 무척이나 거북해 보이는 레오레가 시체처럼 나쁜 낯빛으로 걸어 나왔다.

그나마 걸음은 갈지자로 꼬이고, 수려하고 단정한 얼굴도 폭음 탓인지 무척… 표정이 볼만하구만.

“…죄송합니다. 역시 조금… 욱…. 잠깐만, 어깨를 좀… 우욱.”

…술 약했나?

눈이 조금 풀리고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레오레.

그녀의 팔을 붙들어 지탱해주자 대번에 나르콜렙시가 도끼눈을 떴다.

“너도 문제야. 이렇게 퍼마실 동안 대체 뭐했냐.”

“음… 구경?”

“잘 하는 짓이다!”

쌕쌕 숨을 몰아쉬는 레오레를 붙들고 있지만 않았으면 그 이마에 한 방 더 날려줬을 거다. 메롱, 하고 혀를 내미는 녀석의 뻔뻔함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유스티카, 어이, 좀 정신 차리고 걸어봐. 제길, 좀 말리지 그랬냐!”

나르콜렙시는 투명한 눈을 조금 크게 뜬 채 깜빡였을 뿐이다. 쟤한테 뭘 기대할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움이 되는 녀석이 없네, 정말.

이거라도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윌리엄이 준 수호부를 레오레의… 젠장, 이걸 넣을 만한 데라곤 없잖아. 가슴받이와 고간가리개밖에 없는 갑옷 의상이라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엉덩이에 쑤셔 넣을 수도 없고, 대충 그녀가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에 끼워 넣었다.

“…….”

…별로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치부만 겨우 가리는 고간가리개 아래로 쭉 뻗은 다리는 여전히 돌풍에 휩쓸린 부들개비마냥 후들거리면서 전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틀렸구만, 이 자식들.

한숨이 푹 나온다. 조금 낯간지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여기에 조금 더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나올지 선택의 순간이다. …레오레의 상태가 이상해서 여기에 들어온 건데 대체 뭐냐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아버님….”

감겨있던 레오레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물까지 주륵 쏟았다.

또르륵 하고 눈물방울이 발그레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수려한 용모와 어울려 고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이런 상황에서 울기까지 하면 내가 뭐가 되냐.

늑대원숭이인지 하는 용병놈의 눈도 날 쓰레기보듯 하기 시작했단 말이다!

도저히 여기 죽치고 앉아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젠장할, 따라와!”

레오레를 부축한 채로 윌리엄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객실에서 끙끙거리며 나왔다.

나르콜렙시가 쪼르르 따라붙는 게 무슨… 오리 가족이 따로 없네.

투덜투덜, 마음에서 우러나 내뱉지 못하는 쌍욕을 시원스레 풀어놓지 못하고 복도를 걸었다. 레오레는 그냥 짐짝이나 다름없는데 어딘가에 안전하게 눕힐 곳이라도 없나,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이거 놔…! 난 노예가 아니라, 아니… 여기 있는 윈드엘프들 중 그 누구도, 노예가 아니란 말이다! 당장 놓지 못해! 이 무례한 놈, 폭풍사냥꾼 루드라 님의 이름으로 네놈들 얼굴 다 봐 뒀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모퉁이를 돌아 고개를 내밀었다. 북슬북슬하여 겨울철에 아주 유용해보이는 꼬리가 보였다. …불안한 예감 또한 함께 찾아왔다. 지금 상황 이상으로 더 골치가 아파질 것 같은 예감이.

자, 서둘러 지나가자. 여기서 괜히 어정거렸다간 더 골치만 아파진다.

이럴 때 발이 축축 처진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레오레가 제 발로 걸을 수 있었다면 상황이 좀 낫…

“아앗, 거기 너어어어어!”

째지는 듯 목소리가 높았다. 좆됐다.

“거기서! 거기 서라고! 도망가지 마, 야, 튀지 말라니까! 죄송합니다! 제발 부탁이니 거기 좀 서 주실래요?!”

그런 말 듣고 서는 놈 하나 없더라. 부축하고 있던 레오레를 안아들고 달리기 시작하려는데, 상상 이상으로 잽싸게, 찰거머리가 다리에 들러 붙어왔다.

“…주인님!”

…미치겠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울면서 달라붙는 녀석들이 많냐고!

겨우 뒤를 돌아보니 갑옷을 입은 병사 둘이서 손에 미늘창을 쥔 채로 날 수상하다는 듯이 보고 있다. …이 이상 이목을 끌어서는 아무리 막 나가는 나라도 조금 곤란하다.

갑옷을 입은 병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오우거 가면을 쓰고 있는 건 다행이다. 덧붙여서 그 눈에 띄는 흉검도 싹 뜯어고쳐서 망정이지. 놈들의 갑옷에는 보란 듯이 왕실 근위대 문양이 박혀 있었다. 왕족이 경매에 참여하기라도 한 건가?

“실례합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어이, 보여줘.”

내 품에서 초대장을 꺼낸 나르콜렙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내밀자 병사는 초대장을 펼쳐 보이고는 나와 나르콜렙시, 레오레, 스텔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깐, 혹시 레오레를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도 병사가 레오레의 정체에 대해 추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내 다리에 달라붙어있는 윈드엘프 꼬맹이를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보란 듯이. 너 이 새끼, 얼굴 봐뒀다. 곱게 죽진 못할 줄 알아.

“저 윈드엘프가 손님의 노예가 맞습니까?”

윈드엘프 꼬맹이가 격렬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운데, 한숨이 푹 나왔다.

오늘만 해도 도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쉬는 건지.

“……맞습니다.”

“다른 손님들께 폐가 되오니… 조금쯤은 노예 훈육에 정성을 기울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젠장할.

나중에 두고 보자. 이 병사 놈이건 윈드엘프 꼬맹이건 둘 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말씀하시죠.”

“경매는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요?”

그것도 모르냐, 같은 시선이 내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오우거 가면을 쓰고 있다고 날 오우거 정도의 지능으로 생각하는 게 뻔했다. 아니면 운좋게 초대장을 얻어낸 시골 귀족쯤으로 여겼거나. 짜증나는데, 영주 부탁이고 뭐고 그냥 그어버려?

“…연회장으로 가 보시지요. 여흥이 끝나면 장소를 이동한 뒤 경매가 시작할 거라고 하니까요.”

“고맙소.”

“별말씀을. 그럼.”

병사는 떠나갔고, 그제야 아직도 주저앉아 다리에 들러붙은 채인 꼬맹이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으갹!”

뻥 차버렸다. 데구르르, 녀석이 꼬리로 먼지 하나 없는 바닥을 쓸어내며 공처럼 잘 굴러가다가, 벽에 부딪혔다. 머리를 끙끙대는 걸 보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할 소리다, 이 거시기에 털도 안 났을 꼬맹이 새끼야!”

“으으, 폭풍사냥꾼 루드라 님께 맹세코….”

알아듣지 못할 엘프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녀석. 어차피 욕설일 게 뻔했다.

이런 녀석의 버릇을 들일 방법이라곤 난 하나밖에 알지 못하거든.

“으갸악!”

처량한 비명과 함께 한번 더,

녀석은 풍성한 꼬리로 먼지 하나 없는 바닥을 청소하며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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