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35화 (35/79)

〈 35화 〉 2 / 인면수심 (7)

* * *

(7)

수화(?化)한 윈드엘프의 북슬북슬한 꼬리는 빗자루로도 제법 쓸모가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 사실을 뒤로하고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복도를 벗어났다.

“그냥 놔두고 와도 괜찮을까?”

“알 게 뭐야. 저 털뭉치랑 엮이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인데.”

나르콜렙시가 뒤를 돌아보며 투명한 분홍색 눈을 깜빡였지만, 그냥 코웃음만 쳤다.

그녀는 조금 마음이 쓰인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다. 재잘대는 서큐버스와 축 늘어진 기사만으로도 짐짝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하다.

“나도 도매금으로 짐짝 취급?!”

나르콜렙시는 말 그대로 지금 짐짝으로 전락한 레오레와 자신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그야말로 알 바 아니지. 물론, 주변의 시선이 맨살을 아낌없이 드러낸 노예를 들고 뛰는 이쪽에 쏟아지는 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연회장으로 직행하려던 발걸음을 돌려 근처의 휴게실로 들어가서 한숨 돌리기로 했다. 사람이 없었던 것은 조금 다행스럽다.

끙끙거리는 레오레를 짚을 채운 침대에 어찌어찌 눕히고,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일종의 언데드인 상태에서도, 아직 땀이 난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해했다.

어디 땀뿐인가.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숨도 쉬어야 하고. 이쯤 되면 그냥 살아있는 인간이랑 다를 게 뭔지 모르겠다.

“아직 시간은 좀 있으니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가자고…. 너 뭐하냐?”

나르콜렙시는 벽에 귀를 바짝 붙이고 어째서인지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는 것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검성 군, 여기 벽이 되게 얇다? 다 들리는데 검성 군도 와서 들어봐. 꽤 하드하게 하고 있네.”

“…뭐래. 남 떡 치는 거 엿들어서 뭐하냐? 내가 너 같은 서큐버스… 아니, 인큐버스도 아니고. 그나저나 왜 이런 방이 몇 군데나 있나 했더니만.”

경매에서 다루는 상품이 그런 만큼 아무래도 낙찰받은 상품을 서둘러 사용해보고 싶은 손님들이 있겠지. 이 저택의 여기저기에 침대가 비치된 빈방은 아마 그런 용도로 쓰이는 방인 모양이다.

나르콜렙시는 볼을 발그레 붉힌 채 히죽거리면서 듣고 있다가, 이내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바뀌면서 벽에서 귀를 떼었다.

“저기, 하이엔.”

침대에 주저앉은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쪽을 은근슬쩍 바라보는 게… 몹시도 귀찮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녀석의 호칭에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궁금한 거 한 가지 물어봐도 돼?”

“허튼 거 물어보면 가만 안 둔다.”

어차피 묻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물어볼 녀석이기에 으름장을 놓고 고개를 대충 끄덕이자 나르콜렙시는 즐거운 듯이 키득이고는 고개를 돌려 내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거북스러운 기분이 들어 조금 거리를 벌릴까 했지만, 그럼 또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밖엔 되지 않겠지.

“왜 여기에 올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아는 하이엔은 노예들이 불쌍하다거나, 영주와 의리를 지킨다거나 하는 이유로 경매를 뒤엎으려 나서는 정의파는 아닌데 말야.”

“뭐? 야, 네가 내 뭘 안다고.”

뜨악한 눈이 되어 얼굴을 돌리고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얼굴로 내 눈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요염하게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전투를 앞두고 흥분한 것도 아니다.

싸움과 피 기쁨에 취해 간드러지게 웃는 것도 아니다.

나르콜렙시와는 분명 아직도 적이고, 지금은 그저 어쩌다 보니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나… 자신이 아는 한 지금 녀석이 짓고 있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은 그녀답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안 들어서. 난 원래 노예부터가 검투사 출신이라고. 낮에는 막연히 죽기 싫으니까 서로를 죽이고, 밤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부인들의 하룻밤 상대로 어딘지도 모를 침대에 불려가는 그런 노예.”

그 녀석을 만나기 전의 과거라면 이젠 지옥이었다는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죽음과 쾌락, 피가 한 줌 은화보다 값싼 시간이었지.

“그러니까 이런 데는 마음에 안 든다고. 그래서 한 방 먹여줄 수 있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야.”

물론 이 사건에 엮인 그 교회의 성기사 놈과 못다 한 대결을 벌이기 위해선 일단 이 경매 건을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이유도 있다.

예전에 잠시 신세를 진 윈돌의 영주에게 부탁받은 것도 있지. 수고비까지 미리 당겨 받으면서까지.

요컨대 이유는 여럿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구태여 나르콜렙시에게 그런 말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지만.

나르콜렙시도 구태여 더 묻는 일 없이 그저 흐응, 하고 의미모를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나 말이야.”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얹은 나르콜렙시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낮게 가라앉았다.

“사실 하이엔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물론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말이야.”

“뭔데. 분명 시답잖은 얘기겠지.”

“그럴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그럴 거야.”

슬그머니 마른 웃음을 짓는 그 옆얼굴이 낯설었다.

보고 있자니 짜증이 오래 묵은 흉터에서 고름이 새듯 짓물러 나왔다.

“너답잖게 왜 그러냐? 설마 윌리엄 녀석 때문에?”

“아, 현자 군? 뭐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긴 하지만.”

나르콜렙시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배교자 신세라곤 해도 윌리엄은 여전히 여신을 독실하게 믿는 신도이다. 서큐버스가 여신을 믿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윌리엄에 대한 나르콜렙시의 불신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뿌리가 굵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어차피 둘 사이의 일. 서로를 여전히 적이라고 여긴다면, 내가 나설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 나르콜렙시와 함께 다니고 있는 자신 쪽이 더 이상한 거지. 내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 녀석 쪽은 그보다도 더 이상한 것이고. 사사건건 나르콜렙시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레오레 쪽이 더 정상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유스티카 녀석은 좀 어떠냐?”

“조용해졌어. 잠들었나 봐.”

“…세상 속 편한 노예도 다 있구만.”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는 자기를 들고 뛰느라 언데드인데도 땀이 나는데 독주 한 병을 냅다 퍼마시고 끙끙거리다가 쳐 잔단 말이지. 그런 생각에 부아가 치미는 와중 나르콜렙시는 그게 또 재밌다고 킥킥거리는 게 더 열받게 했다.

“혹시 모르지, 인제 와서 일어나기가 영 뻘쭘해서 자는 척하고 있는 걸지도. 언제 일어나야 좋을지 각 보면서 말야.”

“헹, 그랬다간 머리에 자루만 씌운 다음 연회장에 던져버리겠어.”

설마 고명하신 무가의 영애가 그런 짓을 할 리도 없지만.

나르콜렙시는 입꼬리를 바르르 떨면서 나와 레오레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고.

젠장. 쓸데없는 말을 하니 오히려 기분만 잡쳤다.

계속 이 녀석들을 달고 다니면 될 일도 안 되겠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북북 긁고는, 몸을 일으켰다.

“됐다, 뒤숭숭한 얘기를 뒤적거리는 건 여기까지다. 일단 바깥 상황을 좀 보고 올 테니까 넌 유스티카나 보고 있어.”

“잘만 자고 있는데 뭘 보고 있으라는 거냐고.”

투덜거리는 나르콜렙시의 볼멘소리를 그냥 내버려 두고 객실을 나왔다.

방해되는 녀석들을 치우고 나니, 그제야 주변의 분위기가 오롯이 전해져왔다.

빌어먹을. 녀석이 쓸데없는 걸 물어보는 바람에 생각났다.

화려한 옷을 몸에 걸친 놈들과 최소한의 옷조차 거의 걸치지 못한 녀석들이 즐비한 곳.

바다 건너에서부터 들여온 귀중한 향수로 몸을 치장했지만, 그 몸에 걸친 옷 한 겹 아래에서는 분명 땀 냄새가 진동하고 있겠지. 복도를 서성이는 이들은 땀을 식혀야 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땀을 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제길….”

대체 윌리엄 그 자식은 이런 마굴에 뭘 하러 왔는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아마 여기 어딘가에는 그 성기사 놈도 와 있겠지. 등을 벽에 기댄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흉검의 무게를 새삼 의식했다.

이걸 휘둘러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이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겠지.

재차 뒤집어쓴 오우거 가면 아래에서는 아마 험악할 표정을 짓고 있겠지만 그걸 감출 필요가 없다는 것은 썩 괜찮은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어느 쪽이 되었든 이제 무엇인가가 일어날 시간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역시 조금쯤 더 둘러보는 편이…

“길을 비켜라!”

우렁차게 내지르는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이 경매에는 참여하는 이들은 노예를 제외하면 모두 이 윈돌… 아니, 이 나라 트란 드라쿨루에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를 가진 이들이다.

그런 귀빈들에게 당당하게 ‘길을 비켜라’라고 말할 수 있는 자라면 누가 있을지는 사실 뻔했다. 분명 왕가의 일원이겠지.

“정말로… 왕가가 관여되어 있었던 거냐고.”

으득, 이를 물면서 벽에 가까이 붙은 채 일단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부아는 치밀었지만, 지금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자신만이라면 상관없으나 자신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아직 갚을 빚이 남은 윈돌의 영주에게 추궁의 화살이 날아들겠지.

서로에게 원한을 주고받은 여왕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

오우거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각, 또각, 또각…

오만함이 배인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