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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이광현처럼 전 직장에는 그만두겠다는 말도 일체 없이, 제멋대로 연락 끊어버리고는 새로 구한 직장에서 일해 버리면, 뭘 어쩌자는 건지 강기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 코디. 애들 데리고 먼저 들어가.”
“네.”
그래도 남들 보는 데서 얼굴 붉히기 싫었던지, 이광현이 먼저 코디로 하여금 핸썸 가이즈 멤버들을 데리고, 미용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너희들도 차에 가 있어.”
그걸 보고 강기석도 해피 걸스 리더 예나에게 차키를 건넸다.
그렇게 해피 걸스 멤버들이 주차장 주차 되어 있던 차로 출발하자, 이광현이 강기석에게 먼저 말했다.
“형이 쟤네들 도로 맡은 거야?”
그 물음에 강기석은 같은 물음으로 이광현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이광현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살아야지. 홍 대표 실종 됐다는데, 거기 더 이상 붙어 있을 이유도 없고.”
그러고 보니 이광현은 홍대복 대표의 낙하산이었다. 소문에는 홍 대표의 외가 쪽 인척이라던가?
강기석은 지금 와서 그게 맞는지 딱히 물어 보고 싶지도 않았다. 결과론적으로 이광현은 QH엔터를 떠났다. 그런 그와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내가 현장에서 너 보다 좀 더 오래 뛴 선배로 충고 하나 할까 해. 그래도 몇 년 동안 몸담았던 곳인데, 떠날 때 전화 한 통은 해 줘라.”
그 말 후 강기석은 딱히 이광현과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뒤돌아섰다. 그때 강기석을 향해 이광현이 말했다.
“그래도 이 바닥에 형보다 눈치 빠른 나도 충고 하나 할게. QH엔터 곧 망해. 그러니까 형도 거기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충고 고맙다. 잘 살아라.”
강기석은 이광현의 그 말을 듣고 굳이 돌아서서 이광현을 보고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뒤돌아서 계속 걸어가면서 무성의하게 그 말을 던졌고, 그걸 보고 이광현은 살짝 어처구니 없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기껏 강기석을 위해 해 준 말인데, 저런 식으로 무성의하게 받아드리는 강기석을 보고, 뭐 그렇다면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이다.
그렇게 강기석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해피 걸스가 타고 있는 차로, 이광현은 바꾼 소속사에서 그가 맡은 연예인들, 핸썸 가이즈들이 기다리고 있는 미용실 안으로 각자 들어갔다.
* * *
삼명그룹 백승렬 회장은 새로운 비서실장으로 이동훈을 내정했다.
삼명그룹 본사에만 비서실장을 노리던 임원이 십 수 명이나 됐는데, 외부 계열사의 임원이 떡하니 그 자리를 꿰찬 것을 두고, 삼명그룹 본사 내부에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했다.
그 중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주장이 바로, 백 회장이 이제 드디어 후계자를 지목하고, 그 후계자에게 실권을 넘기려 한다는 거였다.
그 과정에서 쳐 내야 할 가지들, 즉 현 백승렬 회장의 측근들을 가지치기 하려고, 본사 임원이 아닌 계열사 임원을 비서실장 자리에 앉혔으니, 곧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이뤄 질 거라고 말이다.
그래선지 삼명그룹 본사의 분위기는, 지금 흡사 폭풍 전야 같았다. 그걸 모를 백승렬 회장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할 일이 좀 많지?”
비서실장에 임명한지 고작 이틀 지났는데, 벌써 얼굴이 핼쑥해진 이동훈을 보고 백 회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했지만 그게 아니란 건 백 회장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 이동훈은 이틀 동안 한숨도 못자고 있었다. 저러다 큰일 날 것 같아서 백 회장이 말했다.
“일단 본가에서 가족끼리 하는 아침 식사자리는, 그것들 미국으로 떠나고 나면 하도록 하지.”
여기서 백 회장이 말한 그것들이란, 그의 이혼한 전처와 그 전처가 낳은 뻐꾸기 새끼, 즉 백지연을 말했다.
백 회장은 백지연이 자신의 성을 쓰는 것을 결국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백지연은 전처인 서지현의 성을 따라 서씨로 성과 본을 바꾸었다. 해서 이제부터 백지연은 서지연이 되어 있었다.
이동현은 그 모녀를 삼청동 저택에 사실상 가둬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것들 언제 떠난다고?”
“원래는 내일 떠날 예정이었는데 비자 문제로 며칠 뒤로 연기가 됐습니다.”
“그럼 가족 식사 자리도 다음 주까지 다 취소해. 그리고 내 지방 공장 순시도 마찬가지고.”
그 정도만 해도 이동훈이 하루 2시간을 잘 수 있는 짬은 생길 터였다. 하지만 사람이 매일 두 시간 자고 어떻게 사나?
“다음 주까지 수행비서 데리고 다닐 테니까 일 봐.”
비서실장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게 바로 회장을 직접 수행하는 일이었다. 그것만 빼줘도 이동훈은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잘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건 백승렬 회장이 특별하게 이동훈을 배려 해 준 것이다. 그러니 이동훈도 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백승렬 회장에게 전한 것이고.
“바쁜 거 알지만, 그래도 준열이 녀석하고 식사 한 끼 정도는 해.”
백승렬 회장이 무심한 듯 그 말을 이동훈에게 건넸다. 하지만 지금 이동훈에게는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백 회장 앞이라 대답은 했지만, 이동훈은 언제 어디서 백준열을 만나서 한 끼 식사를 할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 * *
강기석이 SVS 가요 순위프로그램인 ‘인기차트 100’의 PD 유석재와 통화 하고, 얼추 한 시간이 조금 넘은 시간.
드디어 해피 걸스가 SVS방송국 연예인 대기실에 들어갔다. 그 소식은 곧장 ‘인기차트 100’측에 전달되었고, 거기 FD는 나재희 PD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것들이....”
방송 리허설이 다 끝나가는 시간에 나타난 해피 걸스. 느긋하게 이 시간에 나오려면 탑 스타급, 혹은 국민 가수 정도는 돼야 한다. 그것도 탑 스타급의 경우는 10년차 이상으로다가. 하지만 해피 걸스는 탑 스타 급은커녕, 데뷔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나재희 PD는 오늘 제대로 푸닥거리를 해야겠다 싶었다. 적어도 매니저는 무릎 꿇리고 해피 걸스 멤버들은 질질 짜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다음부터 그녀가 부르면 재깍 달려오지.
연예인들도 따지고 보면 PD들이 길들이기 나름이었다. 초장, 즉 신인 때 잘 잡아 놓으면 그들이 탑 스타가 되어도, 그 PD 앞에서 눈치보고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가서 해피 걸스 리허설 무대 서라고 해.”
“네. 감독님.”
나재희는 PD님 보다, 자신이 감독님이라고 불리는 걸 더 좋아했다. 그걸 아는 FD는 그녀를 꼬박꼬박 감독님이라고 불러 주고 있었다.
아무튼 나재희의 지시에 해피 걸스 대기실로 간 ‘인기차트 100’의 FD. 그가 노크를 하자 안에서 웬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FD는 곧장 대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4명의 해피걸스 멤버들과 그녀들의 매니저가, 말 그대로 대기 중이었다. 누가 부르면 바로 나갈 수 있게 말이다.
“멤버 한 명 어디 갔습니까?”
FD가 아무리 봐도 대기실 안의 해피걸스 멤버는 4명뿐이어서 물었다. 그랬더니 매니저가 바로 대답을 했다.
“새로운 멤버 수빈이 오늘 많이 아파서 여기 못 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무대 동선이나 노래 파트 신경 더 써주시고, 지금 바로 리허설 하러 가실게요.”
“네에!”
FD의 말에 해피 걸스 멤버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듣던 것과 달리 해피걸스 멤버들의 사이가 다들 좋아보였다.
FD가 알기로 해피 걸스 멤버들 간의 갈등이 심해서 매일 같이 싸운다고 들었는데, FD가 직접 보니 순 헛소문이었다.
잠시 뒤, FD가 인솔해서 데려 온 해피 걸스가 녹화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런 그녀들을 나재희 PD가 곧 잡아먹을 거처럼,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들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그녀들에게로 다가갔다.
* * *
가요 프로그램에서 녹화를 위해 FD가 와서 사전 리허설 하러 녹화 현장으로 데려 가면, 매니저는 보통 대기실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강기석은 해피 걸스 멤버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녹화 현장에 들어선 강기석. 그런 그의 눈에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인기차트 100’의 나재희 PD가 보였다. 나재희 PD는 SVS방송국 내에서 개또라이로 유명했다.
“이 인간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저 미친년 좀 커버하라고 같은 ‘인기차트 100’의 PD인 유석재를 협박해 놨는데, 정작 그 인간이 녹화 현장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나재희 PD가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인, 해피 걸스 멤버들을 향해 걸어가는 게, 강기석의 눈에 보였다. 강기석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곧장 유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는 가는 데 유석재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사이 나재희 PD는 해피 걸스 멤버들 바로 앞까지 다가갔고. 바로 그때였다.
나재희 PD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 사이 해피 걸스 멤버들은 무대에 섰고, 곧 그녀들의 리허설이 시작됐다.
“휴우....”
그걸 보고 강기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때, 뒤늦게 유석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강기석은 바로 그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은 치워야지.”
그러면서 입고 있던 재킷 안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은 강기석.
그가 그 안에서 꺼낸 것은, 그가 만약을 위해서 챙겨 온 유석재가 ‘헤라’ 룸빵에서 연예소속사 사장과 벗긴 호스티스 팬티를 머리에 쓴 체, 그 팬티 벗긴 호스티스를 테이블 위에 눕혀 놓고서, 그 짓을 하는 장면이 제대로 찍힌 사진이었다.
아마 이 사진을 방송 관계자, 특히 높으신 임원 분이 보신다면 유석재 꼴이 볼만해 질 것이다.
이때 뒤늦게 해피걸스가 대기실에 왔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유석재. 그가 부랴부랴 그 대기실로 강기석을 찾아 갔을 때, 거기 대기실은 이미 비어 있었다.
“벌써 리허설 갔나?”
그는 쪼르르 ‘인기차트 100’의 녹화 현장으로 갔다. 그렇게 그가 막 녹화 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뭐, 뭐야?”
불길한 느낌이 강하게 든 유석재. 그런 그의 눈에 반대편 녹화 현장 출구로 나가는 강기석이 보였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해피 걸스의 리허설이 막 끝난 거 같아 보였고. 그때 방송실에서 해피걸스의 리허설 장면을 보고 있었던, 나재희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았어요. 이대로 가면 될 거 같네요.
무슨 일인지 갑자기 개또라이 나재희가 나긋나긋해졌다. 당연히 해피 걸스가 오면 가만 안 둘거 같았던 나재희가, 물어뜯어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해피 걸스를 칭찬한다고?
“아아!”
하지만 지금 유석재에게 중요한 것은 해피 걸스도, 개또라이 나재희도 아니었다.
바로 강기석. 녀석이 왜 녹화 현장에서 방송국 로비로 가는 출구로 나갔냐는 것이다.
그의 담당 연예인들인 해피 걸스는 녹화 장에 있는데 말이다.
“좆같은 XXX....”
유석재는 또 소름이 돋자 욕설과 함께 그때부터 뛰기 시작했다.
* * *
강기석이 SVS방송국에 지금까지 몇 번이나 와 봤겠는가? 많게는 하루 3번도 여기 온 적이 있는 강기석이었다.
그런 그가 어디로 가면 방송국 임원들이 많은지 모를 리 없었다.
마침 녹화장과 방송국 로비는 가까웠다. 녹화장 옆문을 통해 나가서 쭉 직진하면, 5분이면 방송국 로비에 도착했다.
강기석은 자신의 말을 우습게 여긴 유석재를, 이번 기회에 SVS방송국에서 내 보내 버리기로 작심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나재희 PD가 누구 전화를 받았는지 알고 나서였다.
나재희 PD는 예능 국장의 전화를 받고 나서, 해피 걸스를 향하고 있던 쌍심지를 바로 풀었다.
그리고 그 예능 국장을 움직여서, 나재희 PD의 폭주를 막게 만든 사람이, 바로 JYB엔터의 김효석 실장이었고.
그러니까 유석재보다 훨씬 유능한 나재희 PD라는 새로운 인맥이 생긴 상황에서, 이제 유석재 같은 무능하면서 돈과 여자나 밝히는 작자는 필요가 없어 진 것이다.
오히려 유석재는 나재희가 ‘인기차트 100’을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서 적폐이자 고인물, 그러니까 거추장스런 존재일 뿐이었다.
로비에 들어선 강기석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면서, 어디로 갈지를 두고 잠시 고민을 했다. 그때 로비로 깐깐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보였다.
“저 사람은....”
바로 SVS방송국 편성본부장인 하일석이었다. 하일석은 기자 출신 아나운서로 SVS뉴스 데스크에 10년 동안 앉았었고, 그 후 보도본부에서 시사제작국을 이끌다가, 작년에 편성본부장이 된 인물인데, 성격이 장난 아니었다.
그러니까 SVS방송국에는 3대 개또라이가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개또라이가 바로 이 하일석이었다.
특히 방송국 비리를 보게 되면 절대 못 넘어갔다.
그래서 SVS방송국에서는 비리를 걸려도 감사실에 걸리지, 하일석에게는 걸리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됐다.”
강기석은 흡족하게 웃으며 하일석을 따라 움직였다. 로비를 쭉 통과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 하일석.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강기석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하일석이 편성본부장 실이 있는 7층을 누르자, 강기석은 바로 그 밑 6층을 눌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였다.
강기석의 눈에 엘리베이터 밖에서 강기석이 탄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오고 있는 유석재가 보였다. 하지만 유석재의 다리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리고 닫힌 엘리베이터는 쭉 위로 올라갔고, 잠시 후 6층에 도착했다.
-딩동! 6층입니다.
촤르르르!
강기석은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곧 닫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슬쩍 사진 한 장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옆에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그쪽으로 움직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때 엘리베이터 맞은편에 위치한, 비상계단 쪽 문이 벌컥 열리면서 유석재가 나타났다.
“헉헉헉헉....”
죽자 살자 계단을 뛰어 올라 온 모양이었다. 유석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강기석에게 물었다.
“무슨 짓....한 거 아니지?”
“....”
강기석은 대답 대신 웃으며 어깨만 으쓱 거렸고, 마침 6층에서 멈춰서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를 쫓아서 유석재도 따라 들어왔지만, 엘리베이터 안에 SVS 방송 관계자들이 있어서, 그들 눈치 보느라 유석재는 강기석에게. 대 놓고 묻고 싶은 걸 제대로 물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