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 그녀를 위한 모험가의 사교육 -1-
아카데미에는 기사학부든 검술학부든 마법학부든 피할 수 없는 이론과목이 몇가지 있다.
제국의 역사.
1학년때 유일하게 전 학부생들이 모이는 수업이다.
년도와 사건- 관련인물 등 외울게 워낙 많다보니 한번이라도 놓치면 복습하는 것도 골이 아파진다.
최고로 많은 인원이 모이지만 옅은 숨소리와 분필 소리만 들리는 아주 조용한 수업이다.
그 제일 뒷자리에는 자연스럽게 1학년의 중심이 된 로버트가 자리하고 있다.
-
로버트는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리케를 보았다.
강의실 제일 뒷자리에 무리를 이루어 자리를 잡으니 리케가 한눈에 들어왔다.
리케를 따라다니는 빨간 꼬맹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이참- 로버트 듣고있어?"
"응. 당연하지."
여자들에게 간단히 대꾸해주며 오늘 보았던 리케의 모습을 생각했다.
평소 로봇이나 다름없어 보이던 그녀에게서 오늘은 보기만하면 누구나 알법한 감정이 느껴졌다.
초조함? 기대감?
상반된 두가지가 섞인 느낌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걸까.
'지금 시간이···.'
수업 시작까지 아직 여유가 있다.
로버트는 주시하고 있던 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걸 보고 혼자서 뒤따라 나섰다.
따라나오려는 친구들을 겨우 떼어내고 복도로 나왔다.
손만 씻은 것인지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그녀에게 로버트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찌질했던 내가 아니다!'
인간의 천성이란 그리 쉽게 변하는게 아니지만.
아직도 남들 앞에 서는건 두렵고 사람들과 말을 하다보면 신이나서 선을 넘거나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몸은 용서받는다.
어디에 있어도 시선을 사로잡는 조각상 같은 얼굴에 뛰어난 신체능력.
거기에 신에게 사랑받는 증거- 비범하기 그지없는 스킬들.
'여기서 나는 꿀릴게 없어···당당해도 된다.'
이건 첫 단추의 중요성이다.
아직 그녀만큼 자신의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는 없다.
지금 자신의 주위에 자리한 여성들은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건 척 봐도 알수있는 사실.
하지만 그건 스킬에 의한 작용이 아닌가?
스킬이 없었다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건 진실된 사랑인가?
그 사실을 한번 고민하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생각이 물고 늘어졌다.
전생에서도 하지못한 첫 연애는 불순물이 없는 상황에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상태로 시작하고 싶다.
나머지 여자는 쾌락만을 목적으로 해도 좋으니.
마음에 걸리는 경우의 수를 하나씩 지워나갈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건 자신의 약혼자였다.
판타지 세상에 떨어지고 처음 만난 운명.
스킬에 의존하지 않았던 짧지만 순수한 관계.
주위의 여자들은 팔고있는 상품처럼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지만.
리케는 판매하지 않는 한정판 처럼 멀리 벗어나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소꿉친구 아닌가? 약혼이 가미 된.'
자신이 살았던 전생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최고의 요소들.
그 태그를 그냥 놓치기에는 하나하나가 너무 매력적이다.
단 하나, 얼굴에 난 상처가 아쉽지만 그 정도는 가문의 힘으로 교단에 부탁하면 고칠 수 있는 범위다.
로버트는 그녀의 지척에 다가갈수록 가슴이 두근두근 해지는걸 체감했다.
"흠흠-"
"?"
리케의 근처에서 헛기침으로 시선을 끌자 그녀는 로버트를 잠깐 보더니 강의실로 돌아가려했다.
'···그냥 간다고?'
여자 생도중에 자신이 말을 걸었을때 웃지않은 자가 없었다.
옆에서 소리만 내도 자신에게 먼저 대화를 걸어온다.
그것은 이때까지 변하지 않았던 불변의 진리.
"자,잘지냈어?"
든든하게 믿고있던 스킬이 먹히지 않는 것에 당황한 로버트가 말을 더듬으며 리케를 불렀다.
그녀는 주위에 자신밖에 없다는걸 알고 돌아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네."
"힘든 일은 없고? 내 도움이 필요하거나 곤란한게 있으면 도와줄게 말만해!"
당장 얼마전까지만 해도 리케는 썩어버린 줄이라도 가리지 않고 잡아야 할만큼 인생이 막장으로 몰려있었다.
원래라면 저 말에 혹하여 낌새를 보이고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이미 이야기는 틀어졌다.
"리케! 안들어가고 뭐해?"
로버트는 대화 도중에 끼어드는 빨간머리 소녀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수업이 곧 시작인데 지금 뛰어온건지 그녀의 붉은 머리가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외모는 봐줄만 한데 이 여자 때문에 리케가 혼자 있는 타이밍을 보는게 어려웠다.
짜증나는 존재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응··."
****
'실전 1' 수업은 한참이나 남았지만 새벽부터 아카데미에 출근도장을 찍은 나는 도서관 앞에 죽치고 대기중이다.
'책을 대여하는 타이밍은 결국 게이머 하기 나름이지만···.'
정사가 큰 축으로 틀어졌다는걸 알게된 나는 부지런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로버트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순간 에피소드 1이 시작된다.
사이드 퀘스트를 밀어서 레벨링과 파밍을 한 다음 편하게 에피소드를 진행해도 되며.
반대로 쫄깃하게 게임을 즐기려면 사이드 퀘스트를 싹 다 무시하고 에피소드만 달려도 아카라이트의 엔딩을 볼 수는 있다.
진엔딩은 아니지만.
리케의 경우도 결국 메인 에피소드에 들어가는 범주는 아니다.
제국의 안위로 보자면 차원 연구보다 흑마법사 소탕이 수억배는 중요하지만.
히로인은 게이머에게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고, 동료가 필요없을 정도로 컨트롤이 좋다면 로버트 혼자해도 상관없다.
흑마법사와 엮이는 일도 리케나 사이드 퀘스트를 몇가지 피하면 만나지 않고 이야기의 끝을 볼 수 있다.
졸업까지만 잘 피해다니면 그는 이 세계와 무관한 인간이 되니.
'아카라이트'의 메인은 차원에 관련된 것들.
주인공이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는 게이머에게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내용이다.
'또 뭐가 있나···.'
내가 놓친게 없나, 굳은 머리를 억지로 굴리고 있으니 도서관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교관님!"
"도서관장님. 출근하십니까?"
"허허허- 이제 문을 열어야지요. 이렇게 빠르게 오실줄은 몰랐습니다. 책을 정말 좋아하시나 봅니다?"
"제가 좀 읽습니다."
나는 주름진 손으로 잠금을 푸는 도서관장 뒤에 서서 도서관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생도들이 교관님을 조금은 본받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어제만 해도 이놈들이 학업이랑 관련없는 책을···"
"어제요?"
"예?"
"도서관이 개장하는건 오늘 아니었습니까?"
도서관장은 이제 이해했다는듯 껄껄 웃으며 다시 잠금을 풀기 시작했다.
"흘흘- 생각보다 준비가 빨리 끝났습니다. 마냥 놀기도 아쉬워 기숙사에서 지루해 할 생도들을 위해 학장님의 권유을 받고 어제 오후부터 임시 개장을 했습니다."
이 노인네가 쥐약을 처먹었나?
뭔가 이상하다.
좆됐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도서관장의 말을 무시하고 도서관을 빠른 걸음으로 입장했다.
거대한 도서관에서 풍기는 은은한 책냄새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배경을 보자마자 내가 찾는 책이 어디있는지 기억난다.
옛날에 적어둔 정보로 다시 한번 기억을 상기했으니 틀리지 않을터.
지그재그로 서재들을 가로지르며 기억속에 있는 서재를 찾아나섰다.
-
분명 이 서재다.
나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책 제목을 읽으며 이동했다.
좌우로 수번을 왕복했다.
혹시나 싶어 다른 서재도 확인했다.
'없다···!'
몇번을 돌아도 없다.
나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는 도서관장에게 다가갔다.
"도서관장님. 어제 임시로 개장했을때 로버트 볼트라는 생도가 왔습니까?"
"···죄송하지만 그런 사항들은 답해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난감해하는 도서관장을 두고 나는 서재들이 늘어져있는 공간으로 돌아왔다.
'이따위로 선수를 뺏기다니···.'
초월적인 의지가 주인공의 메인 에피소드만은 진행시키려는 것 아닐까.
아니면 주인공의 천운은 부지런함으로도 이길 수 없는건가.
'이제는 무조건 로버트라 보기도 힘든데···.'
이미 늦어버린 것은 잊고 나는 다른 책들을 찾아나섰다.
메인 에피소드와 관련이 없는 히든 피스는 존재하지 않을까.
-
잔잔하게 굴러다니는 서비스 영약들은 입에 다 털어넣어 사탕처럼 씹어먹었다.
몸에 좋은게 입에 쓰다고.
도를 넘는 쓴맛에 혀가 아려왔다.
"습-하- 어우 뒤지게 쓰네."
영약은 말 그대로 서비스.
나는 메인 메뉴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오-!"
'그녀를 위한 무기'라는 제목의 책을 꺼냈다.
겉 표지가 딱딱하고 매우 두꺼운 책이다.
앞 표지에는 검은색 원형 장식이 일체형으로 박혀있는데.
팔찌 같기도 하면서 초크 같기도 하다.
표지에 단단하게 붙어 더럽게 안빠지지만 탈부착이 가능한 물건이다.
띠각-
미량의 마나를 실어 손톱으로 긁어내니 장식품이 들렸다.
이게 책의 본체다.
정작 책은 특별한것 없이 대장장이와 기사단장의 연애소설이니 관심없다.
[ 그녀를 위한 무기 - 0% (사용불가) ]
▷여성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에게 귀속됩니다.
▷다양한 금속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담금질로 담아낸 나의 진심
나는 인벤토리에 물건을 넣고 책을 다시 자리에 넣었다.
'황금 비율이 몇이더라?'
게이머들이 수천수만번의 결과로 어떤 금속을 얼마나 넣는게 최선인지 결과를 도출한게 있었다.
이건 무조건 좋은 광석을 넣는것이 능사가 아니다.
"으음-"
조합식을 두문자로 따서 외우고 다녔는데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않는다.
메모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다.
'이정도면 용서할 수 있다.'
선수를 빼앗긴 아쉬움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 그녀를 위한 무기 ]
이건 아카라이트 히로인들의 전용무기를 만드는 물건 중 한가지다.
'지금 리케가 쓰면 뭐가 나오려나?'
물건의 결과물은 나도 모른다.
어떤 테크트리를 탔고 어떤 감정을 품고있고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매번 다르게 나온다.
게임에서야 몇번해보면 감이 온다.
검을 뽑으려면 어디, 창을 뽑으려면 어느 타이밍에- 같은 공략이 존재하지만 현실은 예측 불가다.
예측은 못해도 이것도 훌륭한 히든 피스다.
만족스럽다.
나는 도서관의 출입구로 돌아가며 계단도 겸사겸사 확인을 끝냈다.
'윗층과 지하는 아직 공사중··.'
다른 물건도 전부 뽕을 뽑을까 했는데 지금 열린곳은 역시 1층뿐이었다.
지하가 진국인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나는 도서관을 벗어나 학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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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보다 피로 물든 실전1 수업이 끝났다.
오늘은 반발하는 생도가 없었지만 공격에 살심이 듬뿍 담겨있었다.
막심은 귀찮은 표정의 사제를 두명 더 데려왔고, 리케는 첫날에 비해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이해한다.
그만큼 그녀는 오늘 기대를 품고있는 것이다.
내 수업이 끝나고 설렁설렁 혼자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의뢰서를 형식으로만 제출하고 상담비 명목의 수수료와 일정 금액은 길드에 대신 제출했다.
느긋한 마음으로 모자란 놈들과 수다를 떨며 리케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가 도착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지?'
아카데미 정복을 입은 그대로 모험가 길드에 들어온 그녀는 호흡이 거칠었다.
"수업은?"
"이번주 수업까지는 안들어가도 괜찮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