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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주경찰청에 사이버수사대가 웬 말이냐고 했다가는, 보나마나 또 경찰차장에게 죠인트 까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정재욱이 입 꾹 다물고 있었는데....
“네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경찰차장이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그 사이버수사대의 대장 자리를, 정 과장이 맡는 게 어떠냐 이 말이야. 어때? 잘 할 수 있겠지?”
이게 말이냐 방구냐? 당연히 못하지. 망할 거 알면서 뭐 하러 그런 사업을 시작한단 말인가?
“차, 차장님. 저는 사이버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서....”
그 자리는 당연히 그 방면으로 관심 있고, 능력 있는 인사가 맡아야 했다.
“책임자 자리에 아는 게 무슨 상관인데? 엊그제 국민연금 이사장에 누가 앉았는지 너도 알잖아? 그 양반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었던 거. 그런 사람이 국민연금에 대해 뭘 안다고 그 자리 앉았겠어?”
“하지만 저는....”
“아아. 됐고. 일단 사이버수사대 창립에 대한 자료부터 모아서 보고서 빨리 작성 해.”
경찰차장은 기어코 자신에게 사이버수사대를 맡길 모양이었다. 질끈 입술을 깨문 정재욱. 그걸 보고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경찰차장.
경찰차장이 원하는 게, 그의 속내가 또 빤히 보이니, 정재욱은 경찰차장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 싫었다. 그런 오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정재욱은 경찰차장에 대한 분노를 억눌렀다.
정재욱은 꽉 깨물고 있던 입술을 풀고 경찰차장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죠.”
경찰차장은 정재욱이 순순히 그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더 하실 말 없으시면 저는 이만....”
“그래. 가 봐.”
정재욱이 차장실을 나서고 나자, 경찰차장은 깍지를 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법 버티네. 역시 매형 말이 맞아. 우습게 볼 놈이 아냐.”
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경찰차장. 그가 흡족한 얼굴로 좀 전 정재욱이 주고 간 보고서를 챙겨 들었다.
“이런 쪽으로는 또 능력이 있네.”
정재욱이 만든 보고서가 아주 마음에 드는 듯, 그 보고서를 한 번 더 살피던 경찰차장. 그는 그 보고서에 몇 가지 수정 작업을 거쳤다. 그러자 정재욱이 만든 보고서가, 자신이 만든 보고서로 싹 둔갑했다.
경찰차장은 그 보고서를 챙겨서 제주경찰청장실로 향했다.
이번에 유임되면서 사람이 180도 돌변한 제주경찰청장 유만식을 만나러 말이다.
* * *
실질적으로 은퇴를 앞두고 있었던 유만식 제주경찰청장.
그런 그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던 수사과장 최철호를, 유만식은 제주경찰청장에 유임되자마자 화끈하게 밀어주었다.
“좋아. 제주도에 중국 조폭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 하자고.”
“네. 제가 확실히 정리해 보이겠습니다.”
“그래. 최 과장 능력이야 내가 믿지. 팍팍 밀어 줄 테니까, 외압 따윈 신경 쓰지 말고,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사하고, 불법이면 좌고우면 하지 말고 다 잡아들이라고.”
“네. 뭐....”
대답은 했지만 유만식의 의혹이 넘치다 못해서 뻗치고 있자, 최철호는 오히려 그게 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걸 모를 유만식이 아니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이라고,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네. 그러다 내려가면 그만이고. 자네도 그렇게 하면 돼. 자아. 이제 문제 있나?”
“아닙니다. 문제없습니다.”
유만식이 좀 전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최철호가 아니었다. 그는 이번 일에 직을 걸었고, 그걸 맡아 법을 집행해야 하는 최철호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따르면 될 일이었고.
“그럼 가 봐. 바쁘잖아?”
“네.”
유만식은 최철호가 청장실을 나가는 걸 흐뭇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뒤이어 그를 찾아 온 작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거 같았다. 얼굴부터 살벌하게 일그러지는 게 말이다.
“차장이? 무슨 일로?”
-보고 드릴 게 있다고 하십니다.
“들여보내.”
잠시 후 진짜 보고서를 들고 나타난 배도철 경찰차장.
“앉게.”
유만식이 자리를 권하자, 그 자리로 쪼르르 와서 앉는 배도철을 보며, 유만식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가 또 무슨 꿍꿍이로 여길 찾아 온 거지?’
하지만 유만식의 의심과 달리, 배도철은 정말 별거 아닌 일로 청장실을 찾아왔다.
“이것 좀 보십시오.”
배도철이 내미는 보고서를 받아 든 유만식. 그가 그 보고서를 살피기 시작한지 10여분 뒤, 정신없이 그 보고서에 빠져 있던 유만식이, 놀란 얼굴로 배도철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이걸 정말 자네가 작성했다고?”
“네. 작년부터 쭉 생각해 오던 프로젝트인데 어떻게 쓸 만해 보입니까?”
“이건 쓸 만할 정도가 아닌데? 거의 혁신적이야. 스마트 치안이라니....”
“그래서 말인데 그 프로젝트를 저희 청에서 가장 먼저 시범 운영해 보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이걸 맡아서 운영해 나갈 인재가 우리 청에 있을까?”
“있습니다. 그런 인재가.”
“그게 누군데?”
“형사과장 정재욱이요.”
“뭐?”
“정 과장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맡겨만 달라고.”
“그래?”
당연히 정재욱은 배도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배도철이 그렇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네. 그래서 일단 사이버수사대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만들고....”
“잠깐! 사이버수사대라니?”
“그래야 다른 청에서 눈치를 채지 못하죠. 대 놓고 스마트 치안대라고 해 보십시오. 다른 청에서도 이거 따라한다고 난리 날 텐데. 괜찮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좋아. 자네 말대로 사이버수사대라고 하고 조직부터 갖춰 봐.”
‘됐다.’
제주경찰청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배도철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그는 이번 일로 일타쌍피를 노렸다. 하나는 정재욱으로 하여금 사표를 쓰게 만드는 거고, 또 하나는 정재욱이 낸 프로젝트로, 경찰조직에 대박 한 번 제대로 터트려서, 이왕가는 서울 길을 꽃길로 만드는 거 말이다.
* * *
김효석 실장에게 QH엔터의 주식을 살 수 있게 탄알, 즉 자금을 제공해 주고 나서, 현재 내 자금 상황을 확인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더블 더블유(WW)엔터테이먼트를 인수합병하기 위해서, 안 그래도 꽤 많은 자금을 쓰고 있었다. 거기다가 곧 서진그룹과도 한판 붙어야 하는데, 당연히 실탄은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 했다. 물론 그 실탄을 쓸지 안 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전쟁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가급적이면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과 좋게 풀어 나갈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가는 건 아니다. 그랬다간 김명진, 그 양반이 나를 얕잡아보고 덤벼 들 테니까.
내가 볼 때 서진그룹 김명진 회장도 마찬가지 일 거다. 아마도 그가 협상 테이블에 나온다면, 그때는 백퍼센트 나와 싸울 생각을 하고 나온 거라고 보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 좋게 해결을 보려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그쪽이 내게 숙여야 하는데, 그렇게 할 김명진 회장이 아니다.
“한마디로 곧 서진그룹과 붙는다고 보면 되겠네.”
즉 지금 내게는 실탄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실탄을 채워 줄 존재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김 비서. 태석규. 지금 뭐하고 있는지 알아 봐.”
인터폰으로 김 비서에게 그 지시를 내리고, 어떻게 태석규의 우주그룹 비자금을 털어 먹을지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김 비서가 인터폰이 눌렀다.
삐이이익!
-대표님. 태석규 사원. 지금 데뷔 조 신인 걸그룹 로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매니저?”
-네. 적성 검사 결과 매니저 일이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와,서 그쪽으로 배치 된 걸로 압니다.
“알았어.”
비자금이란 세금 추적을 할 수 없도록 특별히 관리하여 둔 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무역과 계약 따위의 거래에서 관례적으로 생기는 리베이트와 커미션, 회계 처리의 조작으로 생긴 부정한 돈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우주그룹이야 원래 비리의 온상인 기업이었고, 그런 곳에서 은밀히 관리해 온 비자금이라면, 그 액수가 엄청날 거였다.
문제는 태석규도 모르는 그 우주그룹 비자금을 내가 어떻게 털어 먹을 것이냐 인데....
“우선 태석규 한테 그 비자금의 단서부터 찾아내야겠지.”
그러려면 태석규를 만나야 했다. 나는 다시 김 비서에게 인터폰을 통해 말했다.
“김 비서. 데뷔 조 신인 걸그룹이 지금 뭘 하고 있지?”
-그쪽 스케줄을 보면....지금은 청담동에서 필라테스 수업을 받는 걸로....
“지금 나갈 테니까. 차 대기 시켜.”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부딪쳐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게, 정 떠오르는 비책이 없으면, 태석규에게 견신 시스템의 능력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태석규를 내 충견으로 만든 뒤에....’
「개목걸이」아이템을 착용시키면, 태석규가 무의식중에 자신의 숨겨 둔 비리나 약점을 내게 술술 다 불다가, 자신이 그 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던, 비자금을 숨겨 둔 곳에 대한 단서를 나에게 얘기할 수도 있었다.
“시간도 없는데 그냥 바로 그 방법을 써야겠군.”
생각해 보니 그게 먹힐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래서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밖에 나갈 준비가 끝나자 바로 대표실을 나섰다.
* * *
청담동에 위치한 크리스털 빌딩.
그러니까 저 35층의 고층 빌딩이 내 꺼 라고 한다. 백준열의 기억에 따르면 말이다.
저 빌딩 14층에 위치한 필라테스 학원에서, 지금 JYB엔터의 데뷔 조 신인 걸그룹 멤버들이, 열심히 필라테스 수업을 받고 있단다.
“걸그룹 이름이 뭐라고 했지?”
“레드문입니다.”
나는 여기 올 때 김 비서를 데리고 왔다. 아무래도 걸그룹 멤버들을 만나야 하니, 나를 비롯해서 문대식의 경호팀원들까지, 전부 수컷들만 우르르 몰려가면 애들 쫄까 봐서.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로드 매니저라면 지금 레드문이라는 데뷔 조 신인 걸그룹 멤버들이 필라테스 수업 받고 있는 학원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 비서. 로드 매니저는 차 지키는 게 일이지?”
“네.”
뭘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며 나를 슬쩍 흘기는 김 비서. 그런 그녀에게 태석규 로드 매니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지금 크리스털 빌딩 지하 주차장 3층에서 대기 중이라는데요?”
“그래?”
나는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하고 옆에 문대식을 보고 말했다.
“들었지? 지하 3층으로 내려가.”
그렇게 나는 내 소유의 빌딩 지하 주차장 3층으로 내려갔다. 김 비서의 연락을 받고 차 밖에 나와 있던 태석규.
“대표님!”
그가 내가 차에서 내리자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어때요? 일해 보니까?”
그런 그에게 다가가며 내가 묻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할 만 합니다. 아니. 일이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내가 알던 그 태석규가 맞나 싶게 그의 얼굴은 밝았고 활기에 차 있었다. 진짜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을 찾은 거 같아 보였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잠깐 차에 들어가서 얘기 좀 합시다.”
나는 태석규와 단 둘이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태석규가 모는 승합차 안으로 둘만 들어갔다.
“뭔데?”
그렇게 차 안에 둘만 남게 되자, 태석규가 자연스럽게 내게 반말을 했다. 나도 지금은 경황중이라 태석규가 대표인 내게 반말을 하는 게 전혀 신경 거슬리지 않았다.
“뭐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묻고 싶은 거? 그게 뭔지 말 해봐.”
나는 태석규에게 「개목걸이」아이템을 쓰기 전에, 그를 먼저 내 충견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랬더니 견신 시스템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울려왔다.
-태석규는 이미 당신의 충견입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저번에 견신 시스템이 태석규를 충견으로 삼으라고 했던 걸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더 망설일 거 없이 바로 「개목걸이」아이템을 태석규에게 사용했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개목걸이」아이템이 태석규의 목에 채워졌다.
“으으음....”
순간 태석규의 두 눈에서 활발히 움직이던 동공이 갑자기 멈췄고, 동시에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서 낮게 침음 성이 흘러나왔다.
-우주그룹 비자금의 출처를 아는 태석규가, 당신이 묻는 말에 무엇이든 사실대로 대답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견신 시스템의 말이 들려오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태석규에게 물었다.
“이봐. 우주그룹 비자금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 있으면 다 얘기 해 봐.”
태석규는 비자금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그에게 비자금의 출처를 대 놓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우주그룹 비자금에 대해 아는 걸 다 말해 보라면....
‘비자금이 있는 곳의 단서가 될 만한 얘기를, 내가 들을 수 있을 공산이 크다는 말이지.’
나는 태석규가 떠벌리기 시작한, 우주그룹의 비자금에 대한 정보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들었다.
“....라던데 그때 마다 아버지가 몰도바의 카시나우를 가셨거든. 거기가 그렇게 좋나 해서 알아봤더니, 별거 없던데 말이야. 뭐 거기 여자라도 하나 숨겨 둔 거겠지. 거기 미인들 죽여준다고 하잖아. 아무튼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비자금을 맡아서 관리를 해 온 건 맞는 거 같은데....”
태석규의 얘기에서 나는 태석규의 선친이 몰도바에 여자를 숨겨 둔 게 아니라, 거기에 비자금을 숨겨 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뒤로 태석규가 떠들어 대는 말은, 내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