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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조진호는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 되어 있는 연락처 한 곳을 찾았다.
“어디 보자. 여기 있군.”
조진호는 곧장 그 연락처, 거제도에 있는 삼명해양조선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 임원 중 한 때 그 밑에 일했던 자가 있어서, 그 동안에 두루두루 그를 통해 박인호에 대한 정보를 얻어 왔던 조진호.
자신이 삼명 자동차 임원이다 보니, 어렵지 않게 그와 통화 연결이 되었다.
=네. 전무님.
“잘 지냈나? 구 상무.”
=저야 늘 그렇지요. 하아. 한데 이번 인사 때는 아무래도 퇴직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저런. 벌써?”
=벌써 라니요? 제 손자가 올해 중학교 들어갔습니다.
구 상무는 조진호보다 두 살 밑이었다.
나이로 치자면 회사 정년에 이미 가까웠다.
그러니 그만 둘 나이도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진호가 올해로 딱 정년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몸이 안 좋아서 올해 회사를 그만 두는 게 아니라, 나이가 차서 그만 둬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허어....”
=그래도 전무님 정년퇴직 날까지는, 현역에 있을 생각이었는데....
아쉬워하는 구 상무. 그런 그와 예전 얘기를 잠깐 하며 추억을 되뇌던 조진호가, 자기가 왜 구 상무에게 전화 했는지를 상기하고 그에게 물었다.
“저번에 내가 물었던 그 팀장 있잖아? 박인호라고.”
=허허허허. 전무님도 이제 나이가 드시긴 하신 모양입니다. 팀장이 아니라 본부장이겠지요. 경영전략본부장 박인호를 지금 말씀 하시는 거죠?
“그래. 그 박인호. 그 친구 지금 뭐하고 있나?”
조진호는 당연히 구 상무가, 박인호는 여전히 이병훈 대표 밑에서 좆뱅이 치고 있다는 대답을, 그에게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박인호 그 녀석, 본사에서 불러서 엊그젠가 서울 올라갔는데요.
“뭐, 뭐라고!”
기겁한 조진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핏대 선 얼굴로 따지듯 구상무에게 물었다.
“이병훈 대표가 순순히 그걸 받아드렸다고?”
조진호는 이병훈 대표가 박인호를 속여, 노예 부리듯 부려 먹고 있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 노예를 이병훈이 순순히 풀어주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연히 아니죠. 아주 개지랄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회장님이 직접 지시한 거라는데.
“뭐, 뭐? 회장님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다리가 휘청거려진 조진호는, 다리가 완전히 풀려서 도저히 더 서 있지 못하고, 의자에 도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구 상무는 거기까지 밖에 몰랐다.
나머지는 조진호가 직접 삼명그룹 본사에 물어보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거라, 더는 구상무에게 묻지 않았다.
“퇴사하거든 서울에서 만나지.”
=네. 그러시죠. 아마 전무님 정년퇴직 전에 뵐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구 상무와 통화를 끝낸 후, 조진호는 바로 삼명그룹 본사의 임원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전무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본사는 여전히 바쁘지?”
=안 바쁘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조용히 있으면 잘 사는 줄 알라시던 분이, 대체 무슨 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주셨을까요?
“자네 혹시 회장님이 거제도에서, 본부장 한 명 서울로 발령 낸 거에 대해 아는 거 있는가?”
=아아. 그 일 말씀이시군요. 네. 뭐 흔치 않은 인사 발령이라 여러 곳에 물어봐서, 잘 아는 편이긴 합니다만. 왜요?
“그 본부장이 정확히 본사 어디 발령이 난 건가?”
=그게 본사 발령이 난 건 아닙니다.
“뭐? 하지만 서울로 발령이 났다던데?”
=서울이라고 다 본사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저희 그룹이 아닐 수도 있고요.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회장님이 직접 발령 내라고 했는데, 우리 그룹이 아닐 수 있다니?”
=왜 막내 도련님 회사 있잖습니까? JYB엔터라고.
“막, 막내? 그, 그럼 박인호를 낚아 채 간 게, 백준열이란 건가?”
=전무님. 여기 본삽니다. 그렇게 회장님 자제분의 이름을 막 언급하는 건, 좀 삼가주시죠?
하긴 본사에는 따로 듣는 귀가 있다고 했다.
조진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놀라서.”
=본사를 너무 오래 떠나계셨죠. 박인호라는 그 자를 전무님이 왜 찾는지 모르지만 포기하십시오. 회장님이 막내 도련님에게 모종의 제안을 받고 넘긴 사람입니다. 이번에 회장님 심기 건드리시면 전무님 진짜 죽습니다.“
“어허허허허. 사람 살벌하게도 말하는군. 본사 있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
=본사 공기가 싹 변했습니다.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막내 도련님이 곧 후계자로 본사에 들어오실 거란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습니다.
“개소리! 그럴 일은 없어.”
=뭐 저도 일단 개소리로 치부하고 있습니다만....
“조만간 첫째 도련님이 본사로 들어 갈 걸세. 그럼 막내 도련님에 대한 얘기도 묻힐 테지.”
=그렇게 된다면야 다행이죠.
“그렇게 될 걸세. 그러니 염려 말게.”
그렇게 졸지에 본사에 있는 백준경 쪽에 우호적인 성향을 띤 임원을 잘 다독이고 나서, 통화를 끝낸 조진호의 얼굴에 어째 수심이 가득했다.
“이거 죽 쒀서 개 준 꼴이로군.”
기껏 인재를 찾아냈는데, 그 인재를 개새끼 백준열이 채 가버렸다.
그 일을 백승렬 회장도 알고 있다니, 여기서 더 손을 쓰는 것도 어렵게 되어 버렸고.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박인호가 안 되면 다른 인재를 고르면 됐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백준호 측이랑 손을 잡아서라도, 먼저 백준열부터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군.”
조진호는 아까부터 뭔가 계속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는데, 백준열을 처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자 그게 싹 사라졌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준경이가 본사에만 들어가면 그때는....”
현재 백준경의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다.
조진호가 봤을 때, 삼명 자동차에 계속 있어서는 안 됐다. 삼명 자동차는 침몰하는 배였다.
그 배에 더 있었다간, 모든 책임을 백준경이 다 져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그 전에 삼명 자동차부터 빠져 나와야 했다.
근데 마침 백준열의 일로 본사가 시끄러웠다.
이를 잘 활용한다면 백준경은 손쉽게 본사에 들어갈 수 있었고, 본사에서 바로 백준열 견제에 들어간다면, 막내가 회장 자리 앉을 거란 루머도, 쉬이 잠재울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아....피곤하군.”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머리 쓰고, 음모를 꾸미는 게 일상화 되어 있어 괜찮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는, 쉬이 지쳤다.
안 그래도 백준경을 다독이느라, 심력을 많이 허비한 상태라서 더 맥이 빠지는 조진호.
그는 나머지는 좀 쉬었다가 하기로 하고, 자신의 방 응접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머리를 뒤로 살짝 젖히며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 * *
조진호는 그대로 설핏 잠이 들었다. 그렇게 1시간 같은 30분이 훌쩍 흐르고, 그의 책상 위 전화가 울렸다.
“으으으....”
조진호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채, 비몽사몽간 몸을 일으켜서 그 전화를 받았다.
“네.”
=삼촌 저예요. 지금 퇴근하는 길에 처갓집 들르려고요.
그의 조카 백준경의 전화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갈 때 네 장인, 은 회장님 좋아하시는 와인 사가는 거 잊지 말고.”
=당연하죠. 벌써 다 준비해뒀습니다.
“일단 장미 다독여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애들은 무슨 잘못이니?”
=네. 근데 준호 그 새끼는 언제 조질까요?
아무래도 백준경은 자기 와이프와 떡 친 자기 동생을 그냥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준호를 건드려선 안 됐다.
“백준호를 손보는 건, 한 동안 미뤄야 할 거 같다.”
=네?
“백준열이가 나와 네가 생각한 거 보다 너무 컸다. 그래서 백준호와 손을 잡고, 백준열부터 쳐서 없애야 할 거 같구나.”
=....
백준경은 조진호의 이번 계획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거 같았다.
“하아....준경아.”
=알았어요. 삼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 말 후 먼저 전화를 끊어 버리는 백준경.
이제 자기도 머리가 커졌다는 거다.
하긴 여태 그의 간섭에, 녀석이 하고 싶어 했지만 못한 것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조진호가 통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백준경은 없었다.
“미연아.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준경이가 널 닮았는지 이 중요한 시점에, 몽니를 부리려 하는구나.”
조미연. 조진호의 여동생이자 백준경의 생모였다.
조진호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코 백승렬 회장과 눈이 맞아서 덜컥 백준경을 가진 그녀. 당시 백승렬을 유부남이었고, 버젓이 가정도 꾸리고 있었다.
조진호는 조미연에게 아이를 지우자고 했다. 그녀의 장래를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조진호의 말을 듣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삼명家에서 사람이 나와서 그 아이를 데려가 버렸다.
그럴 줄 몰랐던 터라 충격이 컸던 조미연.
그녀는 그만 해선 안 될 선택을 해버렸고, 졸지에 여동생을 잃은 조진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여동생이 낳은 그 아이를 음으로 양으로 돌보며,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성인이 된 여동생을 아들을, 조진호는 삼명家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남은 그의 삶을 다 갈아 넣었다.
결과적으로 조진호는, 백준경이 삼명그룹의 회장이 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때 이미 그는 중증 치매로 백준경도 못 알아 볼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진호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조카인 백준경이, 결국에는 삼명그룹 회장이 되었으니까.
근데 당시의 백준열과 지금 백준열이 달라졌다.
그로인해 조진호가 백준경을 위해 준비한 안배들이 깨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백준경의 운명도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라. 준경아. 네가 회장 자리에만 오른다면....백준호도, 백준열이도 다들 네 앞에 무릎 꿇고,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될 테니까. 거기에다가....”
가능하다면 조진호는 백준경을 통해서, 여동생의 복수까지 하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여동생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은, 백승렬 회장이었다.
그래서 말년에 백승렬 회장이, 백준경에게 그룹을 물려주고 물러나면 그때, 조진호가 직접 그와 같이 살면서 매일 지옥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지금 그럴 수 없었다.
해서 조진호는 백준경이 회장이 되면, 모친의 복수를 꼭 하라고 틈만 나면 조카를 얘기하고 있었다. 아주 세뇌가 되게끔 말이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까?
몇 년 뒤 백준경은 자신이 회장의 자리에 오르는 데, 백승렬 회장이 자꾸 거추장스럽게 하자, 실제 은밀히 제거해 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백준열이 없애는 걸, 망설일 백준경이 아니었고.
* * *
내가 백준경과 통화를 끝내기 무섭게, 김훈 대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경일은 지금 확보해서, 인천으로 이동 중에 있습니다.
처리자 에이전시에서 전경일을 인천 바다에 수장 시켜 버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훈 대표가 이것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전화를 해 왔을 리 없었다.
=정민지 말인데, 대표님 근접경호에 적합한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정민지 요원은 계속 제 곁에 두기로 하죠.”
김훈 대표가 이렇게 전화해서, 이미 얘기 되어 있는 바를 거듭 재확인하고, 거기에 대해 내가 재인정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양태석 때문이었다.
아까 양태석이 나를 찾아와서, 태천파 조직원 중 일부를 자신이 거두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그걸 100% 수용해 주었다.
어차피 태천파가 사라져도 그런 조직은 또 생겨 날 것이고, 나를 비롯한 재벌가에서는 그 조직을 태천파처럼 활용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미리 그 조직의 일부를 내가 장악하고 부린다면, 그 공백 기간 동안 내가 보게 될 반사 이익이, 그 조직원들을 거두면서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더 클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한데 그 얘기가 끝난 뒤, 양태석이 개인적인 부탁을 해 왔다.
오늘부터 내 근접 경호를 맡게 될 예정인 정민지 경호팀원을, 처리자 에이전시로 되돌려 보내던지, 그게 아니면 JYB엔터의 다른 경호부서에 넣어 달란 거였다.
한마디로 내 곁에 두지 말아 달란 얘기.
내가 그 이유를 물어보려 했지만, 양태석이 먼저 그 이유는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언급을 피했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원론적인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김훈 대표와 상의하세요. 어째든 그가 정민지 요원의 전 직장 상사고 내 근접 경호를 맡긴 당사자니까.”
그렇게 나는 모든 걸 김훈 대표에게 떠 넘겼다.
김훈 대표가 그러겠다면 나 역시 양태석이 원하는 대로, 정민지 요원을 내 경호팀에서 빼주겠다고 말이다.
그랬는데 양태석과 김훈 대표간의 얘기가, 아무래도 잘 안 된 모양이었다.
김훈 대표가 처음 내게 약속한 대로, 정민지를 내 근접 경호를 하게 내버려 두겠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김훈 대표와 통화까지 하고 나자, 퇴근 시간까지 채 10분도 남지 않았다.
한데 이번에는 누가 날 만나겠다고, 직접 대표실을 찾아 왔다고 김 비서가 전해왔다.
“그게 누구라고?”
=하종미 배우님과 그 남편분이요.
하종미는 지금 병원에 있어야지, 왜 여기 와 있단 말인가?
내가 의아해 하며 김 비서에게 두 사람을 만나겠다고 하자, 잠시 후 김 비서가 하종미 배우와 그 남편인 정영석이, 같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와요, 하종미 배우님. 옆에 분이 남편 분이시구나. 와아. 훤칠하니 촬영감독이 아니라 배우 하셔도 되겠습니다.”
내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데, 하종미에게는 직빵으로 먹혀 든 거 같았다.
아주 입이 귀에 걸린 걸 보니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NY프러덕션....아니 JYB엔터 촬영 팀의 정영석입니다.”
정영석은 어제 최종적으로 촬영팀장의 면접을 통과하고, JYB엔터의 촬영 팀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수시 경력직 채용으로 어제 내가 그 채용 서류에 최종 결재를 했다.
깍듯한 그의 인사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앉읍시다.”
나는 두 사람이 갑자기 왜 나를 찾아왔는지 궁금해서, 그 연유를 듣고 싶어 두 사람에게 빨리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들이 앉기 전에 들을 수 있었다.
“자기야. 이리 와.”
정영석이 하종미를 불러서 나란히 같이 선 다음, 나를 향해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어어....”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대표실 바닥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두 사람을 그저 멀뚱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