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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서지현은 오늘 평창동을 찾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친인 서재국 전 대통령에게 슬쩍 얘기 좀 나누자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다 아는, 노회한 정치인 서재국. 그가 웃으며 자신의 딸에게 말했다.
“그래. 이것만 마저 먹고 내 서재로 가자구나.”
서재국은 천천히 애플망고를 입 안에 조금씩 넣고, 오물거리다가 그 옆에 우유를 마셨다.
이렇게 망고와 우유를 함께 섭취하면, 망고의 베타카로틴과 우유의 단백질, 지방을 동시에 섭취하게 되어 궁합이 잘 맞았다.
애플 망고는 비타민A, C, 엽산이 풍부한데, 노란색의 과육은 베타카로틴을 함유하고 있어, 체내에서 비타민A로 전환되면서 피부 노화를 방지하고, 시력보호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망기페린(mangiferin)이라는 성분은 비만을 줄이고, 혈액 내의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며 뇌의 신경세포를 보호해 준다고 한다.
애플망고는 여러모로 나이 많은 서재국의 건강에 유익한 과일 중 하나로, 서재국은 하루에 한 번은 이렇게 과육 자체로 먹었다.
애플망고는 열대,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열매로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하기에 서재국의 손자손녀들도 다들 잘 먹어, 가족끼리 식사 후에 이렇게 후식으로 즐기기 딱 좋았다.
오늘 저녁은 8시가 좀 넘어 먹었으니, 많이 늦은 편이었다.
이게 다 백지연이 바쁘다 보니, 식사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두고 다른 손자손녀들은 불만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서재국은 그런 손자손녀들을 불만은 그냥 모른 척했다.
서재국이 정치판에 뛰어든 지도 어언 60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 동안 정치를 하면서 별의별 꼴을 다 봐 온 그에게, 고작 30살도 넘기지 못한 손자손녀들의 불만은, 치기어린 애교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기 딸은 달랐다. 낼모레면 환갑인 서지현은 아직도 철이 없었다.
거기다 욕심은 또 어찌나 많은지, 마치 젊은 시절 그를 보는 것 같았다.
젊어서는 남자 문제로 서재국을 골치 아프게 만들더니, 이제 늙어서는 자기 딸내미를 삼명그룹 회장 자리에 못 앉혀서 생난리다.
물론 서재국도 자신의 피가 섞인 외손녀가 삼명그룹 회장이 되면 야 좋겠지.
하지만 정치판만큼이나 녹록찮을 게, 재벌가의 후계 싸움이다.
그 싸움에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한방에 훅 갈 수 있었다.
설혹 그게 전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실제 서재국은 사위인 백승렬 회장 때문에, 이 나이 먹고 감방에 들어 갈 뻔했다.
그래서 요즘은 더더욱 사위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 서재국.
그런데 그의 철없는 딸은, 보아하니 또 사위와 대척점에 서는 짓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누누이 얘기해도 서지현은 어찌 된 게, 그의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았다.
그래서 좀 있다 서재에 들어가면, 그녀가 또 무슨 말을 할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는 서재국이었다.
서재국은 최대한 느긋하니 후식을 즐겼다.
반면 서지현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는 데, 그녀의 부친은 저리 태평하게 망고나 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온 가족이 다 둘러 앉아 있는 어ㅣ 자리에서, 늙은 부친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참아내던 서지현.
“가자!”
서재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후다닥 따라 일어난 그녀는 서재국에게 다가가, 그의 팔짱을 꼈다.
“아빵. 내가 부축해 줄게.”
낼 모레 환갑인 그녀가 그 나이 먹고서도 애교를 부리자, 정작 그걸 바라보는 서재국의 일가족들은 다들 표정들이 좋지가 않았다.
특히 서재국의 아들이자, 서지현의 오빠인 서병현은 아주 노골적으로 질색팔색했다.
“어휴우....”
하지만 서지현의 딸인 백지연이, 빤히 눈앞에 있는 마당에 뭐라고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서지현은 서재국을 부축해 준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매달려 가는 모양새라, 서재국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근데 당사자인 서재국이 좋다며 웃으며, 가고 있으니 누구도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됐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재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서재국의 일족들이 자기 집에서 활기를 치기 시작했다.
서병현과 그 부인은 자기 자식들이나 다른 가족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그때부터 방조모드로 돌변했는데, 역시나 가장 시달리는 건 백지연이었다.
서지현이 없으면 백지연 또래나 그 위 외사촌들은, 백지연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시기, 질투는 기본이고, 특히 외모로 백지연을 많이 놀렸다.
그러던 말든 평소에는, 외사촌들의 말을 생 까기 일쑤였던 백지연.
그런 그녀가 서재국의 비서실장 격인 하동훈 부장과, 자신이 닮았다는 말에는 어째 인상이 좋지 못했다.
하긴 저 소리를 몇 년째 계속 듣고 있으니, 백지연도 이제 짜증이 날만했다.
서병현은 그런 백지연의 썩 좋지 않은 표정 변화에, 이제 아이들을 좀 말려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서지현이 서재에서 나왔다.
평소 서재에 들어가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얘기를 나누는 부녀 지간이었다.
한데 오늘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나왔다.
이건 둘 사이에 뭔가 트러블이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서지현 뒤를, 바로 서재국이 뒤따라 나왔는데, 둘의 표정이 역시나 심상치가 않았다.
서병현의 예상대로 서지현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딸인 백지연을 데리고 곧장 평창동 집을 나갔고, 서재국도 평소와 달리 그 모녀가 나가도 잘 가란 말도, 현관까지 배웅도 하지 않았다.
* * *
서재국이 서재 자기 책상 의자에 앉기 무섭게, 그 맞은편은 앉은 서지현이 조잘대기 시작했다.
서재국은 그래도 집중해서 딸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그녀가, 사위인 백승렬 회장과 대척점에 서는 짓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 막내가 문제란 거로구나?”
“그래요. 아빠. 그 새끼 어째야 할까요?”
“하아. 어쩌긴. 그 막내를 백 회장이 가장 총애하고 있다는 건 명확한 사실인데. 지금 그 아이를 건드리겠다는 건 미친 짓이다.”
“네? 미친 짓이요? 그러니까 아빠는 내가 지금 미쳤다는 거예요?”
서지현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빽’하고 소리까지 쳤다.
그 만큼 그녀가 지금 이성을 잃고 화가 많이 나 있다는 소리.
“지현아.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니? 백 회장과 대척점에 서지 말라고 말이다. 소나기가 온다면 그 소나기를 피해가야지.”
서재국은 최대한 차분하게, 서지현이 이성을 되찾을 수 있게끔 좋게 좋게 얘기를 해나가려 했다.
하지만 한 번 삐뚤어진 딸은, 그런 그의 심정도 몰라보고 날 선 말을 대 놓고 해댔다.
“그러니까 아빠는 저보고 백 서방 눈치나 보고, 그가 주는 돈이나 받아쓰고 얌전히 살라는 거네요?”
서재국은 아까부터 사위인 백승렬 회장을, 백 회장이라 칭하고 있는 반면 서지현은 백승렬 회장을, 백 서방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서재국도 현직 대통령 시절에는, 백승렬 회장을 백 서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에게 호되게 당한 후부터, 더 이상 그를 백 서방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됐다.
“하아. 지현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투자자라면 돈의 흐름을 보고 움직여야지, 정해놓고 움직이면 안 된다는....”
“됐어요. 아빠라면 무슨 수가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역시 이 일은 오빠랑 상의해서 처리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오빠? 너 아직도 하동훈이 만나는 거냐?”
“뭐 어때요? 그 인간은 요즘도 새파랗게 어린년들과 즐기고 사는데.”
“어허. 어떻게 백 회장과 네가 같아?”
“하아! 아빠도 그 인간이랑 똑같아. 그놈에 지긋지긋한 남아선호사상. 그래. 나 아들 못 나았다. 하지만 내 딸이 삼명家의 주인이 되게 꼭 만들고 말 거야.”
“....”
집착과 광기어린 딸의 모습에 서재국은 한 동안 할 말을 잊었다.
그런 서재국의 반응이 오히려, 화난 딸의 화기를 가라앉히게 한 모양이었다.
한 동안 서재국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던 서지현이 서서히 진정 되기 시작했다.
“지현이 호텔에서 세탁 된 돈이, 계속 아빠 비밀 계좌로 흘러들어 갈 거예요.”
“그, 그래 고맙구나.”
“고마우면 이번에 반드시 승리하세요. 이빨 빠진 호랑이 소리, 이제 지겹지도 않아요?”
서지현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재국이 이끄는 보수파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서재국은,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정계에 진출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자신의 외손녀, 그러니까 백지연을 삼명그룹 회장 자리에 올리는 데, 큰 보탬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아빠는....이 일, 그냥 모른 척 하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말 후 자리에서 일어나서 휑하니 서재를 나가버리는 서지현.
“하아....”
그런 그녀를 보고 한숨을 내 쉬던 서재국도 따라 일어나서 서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서지현과 백지연은 평창동 집을 떠났고, 서재국은 그녀들을 배웅하지도 않고 도로 자기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생각 할 게 있으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란 뜻이었다.
* * *
자신의 서재에서 평소 건강 때문에 입에 대지도 않았던 파이프 담배를 꺼내 문 서재국.
그의 입에서 사람 이름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동훈!”
분명 서지현과 만나지 말라고 했었다.
근데 아직도 몰래, 그 아이를 만나고 있었다니.
하동훈과 서지현은 정말 질긴 인연이었다.
녀석을 보좌관으로 처음 평창동 집에 데려 왔을 때, 하필 서지현이 실의에 빠져 친정을 찾았다.
내리 딸만 둘을 낳은 서지현은, 이때 어쩔 수 없이 사위가 외도로 낳은 아들들을, 삼명가 본가 저택에서 키워야 했다.
그로 인해 서지현이 받게 된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그랬던 그 아이가, 어느 날 해맑던 결혼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서재국.
알아보니 서지현이 자신이 새로 뽑은 보좌관과, 눈이 맞은 것.
대 노한 서재국은 서지현을 혼내고, 하동훈은 보좌관에서 자르고 그를 매장 시켜 버리려 했다.
그때 서지현이 서재국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그녀가 하동훈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
서재국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 이때 서재국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뽑혔고, 삼명그룹의 도움이 없이는 대통령이 될 수가 없었다.
해서 쉬쉬하며 선거에 승리, 대통령이 된 서재국.
그도 서지현이 낳은 자식이 아들이었다면, 그 아이를 자기 호적에 올리거나, 딴 곳으로 보내 몰래 키우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지현은 또 딸을 낳았다. 어릴 때 서지현과 꼭 빼닮은.
그래서 서재국은 당시 절대 권력자로서, 삼명家를 찍어 눌렀다.
백승렬 회장도 이때는 어쩔 수 없이, 서재국의 뜻에 따라 주었고.
그렇게 지켜 낸 것이, 지금은 그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소중한 외손녀 백지연이었다.
사실 그 이후로 서재국은, 서지현이 하동훈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모른 척 해 줬다.
왜냐하면 딸아이도 자기 숨 쉬고 살 구멍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사위는 매년 새로운,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과 주지육림 속에서 행복한데, 자기 딸은 달랑 남자 하나 있는 게 뭐가 문제냐 싶었다.
물론 서지현도 하동훈 말고, 다른 남자들과 간간히 만나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 곁에 끝까지 남는 남자는, 언제나 하동훈 뿐이었다.
“이 새끼를 어쩌나?”
서재국도 알고 있었다. 하동훈이 얼마나 야심만만한 놈인지 말이다.
그랬기에 청와대에서 나올 때, 하동훈이 모시겠다고 따라 나온 걸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었고.
문제는 하동훈을 진짜 키워 주느냐 였다.
“역시 키워 줘야겠지?”
금수도 제 새끼는 아낀다고, 하동훈도 권력을 쥐게 되면 자기 혈육인 백지연을 챙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고심 끝에 서재국은 결심을 했다. 하동훈에게 이번 국회의원 공천을 내 주기로 말이다.
그것도 보수층의 텃밭인 경북 쪽에다가 말이다.
결심이 서자 서재국은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저번에 말한 경북 영천에 공천 후보에 하동훈이 좀 넣어. 어. 뭐 지금부터라도 키워 볼까 해서. 자네도 많이 도와 줘. 그래. 늦은 시간에 전화해 미안하네. 허허허. 그래. 언제든 찾아오게. 자네 줄, 차와 술은 언제든지 있으니까.”
현 야당의 중진 의원 중, 그래도 서재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 의원이, 늦은 시간 서재국이 건, 전화에도 불평 하나 없이 응대하며, 그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하자, 서재국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통화를 끝낸 뒤, 서재국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딸아. 이게 아마도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선물이 될 거 같구나.”
그의 목소리는 처연하지만 그래도 강단이 느껴졌다.
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만큼은 확실하게 챙겨 보겠다는 듯 말이다.
* * *
양태석은 검경이 태천파의 어딜 부터 치고 들어올지 예상이 됐다.
“문식이파가 잠실과 신천동 일대가 나와바리 였나?”
“네. 거기다가 삼성동 쪽으로도 일부 진출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최근 충식이파와 충돌도 있었고요.”
“그렇다면 검경이 삼성동부터 치겠네.”
“삼성동을요?”
삼성동을 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신천동을 칠 테니까, 삼성동이 제일 먼저 검경의 타깃이 될 것이 유력한 것이다.
“삼성동이 충식이 나와바리면....충식이 연락처가 어떻게 되지?”
“잠시 만요.”
정준호가 삼성동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조폭 조직의 두목 방충식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양태석에게 알려주었다.
양태석은 정준호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대로, 바로 핸드폰으로 방충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시오.
“충식이냐?”
=누군데 남의 이름을 요로코롬 함부로 불러 삿까?
“나다. 태석이.”
=이잉? 설마 양태석, 태석이 형님?
“그래. 오랜 만이지?”
=형님! 와 이자사 전화를 하요?
예상대로 방충식은 양태석의 연락을 반가워했다. 그리고 내일 보자는 양태석의 제안도 흔쾌히 수락했고.
방충식과 기분 좋게 통화를 끝낸 양태석.
그가 다시 손대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손대명이 전화를 받았고, 양태석은 그를 지금 그가 있는 에로스로 곧바로 불렀다.
방충식과 달리 손대명은 그가 2년 전 태천파에 있었을 때, 그의 왼팔 노릇을 했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방충식처럼 내일 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