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74화 (74/79)

〈 74화 〉 3 / 개의 인사는 싸움이다 (6)

* * *

(6)

만티코어의 숨통을 끊고 나자 한쪽 구석의 유난히 커다란 문이 열렸다.

예선 통과, 뭐 그런 셈이려나.

“돈 많은 도련님들의 취미쯤 되는 것치곤, 제법 제대로 갖춰놨네.”

만티코어의 피에는 맹독이 섞여 있어서 가능하면 피를 깨끗하게 닦아놓고 싶은데… 뭐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어 보인다.

별수 없이, 가진 천으로 칼날에 묻은 피만 적당히 닦아놓고는 문이 열린 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 문이 다른 장소로 통하는 곳일지, 아니면… 다음 상대가 나오는 곳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까.

그때, 문 너머에서 저벅저벅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게 경쾌하다못해 무척이나 방정맞고 촐싹대는 듯한 발소리는… 어째 좀 익숙한데.

“이쪽으로 통하는 건가요~? 차암, 제대로 된 상대를 좀 마련해 주시라구요. 몇 번 찌르니까 죽어버리는 키메라는 재미가 없다구요 재미가. 호오, 이 피냄새는 만티코어네요… 적어도 만티코어보단 강한 상대가 있는 거겠죠? 누굴까, 누굴까.”

…촐싹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종알종알 수다스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통로를 통해 울려서 들려왔다. 그리고 어쩐지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 위로 삐죽하게 솟아난 토끼의 귀.

가볍고 촐싹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하게 단련되어 쓸데없는 움직임이 전혀 없는 걸음걸이. 등에 메고 있는 장도 한 자루.

“…라크샤사냐?”

“어라? 하이엔 씨잖아요? 여기엔 어쩐 일로?”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라크샤사가 빠져나오자마자,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그녀가 들어온 통로가 다시 닫혔다. 이 분위기대로라면, 내 다음 상대는 저 싸움광 토끼라는 게 되는데.

물론 저 싸움광 토끼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빨간 눈동자를 도로록 굴려서 바닥에 널부러진 만티코어를 보곤, 그 빨간 눈을 신난다는 듯이 빛냈다.

“오호, 오호… 하이엔 씨도 몸풀기만 좀 하셨나보네요. 제 쪽은 참 비실비실한 키메라였는데 하이엔 씨도 뭐 딱히 재미를 보진 못하셨겠네요?”

“그런 셈이지. 긴 말 해서 뭐해? 너랑 한판 붙어보고 싶었다. 덤벼.”

“제가 할 말입니다. 서로 죽일 각오로 하는 거죠? 죽어도 서로 원망하기 없깁니다?”

스르르릉.

등에 멘 장도를 뽑아서, 얼굴 바로 옆에서 눕혀 겨누는 특유의 자세.

대련 때에도 보았지만, 늑대원숭이도 저런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풍월운룡류(風月雲??)’라던가 하는, 그런 검술을 사용하는 검사들의 기본 자세인 모양이다.

‘젠장, 또 오지선다 걸어오네.’

저 유파 검사들의 무서운 점은, 도대체 어떻게 검이 들어올지를 가늠하기가 까다롭다는 점이다. 검을 얼굴 근처에 바짝 붙여놓고, 지멋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받아내는 건 순전히 본능에 의존해야 했다.

저 자세에서 칼이 휘둘러지는 경우의 수는 내가 눈으로 본 것만 다섯 개.

바로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하단 베기.

목을 노려 그어오는 횡베기.

그대로 미간을 노려 뻗쳐오는 찌르기.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하게 솟구치는 올려베기.

아니면, 상대의 공격을 유도한 뒤 빈틈을 노리기.

뱀처럼 날렵한 움직임이 얇고 가벼운 칼날과 어우러지면, 제법 까다로운 조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크샤사는 바로 들어오지 않고, 눈을 깜빡였다.

“하이엔 씨, 그런데 검은 어쩌셨어요?”

“어쩌긴 뭘 어째. 너도 봤을 것 아냐? 상태가 그 모양이라서, 수리 맡기고 임시로 쓸 칼 받아왔지.”

“에헤이. 그거 아쉽네요. 최고의 상태의 하이엔 씨와 맞붙어보고 싶었는데.”

빈말로는 보이지 않는다.

저 싸움광 토끼는 진심으로, 최고의 상태인 나와 서로 죽고 죽이는 사투를 웃으면서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순전히 목숨과 목숨을 겨뤄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미친놈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자부한다. 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중하지, 제 성미에 맞는 싸움을 했다가 웃으면서 죽을 생각은 없단 말이다.

“뭐, 모든 게 완벽할 순 없죠… 들어갑니다?”

“들어와.”

라크샤사의 발이 날렵하게 모래바닥을 박찼다. 토끼 귀가 뒤로 확 누워서는 그대로 모래폭풍처럼, 칼날이 미끄러지듯 날아들었다.

발놀림. 칼끝의 위치. 칼자루를 쥔 손. 손목. 팔 근육의 움직임.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고, 모래바닥을 강하게 딛었다. 바깥으로 최대한 당긴 검을 휘둘러서, 맞받아친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라크샤사의 칼끝이 호를 그렸다.

“2형… 치(?) 돌풍!”

빠르게 거리를 좁힌 뒤, 섬광 같은 찌르기가 쏘아져왔다.

숨을 삼키고, 칼날을 맞대어 얽었다. 불꽃이 튀고, 쇳소리가 삐걱거렸다.

“…지난번에 보여준 기술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쓰냐?”

“에이, 그야 인사 차원이죠! 반갑다고!”

첫 수가 시원하게 막혔음에도 라크샤사는 오히려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빨간 눈동자에 광기에 가까운 즐거움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면, 이 녀석은 정말 골수부터 미쳐돌아간 전투광이 틀림없다.

캉!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칼날이 서로를 밀어내며 떨어졌다.

손으로 잡고 구부려도 휠 것 같은 얇고 매끈한 칼날이, 용케 드워프가 벼려낸 칼과 부딪히고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제 어쩐다.’

저 녀석과는 싸우는 방식이 정반대다.

라크샤사… 그리고 저 토끼가 속한 유파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맞는 검식을 골라 대응한다. 어지간해서는 절대 당황하는 일이 없고, 어떤 불리한 싸움에서든 제 길을 잃지 않는다.

나는 말이 좋아 검성이라고 불렸지, 그냥 싸움꾼에 불과하다. 위기가 닥치면 일단 본능에 맡겨 검을 냅다 휘두르는 편이다 보니, 검을 어떻게 휘두를지에 관한 생각은 일절 하질 않는다.

젠장,

말려들면 안 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눈을 부릅떴다.

한번 당해줬으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들어가야지!

“오시죠!”

라크샤사가 희희낙락하며 외친다.

이를 악문 그대로, 모래를 깊게 차내면서 앞으로 뛰쳐나갔다. 등에 매고 있던 칼집을 허리춤으로 돌리고, 라크샤사는 칼집에 집어넣은 칼자루에 손끝만을 대고 있었다.

미친 짓이다.

칼을 칼집에 꽂아놓고 적의 공세를 맞이하는 것은,

칼을 쥐고 있는 것에 비해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라크샤사는 칼자루에 손가락 끄트머리만을 대고 있는 자신의 선택에 조금도 망설임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다. 내 공격을 받아낼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얕보기라도 한 거냐고…!’

그렇다면 정면에서 깨부순다.

그게 내 싸움 방식이다.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에 강하게 제동이 걸렸다.

내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마성’이라고 불릴 것 같은 육감이 발을 잡아당겼다.

‘…!’

단순한 이치다.

검을 집어넣는 것은 우책도, 실수도 아니고…

단순히, 그런 기술이 있는 것이다. 라크샤사의 한쪽 손은 굳게 칼집을 움켜쥐어 고정했고, 다른 손이 칼날을 뽑아냈다. ‘발도술’, 그렇게 말하는 기술이 실존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빨라!’

눈앞에 번개가 들이쳤다.

칼집 사이에서 뽑혀나와, 목을 노리고 호를 그리는, 푸르스름한 번개가.

맑디맑은 천둥은 그 뒤를 따랐다.

“앗차아….”

아슬아슬하게, 반 보 차이.

라크샤사는 내 목을 취했음을 직감하고, 칼을 뽑았을 것이다.

타이밍, 속도, 위력… 모든 것이 확실했다.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달려나가던 그 기세 그대로 몸을 내밀었더라면 분명, 내 목은 잘려나가 저 모랫바닥 어딘가를 뒹굴고 있겠지.

“저기, 저기요, 하이엔 씨.”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라크샤사는 그것이 궁금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분한 것이 아니라, 낙담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이 즐거워서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어떻게 피하셨던 거죠? 전 정말로 하이엔 씨 목을 베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짜, 열에 아홉도 아니고 열에 열, 이건 진짜로 하이엔 씨 멱을 땄다고 생각했는데요? 근데 어떻게 피하신 건지 말씀 좀.”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나라고 알려주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본능이었다. 어쩌면 내 것이 아닌 것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발을 멈추지 않으면 그대로 죽는다, 그렇게 본능이 강제로 몸을 멈추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목숨을 구했다. 아주 얇게, 목에 스친 칼바람에 옅은 쓰라림을 느꼈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러지 말고 말씀 좀 해 주세요! 이건 제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4형, 올빼미 효(?), 삭풍이었다고요. 제 기술을 눈에 보셨으면, 그 정도는 말씀해주실 수 있잖아요!”

“영문 모를 소리 그만 하라고. 뭐 확실히 재밌는 기술이었어.”

칼을 들고 있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칼집에서부터 영거리 베기를 행하는, ‘발도술’.

칼밥 먹는 처지에서 들어본 적은 있었어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역시 얕잡아볼 상대가 아니다, 이 토끼.

온몸에 땀이 깊게 배어나온다.

하지만, 입가는 바들거리며 들썩거렸다.

꽤 오랫동안, 이런 싸움의 희열을 잊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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