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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면 해
백 회장이 힐끗 김영도 실장의 국밥 그릇을 쳐다봤다.
“자네도 다 먹은 거 같은데 그만 일어나지?”
“네.”
백 회장의 말에 두어 스푼 남은 국밥 그릇에서 숟가락을 빼내서, 바로 테이블에 내려놓은 김영도.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꿈뜨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백 회장이, 바로 방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홀 쪽을 향해 소리쳤다.
“현석아. 회장님 나가신다.”
그러자 홀 쪽에서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네. 차 빼 오겠습니다.”
그렇게 김영도가 직접 백 회장을 모시고 국밥 집을 나섰고, 늦지 않게 김현석이 차를 몰고 왔다.
“타십시오.”
김영도가 바로 차 뒷좌석 문을 열자, 백 회장이 별 말 없이 차 안에 탔다.
그러자 김영도는 알아서 백 회장 옆자리가 아닌 김현석의 옆 자리, 그러니까 그 차 조수석에 탑승했다.
“출발 하겠습니다.”
김영도의 말에 백 회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뒤돌아서 확인한 김영도가 운전석의 김현석에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현석이 차를 출발 시켰다. 그때 백 회장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앞쪽에 말했다.
“본가로 가지.”
“본가요? 네. 알겠습니다.”
백 회장이 본가로 가자는 말에 김영도가 살짝 의아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서울에 다다랐을 때, 백 회장이 이동훈 실장과 잠깐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백 회장이 본가 운운한 게 생각이 난 김영도. 아마 그때 백 회장이 이동훈 실장에게 시켜서, 그들에 대한 처분을 본가에서 내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김영도는 속으로 백 회장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가만있으면 회장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챙겨 주실까?
자기 주제도 모르고 회장 자리를 탐하다니....
원래 반란이란 게 성공하면 왕좌에 오르지만, 실패하면 자기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씨 몰살을 면키 어려웠다.
그러니까 백준경과 백준호는 지금 그들 뿐 아니라, 그들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치게 된 것이다.
물론 백승렬 회장이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이번 일을 처리하지는 않을 테지만, 김영도는 적어도 백준경과 백준호의 가족들만큼은 위리안치(圍籬安置) 정도의 처분을 받을 거라 확신했다.
위리안치란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걸 말하는 데, 한마디로 다시는 삼명그룹에 기웃거리지도 못하게 만들 거란 얘기다.
삼명가의 적자들이 삼명그룹에 전혀 관혀 할 수 없다는 게 무슨 소리겠나? 그냥 앞으로 평범하게 살다 죽으란 얘기였다.
“으음....”
뒤에 앉은 백 회장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걸 들으며 김영도는 더 확신했다. 백준경과 백준호를, 오늘 이후로 그가 다시 보는 일이 없을 거란 걸 말이다.
* * *
삼명가 본가까지 차가 막힘에도 불구하고 40분 만에 도착했다. 그런데 차가 저택 대문 앞에 멈춰 섰음에도 불구하고, 백 회장은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만큼 백 회장도 지금까지도 생각 중이었다. 그만큼 그 고심이 크다는 걸 김영도는 알 수 있었다.
‘하긴 자식 문제니....’
만약 사업이었다면 백 회장은 이런 식이 장고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고 후에 꼭 악수를 둔다는 걸,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장고에 장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기 혈육, 그것도 자기 자식의 잘못에 대한 처분을 내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차 안에 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백 회장은 10분 정도 고민하다가 그제야 결정을 내린 듯,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김영도에게 말했다.
“....크으음....내리지.”
그러자 김영도가 차에서 내려서 바로 백 회장의 차문을 열어 주었다.
백 회장은 차에서 내렸고 그런 그 주위에 삼명그룹 경호원들이 즐비해 있었다.
왕이 자기 집에 왔으니 이런 왕 다운 위용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 회장의 옆은 여전히 김영도 실장의 몫이었다.
어떤 경호원도 감히 김영도 실장 근처에 범접하지 못했다. 김영도는 자신이 왜 경호실장인지를 증명하듯, 주변에 수십 명의 경호원들을 손짓과 눈짓 하나로 지휘하면서, 백 회장을 삼명가 본가 안으로 정중히 모셨다.
“회장님!”
삼명가 본가 안에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서 백 회장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 맨 앞에 김 집사가 제일 먼저 숙였던 허리를 펴며 말했다.
“큰 도련님 사모님은 서재에 모셨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두 분 다 이쪽으로 오고 계신 걸로 압니다.”
백 회장이 삼명가 본가에 온 이상, 모든 일은 김 집사에게 보고가 돼야했다. 그러니까 이 집 안에서 일은 모든 게 김 집사를 거쳐서 백 회장에게 보고가 되는 거다. 따라서 백 회장은 모든 걸 김 집사에게 묻고, 그에게 지시를 내리면 됐다.
즉 지금 김 집사는 백 회장에게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꿰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대충 윤곽을 잡고 있고 말이다.
백 회장은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고 보약을 먹은 뒤,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는 백준경의 부인이자 백 회장의 큰 며느리인 심미나가 창백한 얼굴로 응접 소파에 앉아 있다가, 백 회장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감히 백 회장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으음....”
그런 그녀를 보고 백 회장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응접 소파 쪽이 아닌 책상 쪽으로 가서 책상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로 앉았다. 그러자 심미나가 눈치껏 쪼르르 백 회장이 있는 책상 쪽으로 다가와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살려주세요.”
그런 그녀를 보고 분기탱천한 백 회장이 소리쳤다.
“네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건 알고 있구나!”
“....”
심미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기 남편과 시동생과 같이 공모해서, 시아버지와 막내 시동생을 제거하려 했다가, 실패한 마당에 무슨 할 말이 있겠나? 그저 눈앞에 서슬 퍼런 시아버지가 그녀를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심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짝 엎드려 있었다. 여기서 말 실수 하나가 자칫 그녀와 그녀 자식들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침묵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리고 그 상책이 먹혀 든 모양이었다.
“하아....나가라. 네 아들들 데리고.”
“네?”
아들들이란 말에 그제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드는 심미나. 그런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백승렬이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미국에서 네 아들들 키우고 평범하게 살아라.”
“....”
백승렬 회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은 심미나. 그녀가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그걸 본 듯 백 회장이 가소로운 듯 웃으며 말했다.
“왜? 네 아들들....어미 없는 자식으로 크게 만들어 줄까?”
백 회장의 그 말에 심미나가 움찔 하면서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다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버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아니. 앞으로 나는 너와 모르는 사이다. 그러니 아버님이란 말도 다신 쓰지 말거라. 그건 네 자식들도 마찬가지고.”
“네....”
백 회장이 완전히 백준경의 처자식과 손절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심미나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서재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늦었다.
백 회장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고 아마 늦어도 내일이면 심미나와 그녀의 두 아들들은 타국에 가 있겠지.
“미국으로 가라. 준비는 다 되어 있을 거다. 그만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백 회장의 축객 령에 심미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서 비틀거리며 서재 밖으로 나갔다.
백 회장은 그런 그녀 모습을 한 동안 측은한 듯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창가로 돌리더니 질끈 두 눈을 감았다.
* * *
김 집사는 심미나가 서재를 나오며 휘청거리자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심미나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다.
“두 분 도련님들은 이미 차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그쪽으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김 집사의 그 말에 심미나가 안 그래도 붉게 충혈 된 문을 부릅뜨고 김 집사를 쏘아보았다. 마치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 같이 매섭게, 하지만 노회한 집사는 그런 심미나의 눈길을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회피해 버렸다. 그러자 부르르 치를 떨던 심미나.
그녀가 김 집사의 손을 뿌리치고는 똑바로 걸어서, 집안에서 차고로 내려가는 통로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김 집사가 비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직 주제 파악이 덜 됐군.”
아무리 왕족도 반역죄로 왕궁에서 쫓겨나면 일반인이나 다를 게 없었다.
김 집사는 백 회장이 심미나와 그녀의 두 아들들에게 취하게 한 조치를 보고 지레짐작했다.
그녀와 그녀가 낳은 두 아들들을 그가 이 집에서 다시 볼 일 따윈 없을 거란 걸 말이다.
김 집사가 그렇게 판단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백 회장이 심미나의 두 아들들에게서 백씨 성을 뺏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 미국에서 심미나의 두 아들들은 백윤호와 백윤재가 아닌 심윤호와 심윤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들에게 김 집사가 심력 낭비해 가며 잘해 줄 필요는 없는 셈인 것이고.
“첫째 도련님 오셨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방금 막 심미나와 그녀의 두 아들들이 인천 공항으로 출발했는데, 바로 이어서 그 아비인 백준경이 오다니 말이다. 정확히는 잡혀 온 거지만.
“아버지. 전 진짜 몰랐어요. 이건 다 준호 녀석이....”
백준경은 백승렬 회장 앞에서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자신은 몰랐다고 말이다.
하지만 김 집사가 받아 놓은 백준경이 주도해서, 백 회장과 백준열을 죽이려 한 증거들이 나오자, 결국 심미나처럼 백준경도 백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않은 백준경은 심미나처럼 백 회장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 하지는 않았다.
“쯧쯧쯧....”
그런 백준경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백승렬 회장이 말했다.
“울릉도 지사로 가거라.”
“네?”
울릉도라는 말에 번쩍 고개를 쳐드는 백준경. 자신이 백 회장의 말을 분명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 아버지. 울릉도 지사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거기서....나오지 말고 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
“....”
그러니까 울릉도라는 그 좁은 섬에 갇혀서, 평생을 거기서 살다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듯 백준경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따지듯 백 회장에게 말했다.
“아니.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섬에다 처박아요. 전 그렇게 못합니다.”
하지만....백 회장의 결정을 내려졌고 그가 자기 말을 다시 번복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백준경의 의중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밖에 뭐하나? 치우지 않고.”
백 회장은 자기 할 말을 다 했고, 더는 백준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백 회장의 말이 떨어지자 대기 중이었던 삼명그룹 경호원들이 우르르 서재 안으로 들어와서 백준경을 밖으로 끌어냈다.
“안 돼....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백준경은 당연히 몸부림을 쳤다. 여기서 끌려나가면 그가 갈 곳은 진짜 울릉도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쓸쓸하게 늙어 죽겠지. 그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떡하든 이 자리에서 백 회장의 결정을 번복 시켜야 했다. 하나....
“이거 놔. 이새끼들. 내가 누군지 몰라?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너희들을 절대 가만 안 둬.”
백준경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우악스런 경호원이 여섯이나 달라붙어서, 그를 사지와 머리, 허리를 붙잡고 들자, 결국 어쩌지 못하고 그들에게 달랑 들려서 서재 밖으로 나오게 된 백준경.
“으아아아악!”
그가 처절하게 울부짖었지만 서재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우웁!”
서재 밖으로 나오자 더는 백 회장 눈치 볼 일이 없었던 경호원들. 그들 중 하나가 백준경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고 그 입을 두툼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빨리 가자.”
그렇게 조용해진 백준경은 삼명가 본가에서, 곧바로 삼명그룹 본사로 옮겨졌다.
두타타타타타타!
그리고 삼명그룹 본사 옥상의 헬리포트에 대기 중인 헬리콥터로 끌려갔다. 그리고 헬리콥터에 태워지자 백준경의 막고 있던 입도 풀렸다.
“안 돼. 이거 놔. 내릴 거야. 나 안가. 나 죽어도 거기 안 간다고....으아아악! 사람 살려!”
백준경은 처절히 울부짖었지만 무정한 헬기는 그대로 이륙했고 동쪽, 그러니까 동해 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고 쭉 하늘을 날아갔다.
두두두두두두두!
백준경을 태운 헬기는 정말이지도 무심하게,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별 문제 없이 날아서, 두 시간 쯤 뒤 울릉도 헬리포트에 조용히 안착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백준경은, 그때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 자기 발로 헬기에서 내렸다.
“가시죠.”
“....”
앞으로 그에게 감시조로 붙을 울릉도 지사 직원들이, 미리 나와서 그를 데리고 아주 은밀하게 울릉도 지사 사옥으로 향했다. 말이 사옥이지 그 건물 주위로 높다란 철책이 둘러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