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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임수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약자였다.
그것도 보통 약자가 아니라 거의 노예 수준의, 그저 까라면 까야 하는, 을乙도 못되는 병丙 신세라 보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녀 손에 쥐어져 있는 계약서. 근데 계약서가 둘이다.
그럴 것이 임수지는 '막먹은 영자씨'의 대본 계약 말고, 또 하나 계약을 했다.
바로 JYB엔터 전속 작가 계약.
그러니까 임수지에게도 이제 든든한 소속사가 생긴 거다.
쉽게 말해서 임시직 직원이 졸지에 대기업 정직원이 된 거다.
그런 그녀에게 중견 기업 밖에 되지 않는 HQ엔터테인먼트에도, 벌벌 기어야 하는 외주제작사의 PD 따위가 감히 자신을 거지라고 해?
“내 이 새끼를....”
잔뜩 목에 힘이 들어간 임수지는, 카페 직원에게 콜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다.
오늘, 내일 중으로 차를 사러 갈 계획이지만, 지금은 뚜벅이 신세라 어쩔 수 없이 택시를 부른 것이다.
10분 쯤 뒤 카페 직원이 부른 콜택시가 오고, 그 사이 계산을 하려던 임수지는 백준열 대표가 벌써 계산을 하고, 그녀를 위해 100만원을 카페에 적립시켜 둔 것을 알고 제대로 감동 먹었다.
“그 남자분이 언제든 여기 와서 맛있는 커피 드시고, 좋을 글 부탁한다는 말을 손님께 꼭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아아! 멋져!”
딱 봐도 카페 직원 역시 백준열 대표의 매력에 뻑 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 정도 외모면 연예인 뺨은 두 대는 쳐도 될 정도지.
그렇게 기분 좋게 카페를 나선 임수지는, 자신을 기다리느라 가게 앞에 정차 중인 콜택시에 탑승했다.
“서교동 대한빌딩으로 가주세요.”
자신의 통장에 2억이 있다는 그것 하나로, 임수지는 20대의 자신감을 거의 다 회복한 거 같았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녀가 하도 생글거리니 택시 기사분도 그게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네. 엄청 좋은 일이 있었죠.”
아마 그녀 인생에 있어서 오늘이 가장 행운이 깃든 날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좋았던 그녀의 기분은 그녀가 그제까지 몸담았고 아직도 그곳에 적을 두고 있는, 비록 임시직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직장 앞에서 기분이 급격이 나빠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에 택시 기사도 조심스럽게, 받은 택시비의 잔돈을 그녀에게 챙겨 주었다.
“수고하세요.”
“네. 좋은 하루 되세요.”
택시에서 내린 임수지는 당당하게 직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그녀를 찾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수지씨. 저번 리얼미터 생방송 속기록 아직 가지고 있지? 그거 3부씩 복사해서 회의실로 좀 가져다 줘.”
“수지야. 이번 주 주차증 왜 안 줘?”
“누나! 현장 2팀에서 스턴트맨들 출연료, 왜 아직 안주고 있는지 묻는데 어쩔까요?”
하지만 임수지는 그들의 말은 다 귓등으로 흘려듣고, 자신의 담당 PD이자 이 외주제작사 사장 사위인, 강PD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 * *
비록 외주제작사지만 주로 돈 되는 드라마나 예능프로를, 잘 물어오는 장인어른 덕분에 회사는 잘 돌아 가는 편이었다.
방송국에서 30년 근무한 장인의 노하우는, 여전히 방송 10년 차 강병기가 따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장 체질이라 사무실 보다는, 역시 밖이 좋은 강병기PD.
그는 MVC에서 PD생활을 잠깐 했었다.
그때 알게 된 장인어른의 꾐에 넘어가서 잘 다니던 지상파 방송국을 그만 둔 게, 지금에 와서도 두고두고 후회가 됐지만.
그래도 강병기는 자신의 아내를 많이 사랑하고, 자신을 꼭 빼닮은 두 아들들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들 때문에 오늘도 기운 내서, 새로 들어갈 드라마 좀 챙기려는 데 작가도 삐리하니 그렇고, 조연출은 너무 힘들다며 또 멋대로 그만둬버렸다.
하긴 누가 하겠나? 매일 밤새면서 최저임금 받으면 말이다.
그렇게 고생하고 버티면 PD가 될 수 있다고?
그 PD들 매일 밤새고 있는 거, 눈으로 보면서 하고 싶은 사람 얼마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일주일도 못 버티고 그만 둬 버리면, 자기가 뭐가 되냔 말이다.
그렇게 성질 나 죽겠는데, 마침 강병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삐리한 작가가 나타났다.
“야! 임수지. 너 이따위로 할 거면 작가 때려 쳐!”
버럭 소리 지르며 임수지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그때 그걸 핑계로 HQ엔터테인먼트와 대본료 책정할 때, 자기도 10%정도 커미션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강병기.
“네. 안 그래도 때려 치려고 왔어요.”
“뭐?”
이게 아닌데? 얘가 오늘 뭘 잘못 먹은 모양이다.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저번 달 작가료도 못 받았으니 더 일할 필요 없죠? 그럼 저 그만 두는 걸로 알고 갑니다.”
정말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임수지를 보고, 강병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득달같이 그녀에게로 달려가서는 그녀를 팔을 붙잡았다.
“왜 이래요?”
“야! 임수지. 너 미쳤어? 내가 누구야? 네 담당 PD, 강PD라고.”
“그게 뭐?”
“뭐?”
“내 담당 PD란 자가 만날 부려 먹기만 하고, 쥐꼬리만큼 나오는 작가료 삥땅이나 치면서 뭐? 왜? 이번 HQ엔터테인먼트 대본료 나오면 커미션 챙기게?”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임수지 때문에, 강병기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방송 판에서 10년 헛산 거지.
“너 여기서 나가면 끝이야. 누가 너 같은 삼류 작가를 받아 주겠어? 나나 되니까 받아주지.”
“받아주던데?”
“뭐?”
“여기 봐.”
임수지는 강병기 보란 듯 오늘 JYB엔터와 계약한 계약서를 펼쳐 보였다.
“너, 너....'막먹은 영자씨' 대본을 JYB엔터에 팔았구나?”
강병기의 두 눈이 갑자기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와 3년째 같이 작업 중인 임수지는, 그게 강병기가 탐욕을 부릴 때 지어 보이는 눈빛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실력은 별로 인 게 욕심만 많아서는....’
“그, 그래서 JYB엔터에서 얼마나 투자하겠다고 하던?”
“그게 왜 강PD님이 궁금하실까요?”
“그야 당연히 네 '막먹은 영자씨'는 내가, 우리 회사가 찍어야지.”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강PD는 그게 당연한 일인 거처럼 임수지에게 말하고 있었다.
임수지의 대본이니 자신이 찍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임수지에게는 연출이 누구든, 외주제작사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하아....”
임수지는 길게 한숨을 내 쉬고는, 다른 계약서를 강PD 앞에 펼쳐 보였다.
“이건 또 뭔데?”
강PD는 임수지가 또 무슨 돈 되는 걸 물어 왔는지, 잔뜩 기대어린 눈으로 그녀가 내 보이는 계약서를 살폈다.
“작가 전속 계약서!”
그게 뭔지 알게 된 순간 강PD가 벌레 씹은 얼굴로 변해서는, 임수지를 향해 표독스럽게 외쳤다.
“야! 임수지. 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네가 감히 우리를 배신 해?”
강PD의 그 말에 임수지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배은망덕? 적반하장이다. 내가 여기 임시직으로 글 쓰는 거 말고 몇 개 일을 더 했는지 알아? 알바비로 따져도 한 달에 2백은 받아야 해. 거기다 작가료는 퐁당퐁당 주고. 그래 놓고 뭐? 배신? HQ엔터테인먼트에서 내 대본료 후려칠 때, 옆에서 그러라고 은근 압박이나 하는 주제에. 챙겨 주는 건 개뿔도 없으면서 배신 운운하는 거 너무 염치없는 거 아냐?”
“뭐? 염치? 이 미친년이.....”
화가 제대로 난 강PD. 그가 임수지를 치려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을 때였다.
임수지가 그걸 보고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과연 니가 날 칠 수 있을까? 나 JYB엔터 전속 작간데?”
임수지의 전속 작가란 말에, 그녀의 뺨을 당장이라도 후려 칠 거 같았던 강PD의 팔이 움찔했다. 그런 그를 보고 임수지가 피식 거리며 말했다.
“쫄긴. HQ엔터테인먼트 전속 작가에게 파리처럼 열심히 손부비고 아부하기 바쁜 네가 JYB엔터 전속 작가 앞에서 과연 어떻게 굴까 궁금하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작가의 파워는 상상 그 이상이다.
특히 대형 기획사에 소속 된 작가의 경우, 그 영향력은 연출 보다 높을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작가가 배우들까지 다 장악하고 있을 공산이 컸으니까.
여기서 연출은 자상파가 됐던 공중파가 됐던 방송사의 PD를 말했다.
한낱 외주제작사 PD는 작가 앞에 명함 내밀 위치도 못됐다.
그게 현 방송계에서 외주제작사가 차지하고 있는 초라한 위상이었다.
“임수지, 아니 임 작가. 왜 이래?”
어느 새 들었던 팔을 내린 강PD가 임수지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 주제 파악이 바로 된 거다.
그런 그에게 임수지가 싸늘하게 말했다.
“앞으로 여기 직원들. 현장에서 내 눈에 띠면 고달플 거야. 날 호구로만 봤겠지. 이제 당신들이 내 호구가 돼야 할 거야. 특히 강PD 당신. 나 안 만나게 해 달라고 고사라도 지내야 할 거야.”
그 말을 한 후 임수지는 애증이 교차하는 이곳 외주 제작사 안을, 한 번 빙 둘러 훑어 본 뒤 곧장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외주 제작사 직원들의 눈길이 집중 되었지만, 그녀는 문을 나갈 때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 * *
'막먹은 영자씨'의 임수지 작가와 대본 계약을 마친 뒤, 나는 한 가지 계약을 더 했다.
이건 내가 임 작가를 직접 만나보고 결정하려 했는데,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냄새는 상당히 좋았다.
‘진한 커피 향과 살짝 고소한 냄새라....’
개 특성의 후각능력에 따르면, 그 냄새들은 의리와 돈 냄새였다.
임 작가는 여자로서 여느 남자 못지않은 의리파였고, 돈이 되는 작가였다.
‘이런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는 건 당연한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계약서 하나를 더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걸 본 임수지 작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녀에게 살짝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우리 관계를 ‘쭈욱’ 더 이어 나갔으면 해서요.”
“정, 정말 저와 전속 계약을 해 주시겠다고요?”
“네. 최고 작가 대우는 아직 어렵습니다. 아시겠지만 작가님이 보여 주신 게 없어서요. 하지만 내년에는 달라 질 거라 봅니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이미 그녀와 계약한 '막먹은 영자씨'의 대본 계약서를 손에 들어 보였다.
즉 '막먹은 영자씨'가 대박을 칠 것이고 그 덕에 내년, 작가로서 그녀 위상 또한 달라질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고, 고마워요. 절 그렇게 믿어 주시다니.”
그 말을 하는 임수지 작가의 얼굴이 많이 상기 됐다.
감격해 하는 그녀를 보며, 선비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생각났다. 역시 임 작가는 의리녀였다.
해서 임 작가와 작가 전속 계약도 순탄하게 끝마쳤다.
임 작가가 계약서에 시원스럽게 사인을 한 것.
그렇게 내 볼 일은 모두 끝이 났다. 임 작가와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오늘 나는 엄청 바쁘다.
그렇게 바쁜 데 날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야 할, 수행비서 놈은 문제가 좀 많아 보인다.
카페 문을 열고 등장했을 때부터, 녀석에게서 지독한 정수리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개 특성이 업그레이드하기 전에는 나지 않았던 냄새였는데, 지금은 그 냄새가 확실하게 맡아졌다.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하려면 「개코」아이템을 써 볼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니고.
임수지 작가와 볼일은 다 봤다.
딱히 더 할 말이 없는 관계로 나는 그녀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행비서랍시고 등장하자마자, 내 서류가방과 계약서를 챙긴 황치국.
‘우씨. 냄새. 대체 이게 다 무슨 냄새들이야?’
녀석이 접근해 있자 놈에게서 정수리 냄새 말고, 다른 냄새들도 복합적으로 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보다 일부러 앞서 걸으며 카페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면서 임수지 작가가 여기 단골임을 떠올리고, 그녀가 언제든 여기 와서 부담 없이 커피를 즐길 수 있게 100만원을 먼저 선 결제 해 뒀다.
‘원래 사람은 이런 작은 거에 감동하는 법이거든.’
임 작가에게 전할 멋진 말도 카페 직원에게 남기고, 카페를 나서자 정차 시켜 둔 내 차가 내 앞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운전석에 어느 새 내 운전기사 양태석이 타고 있었다.
“타시죠.”
황치국이 잽싸게 차 뒷문을 열었다.
나는 차에 타자마자 차 안에 구비 되어 있던 마스크부터 썼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황치국이 풍기는 고약한 악취를 이동 중 차 안에서 계속 마셔야 한다니 여간 고욕이 아닐 것이다.
수행비서인 황치국이 조수석에 타고 이내 차가 출발했다.
그때 황치국이 안전벨트를 매며 내게 물었다.
“회사로 가실 거죠?”
“아니.”
시간이 몇 신데. 어째 수행 비서란 녀석이 이렇게 시간 개념이 없어서야.
황치국의 애비인 황충식이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다는 게, 왜 이렇게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한 달 가까이 이딴 녀석을 매일 봐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럼 어디로....”
녀석이 백미러를 통해 내 눈치를 본다.
그때 간밤에 포스쉐를 몰고 내 옆을 지나쳐 갈 때, 내게 보여 줬었던 그 광기어린 웃음 띤 녀석의 얼굴이, 지금 녀석의 얼굴에 오버랩 됐다.
‘이거 느낌이 쎄한데....’
불길한 느낌에 등골이 싸해진다.
그렇지만 또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는 나. 이럴 때 보면 백준열이도 참 대단하다.
“밥 먹어야지. 밥.”
회사가 밥 먹여 주진 않는다. 벌써 시간이 12시가 다 되어 갔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일해야 지. 안 그래?
“그, 그렇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하하하하.”
금방 내 말에 수긍해서 헤헤 거리는 녀석.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거 같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