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2 /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라 (1)
* * *
(1)
저 멀리 스파타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짐마차에서 내린 뒤 이틀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라크샤사는 의외로 얌전하게 굴어서, 처음에는 경계하던 나르콜렙시는 곧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다…
최악의 첫인상을 가졌던 레오레는 끝까지 경계를 풀질 못했지만.
“저기가 스파타스의… 그 유명한 ‘환희의 관문’이군요!”
“환희의 관문? 이름 한번 거창하네.”
라크샤사가 빨간 눈을 자못 생기롭게 빛내고 토끼 귀를 쫑긋 세우면서 반색했다.
나르콜렙시는 전혀 모르는 눈치로 눈을 깜빡였고, 그 옆에서 레오레가 어흠, 하고 헛기침을 내면서 설명해주었다.
“오래전 라스나(Rasna)인들이 북쪽에서부터 내려왔을 때, 건국왕 블라드무트 드라쿨레아께서 저 관문에서 그들을 맞아 싸우셨다고 합니다. 열흘에 걸친 공방전 끝에 라스나인들은 결국 패배해 물러났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후일 ‘환희의 관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더군요.”
라크샤사가 감탄했다.
“꽤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기사단은 트란 드라쿨루의 건국사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니까요.”
“박히다니, 꽤 야한 말도 쓸 줄 알고요.”
“죽으세요.”
눈을 돌리고 싶은 대화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긴다.
저 관문이 보이면 스파타스에 거의 도착한 것이나 매한가지.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관문을 향해 다가갈수록 점점 관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오늘 해 안으로 통과할 수 있으려나 싶다.
하지만 다른 영지의 관문과는 다른 점은, 관문을 통과하려는 이들이 하나같이 상인이나 여행자가 아니라… 싸움이 몸에 밴 이들뿐이었다는 점.
떠돌이 모험가, 검사, 기사, 용병…
들고 있는 무기는 붙어서 싸우는 근접 무기라는 공통점을 빼면 각양각색이다. 하나같이 제 실력에 대한 자신감, 혹은 긴장감을 얼굴에 띄운 이들뿐.
쿠오 글라디우스.
검투사의 도시라고 불리는 스파타스에서 매년 개최되는 이 검투대회에서 이름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넘치도록 있을 테니.
조금 때를 잘 맞출 수 있었으면 나도 예선에 참가했을 텐데.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뒤 길게 줄을 늘어선 행렬을 지나쳤다.
“저쪽으로 가야 하지 않아?”
나르콜렙시가 눈을 깜빡였다. 통과를 기다리느라 끝없이 이어진 줄의 끄트머리에 서는 건 끔찍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공무용 입구로 통과할 거라고. 우린 윈돌 영주에게서 받은 일이 있으니까 별일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너 혼자 줄을 서겠다면 난 굳이 말리지 않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행여라도 자기를 떼놓고 갈지 염려한 모양인지 나르콜렙시는 바짝 달라붙었다. 길게 늘어진 행렬에서부터 조금 떨어진 곳, 비교적 사람이 덜 몰린 공무용 입구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법 사람이 몰려있는 건 매한가지지만.
나르콜렙시는 질린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공무용은 사람이 좀 적다고 하지 않았어?”
“이 시기에는 이러는 게 일상이라고.”
‘공무용’이라고 해도 결국 쿠오 글라디우스라는 거대한 대회에 관련된 청탁이나 공작이 주를 이를 게 뻔하다. 뭐든 판이 커지면 그 판에서 움직이는 이권이나 돈도 커지는 게 당연할 테니까.
윈돌의 영주까지 그럴 것이라곤 생각하기 어렵긴 하지만. 사람 속이라는 게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줄의 끄트머리에서 윈돌의 영주가 전해달라고 부탁한 서신을 확인하고, 제 차례가 돌아오기까지는 대충 두어 시간이 흘렀다.
나르콜렙시와 스텔라는 줄곧 하품을 했고, 레오레는 긴장한 표정이고, 라크샤사는 몹시도… 불안하게,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데서 온 전령이슈?”
걸쭉한 스파타스 사투리에는 적당히 일에 닳은 나른함과 피로, 그리고 지루함이 적절하게 뒤섞여있었다. 윈돌의 영주에게서 받은 봉투를 내밀자 문지기는 대충 봉투의 밀봉을 살펴보았다. 아마 하루에 몇백 통의 밀봉을 일일이 확인해야 할 테니 못 해먹을 노릇이긴 하겠다.
“윈돌에서 오셨슈? 무슨 일로?”
“그렇수. 보다시피 영주님께 그 서찰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고 왔는데. 내용은 나도 모르고.”
서찰 내용을 아는 전령이 있겠냐마는. 전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봉투를 돌려주었다. 여유롭게 공무용 입구를 통과하고 나니, 관문 너머의 공기가 바깥쪽과는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이 안에 발을 들인 자는 모두 서로의 적이라고 말하는 듯한 기묘한 투쟁심과 고양감이 머릿속을 덥히는 듯한.
“…땅에 주문이 걸려 있어.”
이제까지 통 말을 하지 않고 있던 스텔라가 옆머리에 섞인 금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툭 중얼거렸다. 레오레도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었고 라크샤사는… 음, 알 것 같다.
“뭔가… 싸우라고 부추기는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쿠오 글라디우스는 원래 이랬던가요…?”
“…사실 나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
공교롭게도 스파타스는 고향이라고 해도 어릴 적의 기억은 희미하고, 이런 느낌을 받았던 기억은 더더욱 없다. 아니, 있었다손 쳐도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다.
쿠오 글라디우스는 내가 그 녀석의 파티에 가입해 떠난 뒤에 규모가 커진 모양이고.
설마 이것도 경기의 흥행을 위한 눈속임 비슷한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한가하게 관광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을지도 모르겠구만. 이래서야 언제 어디서 싸움판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고. 저렇게.”
한쪽 길가를 가리켰다.
귀족의 마차가 서로 길에서 부딪힌 모양인지 마부들이 필요 이상으로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었다.
한쪽 마차는 바퀴축이 부러져 완전히 주저앉은 게,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이 마차에 어떤 분이 타고 계신지 알기나 하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게야?”
“웃기고 있네, 우리 주인님이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 알면 네놈은 그 천한 주둥이를 땅에 박고 용서를 구걸할 게야! 창피당하기 전에 얼른 그 마차 빼지 못해?!”
무릇 흥정, 싸움, 불은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다고 했지.
내 일이 아니라는 전제 하라면.
“뭐가 어째? 이 오크가 먹다 뱉은 곰보빵같이 생긴 게?!”
“한판 해 보자 이거야?! 조상 중에 고블린이 섞인 것 같은 놈아!”
급기야 서로 멱살까지 잡고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다.
잘한다. 더 싸워라, 더.
“두 사람 다 그만두세요!”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으려는데 누구야.
바퀴축이 부러져 기울어진 마차에서 내린 소녀가 내지른 소리였다.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이고, 치마폭이 펑퍼짐하게 부풀어 오른 화려한 장밋빛 드레스. 아직 앳된 얼굴에서 갈색 눈동자는 신경질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릴리엣 아가씨! 아이고, 찬바람 쐬지 마시고 그냥 마차에 들어가 계십쇼, 쇤네가 얼른 정리하겠습니다요. 바퀴축도 얼른 장인을 불러서 수리할 테니….”
맞은편의 마차도 덜컥 열렸다.
단정한 푸른 예복을 입은 청금발을 지닌… 중성적인 미인의 턱이 갓 면도한 듯 파르스름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을 한 줄기로 모아 땋아서 등 뒤로 짧게 넘겼다.
침착해보이는 파란 눈동자로 세 사람을 둘러보고는 어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등을 돌리고 있던 마부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마시라고, 쇤네가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요, 당주님!”
릴리엣이라고 하는 철모를 나이의 아가씨 측의 마부가 초조함의 냄새를 맡았는지 어깨를 펴고 빳빳하게 굴었다. 당주라고 하는 걸 보면 꽤 지체 있는 가문의 젊은 주인인 모양인데, 그런 불경한 자세로도 괜찮을지 모르겠구만.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그렇게 말을 막 몰면 안 되지. 우리 말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슈? 바퀴 축까지 부러져서, 바쁜 아가씨께서 이런 길거리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고.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요?”
“그게 왜 우리 탓이란 말요? 마차가 달리라고 있는 길에서 말을 좀 달렸기로서니… 댁들 그거지? 우리 당주님이 얼마나 관대한 분인지 알고, 한밑천 뜯으려고 작당한 거지?!”
오, 사건이 점점 흥미롭게 되어간다.
칼이라도 빼들 듯 서로의 기세가 점점 흉흉해졌고, 나를 비롯한 내 일행, 그리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꽥꽥거리면서 싸우는 두 마부와 그들을 사이에 두고 곤혹스러운 기색인 두 사람을 바라보며 누가 이길지 내기까지 은근슬쩍 시작한 모양이다. 나도 낄까?
“난 이미 좀 걸었는데.”
한발 빠르게 나르콜렙시는 돈을 건 모양이다… 어디에 걸었는지는 차치하고, 돈이 있었나?
“그야 당연히 검성 군 돈이지.”
“…….”
실로 오랜만에 이마에 딱밤을 맞고 나니, 나르콜렙시가 볼을 부풀린 채로 툴툴거렸다.
“음… 두 사람 다 길거리 싸움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러네요~ 오히려 그래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요. 음, 음.”
라크샤사는 자못 느긋하게 양쪽의 전력차를 분석하면서 사태를 즐기는 듯한 태도를 견지했고. 오히려 레오레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이, 유스티카. 왜 그러냐?”
“…저 두 사람, 어쩐지 조금 낯이 익습니다만….”
레오레의 기억에 남아있을 법한 얼굴이라면 나름대로 지체 있는 귀족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그 정도의 높은 귀족 나으리라면, 이 사태에 어쩌다가 끼어들게 되기 전에 날쌔게 발을 뺄 필요는 있겠다.
“뭐, 이 정도만 해 두자고. 슬슬 숙소를 잡아야 해. 일단 숙소를 잡고 난 영주성에 다녀올 테니까 너희들은 적당히 시간이나 보내고 있어. 어이, 그쪽은 어떻게 할 셈이냐?”
라크샤사에게 턱짓하자, 아직도 일촉즉발의 싸움 직전의 상황에 눈을 주고 있던 라크샤사가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러시다면 저는 여기서 헤어져야 하겠네요. 고용주를 만나야 하거든요. 음, 뭐, 짧은 시간이었지만, 밤마다… 후우, 그렇게 격렬하게… 상대해 주셔서… 감사하겠습니다, 하이엔 씨!”
라크샤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버렸다. 자, 이제 그럼.
방금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조금 고민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