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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엄기풍에게는 그 놈이 실로 생명의 은인과 진배없었다.
대신 손대명와 사신 1대에 있어서는,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배신자였고.
“핸드폰 다 수거 해.”
역시 영리한 손대명.
어떤 놈인지, 오늘 안에 엄기풍이나 그 수하 녀석과 통화를 한 놈이었다.
손대명이 알기로 사신 1대들은 오늘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차로 움직였다.
따라서 이동 중에 그들이 딴 사람에게 뭔가를 알릴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핸드폰뿐이었다.
물론 주도면밀한 놈이라면 그 통화기록까지 지웠겠지.
하지만 손대명에게는 그 기록을 되살릴 수 있는, 포렌식 복원 전문가가 있었다.
사신 1대의 조직원의 수가 30명을 넘지 않았고, 하루 안에 지운 기록만 복원하면 되기 때문에, 그걸 다 복원하는 데 한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포렌식 복원 전문가의 말을 믿고, 손대명은 사신 1대 조직원들의 핸드폰은 전부 수거했다.
물론 그 사실을 사신 1대 조직원들은 알지 못했다. 해서 다들 핸드폰을 넘기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명식이가?”
“네. 형님이 저희를 소집하자, 바로 엄기풍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뭐야? 또 있어?”
“윤석이도....”
“하아. 윤석이까지?”
둘 다 손대명이 아끼던 젊은 조직원들이었다.
둘 다 22살로 아직 조직에 대한 환상, 즉 낭만이 남아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손대명이 더 신경이 썼었던 녀석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녀석들이 엄기풍이 사신 1대에 심어 놓은 스파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명식이가 먼저 경고를 보내고, 윤석이가 그 경고를 보낸 이유를 엄기풍에게 설명했단 거로군.”
이런 식이면 엄기풍을 잡기 쉽지 않았다.
경고를 받자마자 엄기풍은 움직이고, 도망치던 중 그 이유를 듣게 될 테니까.
어디로 내빼야 자신이 무사할지 그때 정한 다음, 그곳으로 유유히 숨어들면 무슨 수로 엄기풍을 잡겠는가?
“2대 애들은?”
“지금 통제하고는 있지만, 엄기풍이 들쑤시면....”
손대명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사신 1대를 소집할 때, 양태석의 도움을 받아서 사신 2대 애들을 잠깐 딴 곳으로 불러 낸 것이다.
사신 2대의 최대 단점은, 바로 엄기풍이 그들을 완전 장악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사신 2대 안에서 엄기풍에 대한 불만이 꽤 많았던 것.
하지만 보스의 지시로 사신 2대를 맡은 만큼 엄기풍이 지시를 내리면, 그들은 일단 따르기는 했다.
하지만 보스의 친 동생이자 2인자인 양태석의 끗발이 엄기풍보다, 확실히 그들에게는 더 먹혔다.
그래서 양태석의 전화 한통에, 사신 2대가 지금 경기도 화성의 한 농장에 가 있었다.
“거기로 술과 고기 보내라고 했는데 도착했데?”
“네. 좀 전에 근처 마트에서 배달로 보낸 술과 고기가 막 도착했답니다.”
“그럼 고기 굽고 술 마시고 있으라고 해. 태석이 형님은 9시에서 10시 사이쯤에 도착한다고 하고.”
그 말은 오늘 밤 10시까지는, 손대명이 무슨 수를 쓰던 엄기풍을 처리하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엄기풍이 지금 있는 태일공방은, 현재 사신 1대를 다 몰고 가도 어쩔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위치가 산속에 있고, 거기 가는 곳곳에 태일공방 측의 CCTV가 설치되어 있어, 사신 1대가 그쪽으로 가면 그 즉시, 그들이 그걸 알아차리고 대비를 할 게 뻔했다.
특히 놈들은 최근 태천파 보스와 대립 관계에 있는 최문식과도 연결 되어 있어서, 밀수로 국내 반입 된 총기로 무장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그러니 사신 1대의 쪽수만 믿고 거기 쳐들어갔다가는, 자칫 사신 1대가 괴멸 당하는 최악의 사태가 야기 될 수 있었다.
손대명은 보기와는 달리 무모한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걸 두고 고민하기보다는, 털어놓고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이런 쪽으로 자기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사람은, 태천파 조직 내에 딱 한 사람뿐이었다.
손대명은 바로 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형님. 저 대명입니다.”
=어어. 왜?
“엄기풍이 처리 말인데....”
손대명의 얘기를 묵묵히 경청하던 양태석. 그가 손대명의 말이 끝나자 침음 성을 흘리며 말했다.
=으으음....태일공방이라....거기 철옹성인데. 게다가 최문식 쪽 총기까지 흘러들어갔다면, 사신 1대로는 힘들어. 아니 우리 애들 다 동원해도, 그 안에 웅크린 엄기풍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손대명은 설마하니, 양태석의 입에서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기에 많이 당혹스러웠다.
“그, 그러면 어쩝니까?”
=어쩌긴. 지금 아니면 엄기풍이 제거하기 더 어려워진다며?
“그러니까 제가 형님께 이렇게 연락드린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제가 벌써 해치웠죠.”
=이건 아무래도 우리 손을 떠난 일인 거 같다.
“네?”
=외부의 힘이 필요해.
“외부의 힘이라면....형님. 설마....경찰이요?”
=어. 경찰도 그냥 경찰이 아니라 경찰특공대가 필요한 거 같다. 넌 사신 2대 잘 컨트롤 하고 사신 1대를 태일공방 주변 길목에 잘 배치 시켜 놔. 경찰이 거길 들쑤시면 너구리가 더는 못 버티고 튀어 나올 테니까. 그때 처리하게 말이야.
여기서 양태석이 말한 너구리는 엄기풍을 지칭한 소리다.
즉 지금 양태석을 경찰까지 동원해서, 기어코 엄기풍을 태일공방 밖으로 끄집어내겠다는 것. 그러려면 경찰을 마음껏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를 움직이겠다는 거다.
그 권력자야 뻔했다. 바로 양태석의 배후, 개새끼 백준열.
* * *
임연수의 평창동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오랜만에 음악 감상 좀 하려 했다.
요즘 나는 엔터社 대표로써, 이 시기에 유행하는 곡들이 뭔지 알아두기 위해서, 최신 곡 위주로 가요를 듣고 있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곧 런칭할 새 걸 그룹 때문에 주로 그쪽 노래를 듣다가, 지금은 소몰이창법으로 유명한 남성 발라드 그룹의 노래를 들었다.
“역시 SUG워너비야.”
현재 SUG워너비는 리더가 탈퇴하면서, 새로운 멤버를 영입해서 활동 중이었다.
새 멤버 영입으로 노래 스타일까지 변했는데, 그게 오히려 신의 한수를 작용,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SUG워너비는 좋게 말하면 가창력 그룹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들의 창법이 한국 가요계를 획일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유형의 가수들이 많았지. 옐로우 아이즈나 주성모, 박유신, 한희, 히성 같은....”
그래서 올해부터 아이돌이 다시 대세로 기울어지면서, 소몰이 가수들의 유행은 사그라지게 된다.
“그래도 SUG 워너비는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 컨트리와 가벼운 발라드 곡들로 인기를 이어나가지만....”
현재 SUG 워너비의 소속사는 QH엔터테인먼트였다. 바로 해피걸스의 소속사 말이다.
QH엔터테인먼트는 올해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해서 내년에 사실상 공중분해 되는 소속사였다.
“해피걸스도 그렇고 SUG 워너비도 아깝긴 한데....”
하지만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내가 지금 QH엔터테인먼트를 건드리는 건, 내 손에 똥을 묻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 일은....”
그때 내 머릿속에 떠 오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가평에서 인연을 맺은 조폭두목 박칠석이었다.
“이럴 때 쓰려고 올라오라고 했는데....왜 여태 연락이 없는 거야?”
이쯤 되면 올 때도 됐는데 박칠석에게 아직 연락이 없자, 양태석에게 물어 봐야겠다고 막 생각했을 때였다.
지이이이잉!
양태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속으로 잘 됐다 생각하며 그 전화를 받았다.
“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대표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내 도움이요?”
=네. 경찰을 움직여야 할 일이 있어서요.
경찰이란 말에 내 머릿속에 내 경찰 인맥이 쭈욱 떠올랐다.
“자세히 말해 봐요.”
양태석은 태일공방에 대해 간략히 얘기했다. 최종 타깃은 거기 숨어 있는 조폭 두목이었고.
“그러니까 그 태일공방이란 데가, 도자기는 안 굽고 사람 시체 처리하는 불법 소각장이란 거네요? 거기다가 불법 총기도 소지하고?”
=네. 그러고 보니 태천파의 어두운 면이 거기 다 있군요.
“음. 알겠어요. 경찰특공대를 동원해서 지금 바로 거길 쳐 달란 거죠?”
=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손 써 보도록 하죠.”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그 정도 힘은 그에게 있었다. 그래서 흔쾌히 양태석의 부탁을 받아드린 거고.
“아아. 그리고 박칠석 말인데....”
=내일 서울로 온다고 오늘 연락 왔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재동이라는 자가 먼저 서울로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동이요?”
순간 이제동이 박칠석보다 QH엔터테인먼트를 상대하기 낫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래도 박칠석은 서울에서 조직의 기반을 갖춰야 하는 데, 손 많이 갈 게 뻔한 QH엔터테인먼트의 일을 그에게 맡겼다간, 왠지 죽도 밥도 안 될 거 같아서 말이다.
“이제동이 연락처 좀 알아내서, 나한테 문자로 보내 줘요.”
=네. 대표님.
그렇게 양태천과 통화를 끝내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박대순 서울경찰청장에게 다이렉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박 청장님. 저 백준열입니다.”
=아이고. 백 대표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제가 제보를 하나 들었는데, 혹시 검경이 태천파를 손보기로 하셨습니까?”
=네? 그, 그건 알려드리기가 좀....
“그러시겠죠. 근데 그 태천파에서 그 동안 죽인 사람들을 처리해 온 곳을, 제가 우연히 알게 되었지 뭡니까?”
=뭐라고요? 거, 거기가 어딥니까?
“태일공방이라고. 글쎄 그 조폭새끼들이 그동안 거기서 시체를 소각해 왔다지 뭡니까? 게다가 외국에서 밀수한 불법 총기까지 제공해서, 아주 철옹성을 만들어 놨다나 뭐래나.”
=총, 총기라고요?
“청장님. 그런 위험한 곳을 그대로 둬서 되겠습니까?”
=안 되죠.
“저는 한시라도 빨리 그런 곳이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이거 사람이 불안에서 살 수가 있나....”
내가 이정도 말했는데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박대순 서울경찰청장은, 경찰청의 2인자 그릇이 못 되는 인사라 볼 수밖에 없다.
=지금 즉시 경찰특공대를 그 태일공방에 보내서 일망타진하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래야죠. 그런 사회악은 빨리 없애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근데 주말에 서울CC에서 보기로 한 것은....
“청와대 측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잘하면 비서실장님이 나오실 수도 있다더군요.”
원래는 정무수석이 나오기로 되어 있는 미팅 자리였다. 하지만 청와대의 2인자나 마찬가지인 비서실장이 나온다는 건, 그 만큼 그 미팅의 판이 커졌다는 소리였다.
그 판을 키운 게 바로 백준열, 본인이었다.
청와대 하니 그제야 그 생각이 난 거다. 백준열이 판을 키운 이유는 뭔가 노리는 게 있어서고. 그 노리는 게 뭔지 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비서실장님이요?
아무래도 정무수석이 얘기하는 것과, 비서실장이 얘기하는 건 그 ‘급’이 달랐다.
비서실장이 나서준다면 그냥 박대순 서울경찰청장이 경찰청장이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즉 이번 주말에 서울CC의 미팅 자리가, 박대순 청장에게는 더 중요한 자리가 된 것이다.
“비서실장님과 저는 형님, 아우님 하는 사이니 염려 하실 거 없습니다.”
=아이고. 그렇습니까? 그럼 저는 백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그렇게 훈훈하게 박대순 서울경찰청장과 통화를 끝낸 나는, 바로 양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경찰특공대가 거길 칠겁니다. 준비 잘 해 뒀다가, 그 너구리가 빠져 나가는 일이 없게 하세요.”
=고맙습니다.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습니다. 너구리가 튀어 나오면 저희 손에 잡힐 수밖에 없게끔 말입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이제동의 연락처는 방금 전달 받았습니다. 지금 바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너구리 잘 처리하고 내일 봅시다.
내 말은 너구리를 잘 잡아서 처리했으면, 굳이 내게 알릴 필요 없이 내일 얘기하면 된다는 소리다. 그 정도 말은 양태석도 바로 이해했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내가 양태석과 통화를 막 끝냈을 때 나를 태운 차가 평창동 임연수의 집 앞에 도착했다.
* * *
경찰 조직의 2인자가 가진 힘은 역시 대단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고 채 30분도 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태일공방으로 달려갔다.
투타타타탕! 탕! 탕! 탕!
그리고 태일공방 안에서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놈들이 불법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경찰 특공대.
그들 앞에 태일공방 측 사람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총을 버리고 다들 체포 되었다.
“이쪽으로....”
하지만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사신 1대의 우두머리 엄기풍.
그는 경찰특공대가 태일공방에 난입해 들어 올 때, 그곳을 빠져 나갔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하지만 산속인 태일공방에서 나와서 엄기풍이 갈 곳은 정해져 있었고, 미리 거기에 자리 잡고 있었던 사신 1대 조직원들.
그중에서도 엄기풍이 나올게 가장 유력한 곳에 손대명이 가 있었고, 그곳에 역시나 엄기풍이 나타났다.
“이런....”
엄기풍은 자신이 꼼짝없이 낚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충분히 조심하고 대비해 놨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누구 솜씨지?”
엄기풍이 묻자 손대명이 바로 대답했다.
“누구긴. 태석이 형님이시지.”
“그랬군.”
비교적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받아드리는 엄기풍. 하지만 그런 모습이 손대명의 심기를 제대로 자극했다.
“옛날 사형집행관이 사형수를 죽일 때, 왜 끔찍하게 괴롭히다 죽였는지 알아?”
“뭐?”
갑작스런 손대명의 뜬금없는 소리에 엄기풍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던 말든 손대명은 자기 할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사형수 가족들이 뇌물을 갖다 바치지 않아서야. 엄기풍이 넌 안타깝게도 그 뇌물을 내 줄 가족들이 없구나.”
그제야 손대명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은 엄기풍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