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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전지석이 상갓집을 나서고 나서 간간히 찾아오던 조문객들도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전지석이 나갈 때, 밑에 직원들에게 지시해서 상갓집 앞에 세워 둔, 백승렬 회장의 근조화환을 치워 버리게 한 것.
그러자 삼명그룹 쪽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아마도 그 소식이 삼명그룹 사람들에게 전해 진 모양이었다.
이동훈은 나갈 때, 백승렬 회장의 근조화환이 사라진 걸 봤다.
하지만 그걸 당연한 것처럼 받아드렸다.
그가 이곳 상갓집에서, 괜히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한 게 아니었던 것.
격세지감 상, 환경의 큰 변화에 따라서 세상이 바뀌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단,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그게 뭐냐면....바로 삼명그룹의 제왕인 백승렬 회장의 생각, 즉 의중 말이다.
“뭐 헛다리들 짚는 거야, 자기들 마음이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사람들. 그 중에서 이동훈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감사실장인 전지석이었다.
백승렬 회장은 사냥이 끝난 사냥개를 그냥 둘 위인이 아니었다.
아마 내일부터 시작해서, 감사실장을 비롯한 그의 라인 지우기에 나설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백승렬 회장이 사실상 찍어 낸, 오규동 비서실장의 뒤를 이어 비서실장이 될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나의 역할은....회장님께서 선택하신 후계자를 무사히 권좌에 앉히고, 그분의 그 자리를 공고히 만드는 것.”
이동훈의 입에서 실로 무서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백승렬 회장이, 점찍은 차기 비서실장은 다름 아닌 이동훈 자신이란 말이 아닌가?
사실 그젯밤에 이동훈은 백승렬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백 회장의 결정을 전해 들었다. 그건 바로 백 회장이 자신의 막내아들 백준열에게, 사실상 회장 자리를 넘기기로 한 것이다.
백 회장의 그 결정에 이동훈도 진짜 많이 놀랐다. 하지만 백 회장이 정한 이상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십여 년 전, 백 회장이 이동훈을 내치면서 한 말이 지금도 생생히 생각나는 이동훈 이었다.
[너는 난세에 영웅이다. 지금 같은 평화의 시대, 치세에서 네가 여기서 할 일은 없다. 그러니 기다려라.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백 회장의 말대로라면, 그가 자신을 불렀으니 이제부터 난세가 시작 된다는 뜻이 된다.
“난세라....”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동훈의 생각이 많아졌다.
* * *
박혜지의 연락을 받고 나서 양태석은 이태원 쪽의 관리를 맡은, 조직의 중간 보스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곤 박혜지의 여동생 박혜수에 대한 인상착의와 신체적 특징을 얘기했다.
특히 여자치고 키가 크고, 몸매가 빼어나다는 양태석의 말에, 이태원 쪽 중간 보스가 그런 여자는 눈에 확 띠게 마련이다며, 잘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일은 그 중간 보스에게 맡기고, 양태석은 주말 동안 보스로서 그가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태천파는 막을 내렸지만 이제 태석파가 새로이 서울에서 급부상하면서, 이전 태천파의 영역을 빠르게 차지 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서울의 기존 조폭조직들과 충돌도 있었지만, 양태석이 나서면 대부분 해결이 됐다.
서울 조직들 중에서 양태석과 척을 지고 싶은 곳은 없었으니까.
양태석에게는 태천파의 기동타격대 격인, 사신대가 있었고 또 태천파의 무력의 상징들이라고 할 수 있는, 중간보스들이 이끌던 정예 조직원들이, 고스란히 양태석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양태석과 싸우는 건, 예전 태천파와 싸우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서울을 휩쓸었던 태천파.
서울의 기존 조직들은, 예전의 그 미쳐 날 뛰던 태천파 놈들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형님. 이걸로 태천파의 영역은 다 회복 한 거 같습니다. 단지 사업들은....”
눈 밑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 올 기세로 내려와 있던, 양태석의 오른팔인 정준호가 그나마 밝은 얼굴로 나타나서 양태석에게 보고를 했다.
그러다 뭔가 아쉽다는 얼굴 표정을 지으며, 뭘 더 양태석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때 눈치 빠른 양태석이 딱 끊어 얘기했다.
“불법적인 사업은 다 정리 한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지금 조폭이지만, 곧 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양지로 나갈 거다. 그런 우리에게 불법적인 사업은 족쇄나 마찬가지야. 준호야. 너 계속 조폭 할 거냐?”
“아, 아뇨.”
“그럼 내가 시킨 대로 해라.”
“그렇지만 재정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장 밑에 애들 먹여 살리려면....”
“그분이 도와주실 거다.”
“아아....”
양태석의 그 분이란 말에 정준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태 그분과 함께 해와 놓고 태천파를 거의 다 집어 삼키고 나자, 정준호의 머릿속에서 그분이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조폭의 양아치 습성이 어디 가지 않은 것. 부끄러운 듯 정준호가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거리자 양태석이 웃음 말했다.
“하하하하. 괜찮아. 우리가 하루아침에 보통 사람처럼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고쳐 나가면 돼.”
“네. 형님.”
“내일부터는 발로 좀 뛰자.”
지금까지 양태석은 아지트 안에서 전화로, 전 태천파 중간간부들을 설득해서 태석파로 영입했다.
태천파의 보스 자리가 양태천에서 양태석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보니, 별 잡음 없고 빠르게 권력이 양태석에게로 넘어왔다.
하지만 조직이란 게 어디 말만으로 장악할 수 있는 곳이던가?
직접 발로 뛰며, 그 중간간부들은 물론 그들 밑에 조직원들까지 알려 줘야 했다.
누가 그들의 진짜 보스인지 말이다.
“손대명에게 사신대 준비 시켜 두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가급적이면 너도 같이 가자. 내가 없을 때, 네가 조직을 이끌어 줘야 할 테니까.”
사실상 정준호를 조직의 2인자로 생각한다는 양태석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정주호의 입이 아주 귀에 걸렸다.
“이제 좀 자자.”
지친 얼굴이 역력한 양태석. 그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 * *
날이 밝고 먼저 일어난 정준호가 양태석을 깨웠다.
“형님. 일어나십시오. 8십니다.”
“으으음....벌써 8시야? 잠깐 눈 감았다가 뜬 거 같은데....”
“어서 씻고 출발하셔야합니다. 손대명과 사신대 애들이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뭐? 원래 몇 시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9시오.”
“미친....대명이에게 전화해서, 애들 밥이라도 사 먹이고 있으라고 해.”
“네. 형님이 그러실 거 같아서, 안 그래도 그러라고 대명이에게 말했습니다. 물론 제 말은 안 들어 처먹는 녀석이라서, 형님이 그러라고 했다고 거짓말 좀 했고요.”
“잘했어. 앞으로도 그런 거짓말은 자주 해.”
“네. 아아. 그리고 이태원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정준호의 이태원이란 말에 양태석이 좀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
“이태원? 박혜지 여동생 찾았데?”
“네. 이태원 클럽 근처 해장국 집에서 아침 먹고 있는 걸 조직원 하나가 발견한 모양입니다.”
“박혜지 여동생은 확실하고?”
“네. 그 조직원이 직접 그 여자에게 물었답니다. 이름이 뭐냐고? 그랬더니 그 여자가 자기 이름을 박혜주라고 확실히 밝혔답니다. 그리고 밥 먹고 바로 집에 간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뒀다고....”
“그 연락을 받은 게 언젠데? 10분 전쯤입니다.”
정준호의 그 대답을 듣고 양태석은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어어. 나야. 니 여동생 아침에 이태원 클럽 근처에서 찾았어. 어. 집에 간다고 했다던데. 좀 기다려 봐. 어. 뭘. 우리 사이에. 그래. 끊는다.”
정준호는 여동생 운운하는 양태석이, 누구에게 전화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근데 박혜지와 통화하는 동안 양태석의 표정이 너무 밝았다.
마치 연인이나 여동생과 통화 하듯 대화도 자연스러웠고.
‘하긴. 이제 형님도 짝을 찾아 정착하실 때가 되긴 했지.’
그러면서 정준호는 양태석의 짝으로 박혜지를 자신의 형수감 리스트에 몰래 올렸다.
그 사이 양태석이 세수만 하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면도야 이동 중 전기면도기로 얼마든지 깎을 수가 있었다.
요즘은 전기면도기가 워낙 잘 나와서, 면도칼로 깎는 것만큼이나 잘 깎였다.
위에애애애앵! 치치치치치칙!
차에 타고 손대명과 사신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양태석은 면도를 했다. 절삭력이 워낙 좋다보니, 금방 면도를 끝낸 양태석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진짜 잘 깎이네.”
“그렇죠? 비싼 놈이 비싼 값을 하더라니 까요. 형님. 저도 좀....”
“어어. 그래. 자아.”
양태석은 손에 들고 있던 전기면도기를 옆에 정준호에게 넘겼다.
그러자 정준호도 덥수룩하던 수염을, 양태석이 건넨 전기면도기로 깔끔하게 깎았다.
그렇게 정준호가 면도를 하고 있을 동안, 양태석은 또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어어. 민지야. 주말 잘 보냈어? 그분 경호 하는 건 어때? 뭐? 아직 가까이서 모시지 못하고 있어 뭐라고 말할 처지가 못 돼? 하하하하. 문대식이가 그쪽으로 좀 고지식한 면이 있지. 그래도....”
이번에 양태석이 누구한테 전화했는지 간파한 정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준호는 양태석이 예전 형수의 그늘에서 벗어나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처제였던 정민지가 양태석 주위에 얼쩡거리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연히 정준호의 형수감 리스트에 정민지의 자리는 없었다.
* * *
정민지는 주말 동안 푹 잘 쉬었다. 특히 일요일은 집에 콕 틀어 박혀서 먹고 자고, TV보고 또 먹고 자고 했더니, 아침에 출근 전 샤워 할 때 배에 복근이 사라지고 없었다.
“허얼....”
뭐 오늘부터 정식으로 백준열 대표 근접 경호팀원으로 일할 거라, 늘어난 뱃살이야 금방 빠질 것이다. 경호라는 게 기본적으로 서 있는 일이 대부분이라서, 서 있는 동안 체력적 소모가 엄청났다.
거기다 아침까지 굶고 간다면 주말 동안 찐 살은, 오늘 중에 다 분해 되어 체내에서 빠져 나갈 것이다.
그래도 빈속에 출근할 수 없었던 정민지는, 영양제와 함께 물을 한 컵 정도 마셨다.
그때 그녀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형부인 양태석이었다.
“....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양태석씨는 이제 나한테서 제발 신경 좀 끄셔.”
=알았다. 앞으로 사흘에 한 번씩만 전화하도록 할게.
“아니. 아예 하지 말라니....”
띠띠띠띠띠띠....
이제 그만 언니를 잊고 새 출발 해줬으면 좋겠는데 형부 양태석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 언니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자신을 챙기려는, 양태석의 마음이야 이해가 되지만, 누구에게도 민폐 끼치는 건 질색인 정민지였다.
그나마 매일 전화하겠다던 양태석이 그래도 마음을 바꿔서. 사흘에 한 번 한다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아! 늦었다.”
그때 벽시계를 보게 된 정민지. 그녀는 후다닥 집을 나섰다.
양태석과 전화하느라 10분을 소모한 것이다. 그것도 출근길에 10분을 말이다.
지금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근했다간 지각이 확실한 상황. 그런 그녀 눈에 웬 오토바이가 보였다.
“아! 맞다.”
토요일에 백준열 대표를 서울CC까지 데려다 주느라 이용했던 경호팀 소유의 오토바이였다. 원래는 토요일 당일, 바로 반납했어야 했는데 정민지가 바이크 좀 더 타겠다고 경호팀에 얘기하자, 경호팀에서 월요일에 가져 오라고 했었다.
근데 일요일에 집구석에 처박혀 있느라 깜빡했던 것. 오토바이 타고 출근한다면 늦을 이유가 없었다.
부아아아아앙!
정민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고, 원래 출근 예정 시간보다 10분 일찍 JYB엔터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오토바이는 건물 주차장에 주차 시켰고, 경호팀이 쓰는 1층 사무실에 오토바이 키를 반납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간 정민지.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정민지 요원.”
대표실로 들어가는 입구 앞 비서실에서, 그녀가 봐도 아름다운 울트라 캡숑 미인과 서로 인사를 나눈 정민지는 대표실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그 초미인 비서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경호팀원들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대표님은요? 출근 중이신가요?”
“네. 문 팀장님이 지금 이쪽으로 모시고 오는 중이라고 좀 전에 연락 받았어요.”
“네....”
정민지는 혼자 여기 있기 무안했던지 1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거기서 백준열 대표를 경호하고 있는 경호팀에 합류할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초미인 비서가 붙잡았다.
“정민지 요원. 그냥 여기 계세요.”
“네?”
“문 팀장이 정민지 요원이 먼저 출근해서 대표실로 올라오거든, 저보고 잡아두고 있으라고 했거든요.”
“그, 그래요?”
그 이유까지 초미인 비서인 김 비서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문대식 팀장이 여기 오면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정민지는 백준열 대표와 그를 경호하는 경호팀원들이, 대표실로 오기까지 대표실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 * *
CH그룹 백승호 회장이 입원 해 있는 가운데, 그 부인인 강경심 여사가 백 회장을 대신해서, 전 대통령 서재국의 문상을 가기 위해 채비를 할 때였다.
“엄마. 나도 같이 가.”
검은 정장을 잘 차려 입은 TVM대표 백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보고 기겁한 강경심 여사가 버럭 소리쳤다.
“야 이놈아. 어서 썩 들어가지 못해? 네 아버지 아시면 경을 치려고....”
“아버지 지금 병원 계시잖아? 나가고 싶다고. 집에만 있으니까 미칠 것 같아.”
“아이고 머리야. 니 아버지 너 때문에 지금 병원에 계신데....하아. 여기 있은 지 이틀이 됐니? 사흘이 됐니? 달랑 하루 있었다. 그런데 뭐가 미쳐?”
“아아. 난 몰라. 나 엄마 따라 갈 거야.”
제대로 사고를 친 백준기.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회사, TVM뿐 아니라 CH그룹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백승호 회장은 입원까지 하는 초강수를 뒀다.
그래야 동생인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이 문병을 올 것이고, 그때 잘 얘기해서 지금 삼명그룹이 목줄을 잡고 있는, 은행권 대출 문제를 해결 할 요량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