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고 싶으면 해-225화 (22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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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당연히 삼명 호텔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본사 감사에 이어 대표의 검찰 소환이라는 악재에 삼명 호텔 주가 역시 오늘 하루 대거 폭락 할 정도로 말이다.

“임 비서. 그 동안 수고 많았어요.”

“대표님....”

백지연은 검찰 소환서를 받기 전에 이미 자기 신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간단히 자기 짐을 챙겼고, 그간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좌했던 비서와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은 누가 봐도 회사, 즉 삼명 호텔을 나가는 분위기였다.

사실 말해 삼명가의 여식이 검찰 소환이 말이 되는 소린가?

주위에서는 이를 두고 백지연이 백승렬 회장의 눈밖에 제대로 나버렸기 때문이 벌어진 일이라고 봤다.

즉 백 회장이 화를 거두면, 백지연은 언제든 다시 삼명 호텔로 복귀하던지, 아니면 다른 계열사를 맡게 될 거라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백지연은 자신의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기 친부도 아닌 백승렬 회장이, 그녀에게 삼명그룹에서 일하는 걸 그대로 두고 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란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활보하는 거 자체가, 백승렬 회장의 눈에 거슬릴 것이고.

‘그러니 내가 갈 곳이야 뻔하지.’

바로 외국에 나가서 사는 것. 백승렬 회장은 백퍼센트 백지연을 타국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아마 이런 지시는 벌써 백승렬 회장이 비서실에 내렸을 것.

지이이잉!

역시 그녀 생각대로였다. 삼명그룹 비서실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백지연은 비교적 담담하게 받았다.

“네. 네. 알았어요.”

그런데 비서실에서 바로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백승렬 회장이 직접 그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다렸고 전화가 다시 와서 받았다.

=지연아?

“네. 회장님.”

백지연은 백승렬 회장을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네 이름은 내가 직접 지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내 손으로 지우게 되었구나.

백승렬 회장은 이미 백지연이 자기가 뻐꾸기 새끼란 걸 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동안 잘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뭐한 게 있다고. 네가 잘 큰 거지. 그런데 말이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 괜찮으니까.”

=미안한데....외국에 나가서 살아주겠니?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네 어머니 데리고 말이다.

“엄마까지 데리고 나가라고요?”

=그래.

“하지만....”

당연히 모친인 서지현이 그녀를 따라 외국에 나가 살 리 없었다. 그녀가 뭐가 아쉬워서 말이다.

서지현은 한 때 대통령의 딸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런 특별한 기득권을 가진 이 나라를 두고, 다른 나라에 나가서 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백승렬 회장의 뜻이 완고했다.

=네 엄마도 나가게 될 거다.

그게 무슨 소리겠는가? 백승렬 회장이 그렇게 만들 거란 얘기.

즉 백승렬 회장이 사실상 서재국 전 대통령과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허허허허. 그래도 내가 헛살지는 않았나 보구나? 네가 나를 다 걱정하고.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나는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이니까.

백지연도 알았다. 그녀의, 이제는 전 부친이 되어버린 백승렬 회장은 결코 질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까 백지연과 그 모친인 서지현이 함께 외국으로 내쫓기는 건,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소리였다.

물론 서지현은 그걸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겠지. 하지만 백승렬 회장이 서지현으로 하여금 기어코 그걸 받아드리게 만들 것이었다.

=자세한 세부 사항은 비서실에서 연락이 갈 거다.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가급적 다 들어 주도록 할 테니, 너도 네 엄마를 설득하는 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말이 도움이지 그녀의 도움 따윌 필요할 백승렬 회장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백지연도 오히려 대답하기 쉬웠다.

“네. 그럴게요.”

=건강해라.

“회장님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그렇게 백승렬 회장과 통화를 끝낸 백지연. 그녀는 질끈 두 눈을 감았고 그러자 참았던 눈물이 주르르 그녀의 뺨을 타고 턱 밑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 * *

백지연은 비서가 돕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회사 차는 탈 수 없었기에, 오늘 아예 그녀 개인차를 타고 출근한 백지연.

그녀는 자신의 짐부터 차에 실었다. 그리고 차에 타고 나자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일단 차를 끌고 삼명 호텔 건물을 나섰다.

이대로 그녀 엄마가 있는 한, 삼명家 본가에는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좀 전 백승렬 회장과 작별까지 한 마당에, 그가 있는 집에 들어가는 건 좀 그랬다.

그래서 며칠 서울의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그 사이 비서실과 얘기를 나눠서, 가급적 빨리 일정을 잡고 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이대로 한국을 떠나지만, 언제고 다시 돌아 올 거야.”

금의환향이라고 하지 않던가? 비단옷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말인데, 백지연은 비록 한국에서는 이루지 못했지만, 반드시 외국에서는 최고 호텔 경영자가 되어서, 한국으로 화려하게 컴백하리라 다짐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 아마 외국에서 개고생을 해야 할 테지만, 그래도 백지연은 자신이 있었다.

“그냥 저기서 묵어야겠다.”

백지연은 오늘따라 길게 운전하기가 싫었다. 아니 그냥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해서 삼명 호텔에서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는 백제 호텔로 차를 몰아갔다.

그리곤 거기 방 하나를 잡고, 일찌감치 저녁을 먹으러 호텔 라운지로 나왔다.

“어?”

“어머!”

근데 거기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며칠 전 밤에 우연히 마주쳤던, 미스코리아 출신 톱스타였다가 재벌가 남자와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은퇴한 고지영.

그녀와 이렇게 우연히 백제 호텔 라우지에서 마주친 것이다.

그런데 그녀 옆에는 딱 봐도 한 성격 할 거 같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가 같이 있었다.

백지연은 그 남자가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바로 동양 시멘트 윤지승 대표. 고지영의 남편 되시겠다.

하지만 백지연은 그냥 모른 척 웃는 얼굴로 고지영에게 다가갔다.

“지영 언니. 여기서 다 보네요.”

“그러게요. 언제고 마주칠 줄은 알았지만, 여기서 이렇게나 빨리 지연씨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아. 여보. 이쪽은....”

“됐어.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대충 얘기하고 들어 와.”

그런데 고지영의 남편인 윤지승은 좀 싸가지가 없었다. 백지연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녀를 아주 대 놓고 무시한달 까?

“여, 여보!”

고지영이 어떻게 잡을 틈도 없이 윤지승은 휑하니 그 자리를 떠 버렸다.

“지, 지영씨. 미안해요. 저이가 이렇게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닌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고지영. 그런 그녀를 보고 백지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예의란 것도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에게나 차리는 거죠. 윤 대표님이 보기에 제 수준이 그에 못 미치는 거고요.”

백지연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물론 그 수수함도 다 명품이라, 그녀가 현재 걸치고 있는 옷만으로도 수억을 호가하지만 말이다.

만약 윤지승이 패션 쪽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다면 백지연의 그 수수함에 탄복해서, 그녀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 봤을 텐데, 시멘트 회사 대표인 그는 그런 안목이 없었다.

“가 보세요. 대충이란 건 빨리 오란 거잖아요. 어서요.”

고지영은 거듭 미안해하며 남편이 들어간 라운지 내 카테일 바(Bar)로 들어갔다.

그런 고지영을 잠시 지켜보던 백지연도, 이내 라운지 내 레스토랑 쪽으로 움직였다.

* * *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던 백지연은 이곳 레스토랑 추천 메뉴로, 대충 저녁 식사를 하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때 또 고지영과 마주친 백지연. 근데 이번에는 그녀 남편 말고, 다른 커플이 함께 있었다.

백지연과는 비교되게 화려한 드레스와 값비싼 보석을 온 몸에 두른, 딱 봐도 부자스러운 여자와 그런 여자와 보란 듯 팔짱을 끼고 있는 젊고 잘 생긴 신사.

그 신사 역시 이탈리아제, 최고 명품 신사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고지영은 또 마주친 백지연을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힐끗 옆에 남편 눈치를 살폈다.

근데 그녀 남편은 백지연을 보고 불쾌한 얼굴빛이 역력했다.

마치 평소 꺼리는 사람을 본 듯 말이다.

그걸 보고 백지연도 굳이 고지영과 인사를 하는 등의, 아는 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 옆을 지나치려는 데....

“지연이 아니니?”

그때 화려한 드레스에 보석을 온몸에 휘감은 부자 여자가, 먼저 백지연에게 아는 척을 했다.

“누구?”

백지연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그녀에게 말을 놨다. 삼명가의 직계만이 보일 수 있는 오만함의 여유였다.

그런 분위기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상대는 바로 백지연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맞구나. 백지연. 나야. 삼보에 나연이.”

“삼보면 SB케미컬?”

삼보그룹의 주력 회사가 바로 SB케미컬이었다. 백지연은 삼보그룹은 몰라도 그 SB케미컬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엄마인 서지현과 참석했던 재벌가 사교 모임에서 안면을 튼 사이 같았다.

“맞아. 넌 지금 호텔 대표지?”

“어어.”

아직 대표이사에서 정식으로 해임 된 건 아니니, 어째든 지금 그녀가 삼명호텔 대표인 것은 맞았다.

“이야. 부럽다. 나는 경영 능력이 없다고, 아빠가 회사에 발도 못 붙이게 하는데. 아참. 여기는 내 남편. 대양그룹 3남. 자기야. 인사해. 삼명호텔 대표인 백지연이야.”

부자 여자의 입에서 백지연이 삼명호텔 대표란 말이 나오자, 그녀의 남편이라는 동성그룹 3남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혀졌다.

“대양 시멘트 차명수 상무입니다.”

그리곤 그의 최고급 정장 상의 가슴 포켓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그걸 보고 백지연도 어쩔 수 없이 들고 있던, 아주 수수해 보이는 2억 짜리 백(Bag)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명함을 교환했다. 그때 부자 여자가 백지연의 백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지연아. 너 그 백, 혹시 몽플랑에서 딱 10개 제작했다는 그 ‘베르토르’ 아니니?”

“어어. 맞아.”

바쁜 백지연이 산 건 아니고, 모친인 서지현이 구매해서 딸인 백지연에게 어울린다고 준 선물이었다.

“오 마이 갓! 내가 ‘베르토르’ 진품을 여기서 보다니. 어머. 너 이 옷 ‘까르띠에’에서 장인이 한땀한땀 정성들여서 만들었다는....그 로에베의 컬렉션 중 하나인 그 드레스 맞지? 어머머. 이건 세계적인 이탈리아 디자이너 톰 브라운의 쿠튀르 레벨의 의상인....”

드디어 지금 백지연이 두르고 있는 명품 옷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명품을 무슨 품평회 하듯, 하나씩 까발리는 건 백지연이 원하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명품 걸친 마네킹도 아니고 말이다.

* * *

동양 시멘트 윤지승 대표. 그는 동양그룹의 윤대평 회장의 둘째 아들로, 현재 첫째인 윤지석과 셋째 윤지후와 차기 회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윤대평 회장은 자수성가한 인물로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윤 회장이 상당히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인물 같아 보였지만 아니었다.

그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물로, 돈 되는 일이라면 무슨 수를 쓰든 쟁취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렇다보니 자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돈 되는 가문과 결혼해서 혼사로 사사로운 이득을 취해왔다.

설사 그게 딸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재계에서 윤대평 회장에 대한 세간의 평,은 구두쇠니 자린고비니 뭐니 하면서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랬던 윤대평 회장이 미국 유학까지 보내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둘째 아들 녀석이 떡하니 결혼할 여자라고 집에 데려왔을 때 그 실망감이 이뤄 말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도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모를, 딴따라 여자를 말이다.

당연히 윤대평 회장은 팔팔 뛰며 그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둘은 이미 깊은 사이로 발전했고, 그 딴따라 여자 배에는 아이까지 생겨 있었다.

거기다가 소문이 나 버렸다. 어떻게 막아 볼 여지도 없이 거세게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둘을 결혼 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탐탁지 않은 둘째 며느리에 대한, 윤대평 회장의 복수는 결혼 후 시작 됐다.

같은 자식이니 출발선상은 같아야 공정하고 공평할 텐데, 윤대평 회장은 그러지 않았다.

처가의 도움을 받은 첫째와 셋째가 당연히 앞서 나갔고, 둘째인 윤지승은 그 만큼 뒤처져서 경쟁을 해 나가야 했다.

윤지승도 처음에는 그런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처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형과 동생과의 격차를 극복해 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미 가진 자를 따라 잡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렇다보니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마음도 점점 더 식어갔다.

마누라 예쁜 건 딱 3년 간다고 했던가?

그 말이 딱 맞았다. 3년이 지나자 예쁜 마누라 보다, 능력 있는 처갓집을 둔 남의 마누라가 더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있는 집 여자와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 후계자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는 건 자신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자신이 한 선택에 후회가 되는 윤지승이었다.

그런 윤지승이 오늘 부부 동반 자리에 아내인 고지영을 불러냈다.

아이 키우고 살림하느라 늘 집에만 쳐 박혀 있었던 고지영은, 윤지승의 부름에 한껏 들떠서 그 앞에 나타났다.

나름 꾸미고 온 그녀는, 역시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늘 미팅 자리에 나타난 다른 부부의 아내가 한, 치렁치렁한 보석 치장에 그 빛이 바래버렸다.

예전 이었으면 윤지승의 눈에도 그의 아내인 고지영이, 보석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이 식어 버린 윤지승은 그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남의 아내가 더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게 된 그의 눈에는 보석 말고, 그 재벌가 출신 남의 아내의 배경이 오롯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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