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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백준경은 자신이 삼명家 장남이란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유교사상의 뿌리가 강하게 남아 있어선지, 장남에 대한 기대치가 컸고 그건 백준경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말은 안 해도 아버지 백승렬 회장도 은근 장남에 대한 기대가 높았고, 그래선지 차남인 백준호에 비해 더 많은 혜택이, 실제로 그에게 부여 되었다.
그래서 백준경은 자신이 후계자로, 백준호보다 적어도 몇 걸음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막내 녀석이, 급부상하면서 그의 신경을 긁더니 급기야 오늘은, 아침부터 그에게 빅엿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준열이 그 새끼한데, 삼명전자 주식을 10.5%나 증여 했단 거네?”
“그, 그렇습니다.”
“하아....안 그래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삼명 자동차는 기대에 차서 발족되었고, 그룹에서 전폭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치에 영 못 미치는 성과로 인해, 대표인 백준경은 최근 눈칫밥을 먹고 있었는데, 거기다 그제 아침에 본가에서 대형 악재와 직면했다.
바로 막내 녀석과 자기 와이프의 불륜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아닌 걸로 판명이 났다.
막내가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면서 말이다.
한데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까?
백준경은 그 즉시 자기 와이프의 사생활에 대해 조사를 시켰고, 그녀가 주위에 남자가 많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그렇게 많을 줄이야.
그도 자신의 와이프가 이렇게나 음란한 여자인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 이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탓하는 꼴이었다.
백준경 주위에 여자들이, 사실 그의 와이프 주위 남자들보다 몇 배는 더 많았으니까.
그래도 남자란 게 어디 그런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다보니, 자기는 괜찮아도 마누라가 바깥으로 나도는 건 도저히 못 봤다. 그건 백준경도 예외는 아니었고.
결국 어젯밤에 와이프인 은장미와 대판 싸웠다.
하지만 은장미도 만만찮았다. 그 동안 쌓아 온 불만을 토로해 대자, 백준경은 ‘아차’ 싶었다.
괜히 가만있는 고슴도치를 건드린 꼴이었다.
고슴도치가 열 받자 가시를 뻗치고 덤벼드는데, 그 기세가 장난 아니었다.
백준경은 ‘앗 따가워’ 하며 물러났지만, 제대로 열 받은 은장미는 아침에 짐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자식들이 징징거렸고, 처가에서 계속 전화가 와서 백준경을 괴롭혔다.
백준경의 처가는 식품 사업과 소재사업, 식자재 유통사업에서, 매출 2조를 달성한 대동그룹이었다.
조미료 사업에서 시작해서 식품 브랜드를 보유한 기업군으로, 현재는 정보 기술 업, 광고업, 건설업, 부동산임대업, 유통/판매업 부문에서 사업을, 점차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대동그룹의 문어발식 성장에는 사돈인 삼명그룹의 도움이 있었는데, 다 백준경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대동그룹에서 백준경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일까?
은장미가 짐 싸서 나타나자, 처가가 발칵 뒤집어 진 것이다.
“하아....”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도 이제 지친 백준경.
그는 그래도 막내에게 한 소리는 해야겠고, 억지로 비서를 통해 백준열에게 연락을 취하게 했다.
그런데 녀석이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고, 그럼 녀석보고 전화하란다고 메시지를 남겨 두라고 했다.
그래 놓으면 녀석이 전화하면 그가 받으면 되고, 계속 전화 하지 않으면 그걸 꼬투리 삼아서 내일 아침 본가에서, 녀석을 갈구면 될 일이었다.
그 뒤 두통약 두 알을 먹고 밀린 일처리에 몰두하고 있었던 백준경.
삐이이이익!
비서의 인터폰이 갑자기 울렸다.
“왜?”
=JYB엔터 백준열 대표께서 전화하셨습니다.
“바꿔!”
근데 막내가 눈치껏 알아 전화를 걸어왔다.
기다리던 전화라 백준경은 망설임 없이 그 전화를 받았다.
* * *
김 비서로부터 큰형이 전화하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는 바로 백준경에게 연락을 취했다.
내 예상대로 자기 와이프 문제로 골치가 아팠던 그는, 늘 그래왔듯이 자기 할 말만 빨리했고, 내가 뭐라 변명하기 전에 통화를 끝낼 기색이었다.
“....니까 삼명전자 주식 순순히 내게 넘기고....니 형수 문제는 어디서 입도 뻥긋하지 마라. 향후 다시 이런 소리가 나오면, 나도 참지만은 않을 거야. 그땐 아주 널 갈아 마셔 버릴 테니....”
하지만 평소와 달리, 나도 백준경에게 한 소리는 해 주고 싶었다.
이런 걸 오기라도 해야 하나? 트라우마 극복? 뭐 하여튼 백준경이 전화 끊기 전에, 기어코 한 소리를 내 뱉었다.
“큰형은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해?”
“....”
순간 백준경이 할 말이라도 잃은 걸까? 한 동안 말이 없다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행복? 그딴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네 형수 일을 소문내면 가만 안 둔다. 알았어?
괜히 할 말 없으니 버럭 화부터 내는 백준경.
“뭐 좋은 일이라고 그걸 소문까지 내냐? 하지만 준호 형은 또 모르지.”
=뭐?
이 판은 어찌됐던 큰형과 작은형이 싸우면 싸울수록, 그 만큼 내가 편해지는 건 사실이다.
해서 나는 큰형에게 둘째형에 대한, 제법 큰 불신의 씨앗을 심어주기로 했다.
마침 내게는 그 증거고 있었고.
“어제는 못 밝혔는데, 사실 형수 동영상에 나오는 남자 중에 둘째 형도 있었어.”
=....
말 안 해도 큰 형의 충격이 큰 듯 보였다.
상대가 백준열에서 백준호로 바뀌었다 뿐이지, 자기 와이프가 시동생과 놀아난 게, 사실로 밝혀졌으니 말이다.
“그 동영상 보내 줘?”
=보, 보내. 그리고 그 원본 싹 다 지워.
“싫은데. 내가 왜 그래야 돼?”
=뭐, 뭐?
“Give and Take! 몰라?”
=원하는 게 뭐야?
“형이 가지고 있는, MS엔터테인먼트 지분 나한테 다 넘겨.”
이때 백준경은 백준열처럼 여러 분야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백준열의 가장 큰 라이벌 경쟁사인, 국내 최대 연예 기획사인 MS엔터테이먼트 지분을 3.5%나 가지고 있었다.
=미쳤어?
버럭 소리치는 백준경.
하긴 그 정도 지분이면 시가로, 5백억에 육박하는 큰돈이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자들, 특히 후계자로 커온 자들은 돈에 민감하다.
그건 백준열도 마찬가지였고. 그걸 알면서 내가 그런 제안을 한 건, 그래야 비로소 백준열다웠기 때문이다.
“그냥 달라는 거 아냐. 현 시가로는 못 사겠고. 원금은 보전해 줄게.”
한마디로 백준경이 MS엔터의 지분을 사들일 때, 들어간 돈 만큼 주겠단 소리다.
그때에 비해 MS엔터의 주가가 5배 정도 올랐으니 5백억 주식을, 백억에 내가 먹겠다는 순 도둑놈 심보였다.
하지만 이래야 역시 개새끼 백준열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이 씨....
“왜? 싫어? 뭐 싫으면 대동그룹에 얘기 해 보지 뭐. 거기도 삼명 바이오 주식 꽤 가지고 있던데....”
=하지 마. 그쪽에 접촉하면 널 가만 안 둬.
이건 진짜다. 백준경도 내가 자신의 처가를 건드리는 건, 도저히 못 참겠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맥을 잘 짚은 셈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대신 그 동영상 원본 나한테 보내고, 그 주둥이 오버로크 제대로 해야 할 거다.
“다시 말하지만, 뭐 좋은 일이라도 떠들고 다니겠어? 내 얼굴에 침 뱉기지. 걱정 마. 확실하게 처리할 테니까. 대신 MS엔터 주식도 확실하게 넘겨.”
=내일 바로 실무진 미팅 잡자.
“생큐. 그럼 그때 동영상 원본도 넘길게.”
뚜뚜뚜뚜뚜....
할 말 다 끝나자, 역시나 백준경 답게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에바아악!”
아주 짝에도 쓸모없는, 내 작은 형 백준호 동영상 하나로 4백억을 벌었다.
이 주둥이 하나 잘 놀려서 말이다.
* * *
“으아아아!”
와장창창!
백준열과 통화 후, 삼명 자동차 대표실에서 백준경이 미쳐 날 뛰었다.
눈에 띠는 건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면서, 괴성을 질러 대는 그가 무서웠던지, 그의 비서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했다.
그러자 백발의 주름투성인 노년의 신사가, 대표 비서실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런 그를 보고 비서가 발까지 동동거리며 다급히 말했다.
“조 전무님. 대표님께서 10분 전부터 저러고 계세요.”
“알았어. 내가 들어가 볼 테니 양 비서는 진정하고, 대표실에 아무도 들이지 마. 알겠지?”
“네. 그럴게요.”
비서에게 대답을 듣고 난 조 전무라 불린 노년의 신사가, 노크도 없이 대표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대표실 안이 조용해졌다.
“휴우....”
비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쉰 후 차분히 자기 자리에 앉아서, 그때부터 걸려오는 대표를 찾는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그때 대표실 안에서는, 백준경이 노년의 신사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었다.
“흑흑흑흑....삼촌....저 너무 힘들어요.”
“그래. 준경아. 다 이해 한다. 대기업을 이끌어 나갈 후계자가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노신사는 차분한 어조로 연신 백준경을 다독였다. 그러자 점차 진정이 되어가는 백준경.
그가 눈물을 훔치고 제 정신으로 돌아오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이번에는 뭐가 문제더냐?”
노신사의 직설적인 물음에 백준경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게 실은....”
백준경의 얘기를 중간에 끊지 않고 전부 다 듣고 난 뒤, 노신사가 잠시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눈을 뜨면서 백준경에게 물었다.
“우선 네 아내와 화해부터 해라.”
“네? 하지만 그년은 제 시동생과 붙어먹은 더러운 년이라고요.”
“너도 장미가 딴 놈과 놀아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않느냐?”
“그래도 시동생과는....”
“똑같다. 백준호도, 그 딴 놈들 중 하나 일 뿐이다.”
“외삼촌!”
그랬다. 지금 백준경이 자신의 진심을 터놓고 얘기 중인 눈앞의 노신사는, 바로 백준경을 낳아 준 생모의 오빠인 조진호였다.
조진호는 원래 백승렬 회장의 최측근 인사였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백승렬 회장의 눈 밖에 나면서 계열사 임원으로 밀려났는데, 지금은 백준경이 대표로 있는 삼명 자동차의 전무로, 백준경 곁에서 서포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네가 삼명그룹의 회장 자리에 오르려면, 네 아내와 처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건 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더냐?”
“하지만....”
“너는 지금 스스로 자신의 오른팔 하나를 자르려고 하고 있다. 내 너에게 물어보마. 오른팔 없이, 과연 백준호와 백준열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느냐?”
“....”
조진호의 물음에 백준경은 말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그런 백준경을 조진호는 말없이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그러자 10여분 뒤 백준경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장미랑 화해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그리고 백준열이 말인데, 백준호 만큼 경계를 해야겠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녀석 알고 보니 우습게 볼 녀석이 아니었어요.”
“당연하지. 백승렬 회장의 피가 어디 가겠느냐?”
그 누구보다 백승렬 회장을 잘 아는 조진호였다.
그래선지 또 누구보다, 그가 얼마나 무섭고 치밀한 사람인지도 잘 알았다.
* * *
가까스로 백준경 대표를 달래고, 자기 방으로 돌아 온 조진호 전무.
그가 다소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백 회장의 마음이, 막내인 백준열 쪽으로 기운 거 같구나.”
백준경의 얘기를 들어 본 결과, 조진호는 그런 결론에 다다랐다.
백승렬 회장이 선대 회장을 쳐서, 스스로 회장 자리를 꿰찰 때, 결정적인 역할을 많이 했던 조진호.
그런 그를 두고 지금 부회장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조진호는 자신의 조카를 삼명그룹의 회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과감히 백 회장 곁을 떠나서 백준경에게로 왔다.
그 과정에서 백승렬 회장을 서운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그를 순순히 백준경의 곁으로 보내 줄 백 회장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백준경은 그런 조진호의 서포터를 받으며 쭉쭉 성장했고, 지금은 삼명그룹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조진호가 보기에 백준경은 아직 미흡했고, 그런 그를 제대로 받쳐 줄 인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작년부터 조진호는, 삼명그룹 전체를 뒤져서 백준경의 책사 역할을 해 줄 인재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박인호.
현재는 삼명해양조선의 이병훈 대표의 꾐에 속아 넘어가서, 거제도에서 좆뱅이 치고 있었다.
원래는 올해 말까지 개고생 좀 더 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왜 굶주린 개가, 주인 말을 더 잘 듣는 거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백준경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왠지 계속 조진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아무래도 박인호를 좀 더 빨리 불러 올려야겠군.”
지금까지야 자신이 어찌어찌 백준경을 서포터 하고 있었지만, 그도 점점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기력이 떨어지는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머리였다.
최근 들어서 조진호는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다.
그랬더니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그에게 하는 게 아닌가?
“말도 안 돼!”
그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한, 아니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조진호.
그로인해 그가 받은 충격은 실로 컸기에, 거의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 했었다.
하지만 이대로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벌려 놓은 일 만큼은 유종의 미를 거둬야 했기에, 그는 다시 힘을 냈다.
* * *
그가 병원에서 진단 받은 병명은 바로 치매, 즉 알츠하이머였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조카를 돕는 게 아니라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박인호를 불러 올려서, 백준경 옆에 붙여 놔야 조진호도 안심이 될 거 같았다.
또한 그가 기억이 남아 있는 지금, 박인호에게도 제대로 인수인계도 해 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그는 조카를 떠나기 전, 자기보다 더 뛰어난 책사를 조카 곁에 붙여 줄 생각이었다.
그게 지금 그가 기억을 잃기 전,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