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25년차 모험가는 아카데미 교관이 되었다-92화 (92/250)

Chapter 92 - 두 여자는 경쟁 대상이 아니다.

비교 대상이 없어도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 수 있다.

실로 이 남자의 열기는 용암처럼 뜨거우면서 체력은 차가운 강철 그 이상이구나. 해도 해도 만족과 끝이 없다.

그녀의 첫 경험은 딱딱한 이론 교재에 적혀있던 정보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드리트나 백작 가문의 뒤를 이어갈 아이를 만드는 목적조차 없는. 자신의 욕구 해소와 쾌락에만 몰두하는 행위.

'이 행복이 꿈은 아니겠지···.'

당장 내일이 되면 사라지는 신기루는 아닐까. 그 생각에 더 그에게 매달려 애정을 갈구하게 된다.

사랑하는 남자를 마음껏 만지고 만져지고 한도 없이 품에 안겨 로만의 이름을 부른다.

대답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따뜻한 대답과 손길이 돌아온다.

그가 내 몸 안에 뜨거운 정을 울컥울컥 쏟아낼 때마다 이때까지 앓아왔던 걱정과 불안이 녹아서 사라진다.

이제 불순물이 없는 얼음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행복만이 남아버렸다.

자신에게 사정할 땐 눈가를 꿈틀 거리며 미세하게 변하는 그의 얼굴도 보고 있으니 남자답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내일 일정은 그 무엇도 없었기에 에클레어는 그저 당장에 느껴지는 감상을 기억하고 느끼는데 집중했다.

관계의 횟수를 세는 게 무의미했다. 몇 번인지 기억하기엔 가지고 있는 손가락을 다 써도 모자랐으니.

목이 나갈 정도로 신음을 내지르고 평소에는 잘 느끼지 않던 허기까지 강하게 느낄 만큼 몸을 움직였다.

사정을 재차 받아내고 그의 품에 안겨있으니 마음의 안정감에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시만···눈을 붙였다가···아침에는 같이 식사를···.'

눈을 떴을 때는 어둠이 사라지고 화창한 빛이 눈을 괴롭히고 있었다.

옆자리를 향해 더듬더듬 손을 뻗어 만져지는 로만에게 몸을 돌려 안겨들었다.

"으음··."

전날의 행위가 꿈이 아니었구나. 행복하다.

이리 푹 잤다는 감각을 느끼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로만의 살내음을 맡으며 정신을 조금씩 차릴수록 바깥에서 느껴지는 한 명의 기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줬지만 긴장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로만···."

"온 지 한 30분 정도 됐어. 식사 준비한다던데?"

지은 죄가 있는 건···? 허락이 있었으니 아니다. 하지만 에클레어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대화가 어떻고 분위기가 어떨지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옷을 좀 빌리겠다··."

스륵-

정사를 위해 벗어던져 구겨진 셔츠가 아닌 로만의 단색 티셔츠를 입고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목덜미가 간질간질 한 긴장감을 느끼며 문 고리를 잡고 천천히 침실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ㅡ

"아! 언니 일어나셨군요."

검은 단발이 휘날리게 바쁘게 움직이며 식탁을 채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

평소처럼 '기사님'이 아니라 '언니'라는 호칭으로 화사하게 웃어주는 그녀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영애···."

"이제 리케라고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오빠~ 준비 다 됐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멍하니 서있는 나를 로만이 툭툭 건드려서 깨웠다.

"에클레어. 일단 이야기는 밥 먹고 하자."

"으음···알겠다."

솔직한 말로 무엇을 먹었냐고 물어본다면 기억이 안 난다고 답할 만큼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오빠. 잠시 자리 좀 비워줄 수 있어? 언니랑 이것저것 이야기할게 많으니까."

"어. 마당에 있을게. 내 말 기억하지?"

로만이 걱정 말라며 굳어있는 내 볼을 만졌지만 이 행위도 그녀가 보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에 걸렸다.

끼익-

자신의 천성이 뻔뻔함과 거리가 멀어 껄끄럽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가는 로만이 자신을 두고 가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이 자리조차 앞으로를 위해 필요한 절차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앉으세요. 커피랑 홍차 어떤 걸로 드릴까요? 우유도 있답니다."

"아··홍차로 부탁하지."

로만이 사라졌다고 분위기가 급변하거나 웃음이 사라지며 정색한다거나 하는 사태는 없었다.

딸깍-

아기자기 한 무늬가 새겨진 찻잔이 따뜻한 홍차를 품에 안고 에클레어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자신과 달리 홍차가 아니라 우유를 컵에 담아왔다.

"고맙다··."

"언니. 어제는 괜찮았나요?"

"···."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화악 붉히는 그녀를 보며 리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도착해서 침실 문을 살짝 열었는데 그 특유의 열기랑 오빠의 냄새가 가득 차 있더라고요."

"흐, 흐흠."

"그래도 내심 안심했답니다."

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는 리케를 보며 에클레어는 의문을 품었다.

"··안심했다고?"

"제가 권하고도 양면성을 가지는 추악한 말이지만···언니가 정말로 오빠의 모든 성욕을 받아내면 저는 어쩌나 싶었거든요."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더니 이불을 뚫을 듯 물건을 일으킨 상태로 자고 있는 로만을 봤다고 한다.

에클레어는 진심이 담긴 리케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면서도 그 감정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첫 경험이지만 단언하지···로만의 성욕을 혼자서 다 받아낼 수 있는 여자는 대륙 어디에도 없을 거다."

"후후- 그렇겠죠. 언니도 언젠가 보고 싶지 않나요?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쓰러진 오빠를."

턱을 쓸어내리며 그 모습을 상상한 에클레어는 퍽이나 매력적인 제안이라는 듯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은 짓궂은 면이 있으니 본인도 당해볼 필요는 있지."

소소하게 로만이라는 대화 주제를 굴리며 분위기를 풀어간 리케는 잔을 모두 비우고서야 본론을 꺼냈다.

"일단···언니가 이해하셔야 할 부분은. 저희의 모습이 제국에 있는 일부다처제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아직 혼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것을 전제로 리케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클레어도 이미 마음은 굳혔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결과가 정해졌으니···듣지 못했던 부분까지 조금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군."

"물론이죠."

리케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에클레어는 부스스한 머리의 끝을 만지며 작게 물었다.

"이야기 전에. 하루 종일 떠넘기듯 해놓고···묻기엔 미안하다만. 클로에는 잘 있나?"

"오늘 저녁 전까지는 세리아와 같이 있을 거예요. 저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 빠진 거고요."

"후우- 엘렉트라 영애에게도 고마움을 전해야겠군··."

싱긋 웃은 리케는 에클레어의 찻잔에 홍차를 자연스럽게 채워주고 자신의 빈 잔에도 홍차를 채웠다.

"일단 오빠와 만난 경위를 설명해야겠네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가 잔뜩 들어있어서 흥미가 없으실지도 모르지만."

"···넘칠 정도로 흥미가 있다. 경청하지··."

대화를 시작하기 전 심호흡. 보라색 눈동자에는 수 가지의 감정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얼굴에 십자 모양으로 이어진 흉터의 끝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생각의 정리가 끝난 듯 입을 열었다.

"이 상처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야겠네요. 간략하게 줄이자면 제가 어린 시절 ㅡ"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남일을 말하듯, 가벼운 어투로 지옥 같은 날들을 늘어놓았다.

에클레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죽었다 깨어나도 예상조차 불가능 한 과거사.

어디 가서 이야기를 꺼냈다면 망상으로 치부당하기 십상인 이야기들.

5기사 중 세 번째. 유르게나 디 벤타가 어린 영애의 앞에서 했다는 행위에는 혐오감이 들어 눈가에 힘이 빡 들어갔다.

거기에 스카디 후작가의 가주 에녹 스카디도 마찬가지.

한쪽의 말만 듣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사건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게 먼저겠지만···자신도 황실에서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사를 꺼내게 한 것은 정말 미안하다."

"자진해서 꺼내기도 했고. 이제는 다 목표일뿐이니까요. 괜찮아요."

어떻게든 괜찮은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에클레어는 갈등했지만. 저런 일을 겪고 절대 괜찮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갈등을 거듭하다 손을 움직였다.

"···!"

리케가 먼저 에클레어의 손을 잡아준 적은 몇 번이고 있지만 에클레어가 먼저 리케의 손을 잡은 적은 없었다.

머뭇거리던 에클레어는 탁자 위에 있는 리케의 손을 살포시 덮었다. 리케는 드물게도 놀란 눈으로 에클레어를 멍하니 보았다.

"리··리케. 이런 깊은 이야기까지 나에게 해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나? 나는 이런 대인관계에 무척 미련한 면이 있어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서 어떻게든 자신을 부르는 에클레어를 보며 리케는 순수하게 감동했다.

"··역시 언니는 좋은 분이시네요. 오빠랑 비슷하면서 다른 빛이 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나도 욕심 많은 단순한 인간이지··."

에클레어는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후훗- 오빠와 만난 이야기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말하는 이유는···친해지기 위해서죠."

"···친해져?"

"언니도 저도 오빠와의 관계가 최고로 중요하겠지만. 저희 끼리 잘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해요."

보통 귀족들의 처와 첩은 방을 분리한 채 얼굴을 봐도 인사만 하는 정도.

가문의 지분을 나누는 다툼은 끝이 없고 아들을 낳느냐 딸을 낳느냐에 또 경쟁이 벌어지는 그림이 흔하다.

"그건 확실히···독특하군."

"오빠도 그걸 원하고. 이건 과정을 봐도 정략혼 같은 게 아니잖아요. 저희가 싸우기라도 하면 오빠가 엄청 화내거나 슬퍼할걸요?"

"옳은 말이다···."

서로 가문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로만의 재산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명의 남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둘은 앉아있다.

"그래서 저는 언니가 저에 대해서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언니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같이 있다 보면 그런 일이 한 번은 무조건 있을 거고···? 그때 과거에 그런 경험을 해서 저렇게 반응하는구나~ 라고 작게라도 이해받을 수 있으면··· 서로 상한 감정을 풀어나가는 것도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은 감정까지 실려있어 서책에 나오는 감명 깊은 문장과 같은 울림이 있었다.

"항상 느끼지만 놀라울 정도로 생각이 깊군··. 나 같은 기사는 머리가 굳어서 그런 경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하지. 우리도 잘 지내야 한다는 말···기억하겠다. 로, 로만이 싫어하는 일은 나도 절대 하고 싶지 않다··."

눈을 굴리며 누가 들을까 문을 보는 에클레어를 보며. 리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변해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을 꽉 잡았다.

"언젠가 저희가 같이 오빠의 밤을 책임져야 할 텐데 그것도 사이가 좋은 게 중요하겠죠?"

"···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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