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9. 스킬을 배웠습니다. (9/95)



〈 9화 〉9. 스킬을 배웠습니다.

날씨가 제법 풀려 놀러 가기엔 딱 좋은 날이었다. 정후는 차를 몰아 우리를 한강변에 있는 자동차 극장으로 데려갔다.


"오, 여기가 자동차 극장이야?"


수정이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연신 두리번거렸는데 나도 그렇고 수정이도 자동차 극장은 처음이라 자연스레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게 된다.

정후는 그런 우리 둘을 보며 피식 웃고는 능숙하게 오디오를 켜서 주파수를 맞춘다. 그러자 전면에 보이는 대형 스크린의 화면과 딱 들어맞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오, 주파수를 맞추면 소리가 나오는구나. 신기하네."


자동차 극장은 생전 처음이라 모든 게 신기했다. 1학년  좀 신나게 놀고 그랬어야 하는데 한국대 학생 아니라고 할까  다들 공부에만 열중했다.


덕분에 OT말고는 딱히 추억도 없는 건조한 대학 생활을 보낸 것 같다. 방학이 끝나도 공부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다들 그랬으니까 정말 1년을 되돌아 보면 놀았던 시간이 별로 없었다.

간혹, 지금처럼 어쩌다  번 스트레스를 푼다고 영화를 보거나 맛집을 찾아가거나   전부였던 것 같다.


"잠깐만 기다려. 팝콘이랑 콜라 좀 사 올게."

영화는 수정이가 보여줬고 여기까지 운전해 준 건 정후가 해줬으니까 팝콘이랑 콜라 정도는 내가 사는 게 맞지.

"나도 같이 갈래."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수정이가 얼른 내게 말한다.

"밖에 추운데 안에 있지 왜."
"혼자 들고 오기 힘들잖아. 같이 가자."


수정이도 나를 따라 차에서 내렸고 수정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추운지 내 팔을 끌어안는다. 수정이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내겐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남들이 보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그런 오해도 안 받겠구나.'


같은 여자끼리 팔짱을 꼈다고 해서 사귄다고 오해하지는 않을 테니까. 난 자동차 극장 내부에 마련된 매점으로 가서 팝콘과 콜라를 양껏 사 왔다.


수정이와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차로 돌아왔다. 수정이가 뒤에 타고 내가 조수석에 앉아서
수정이 몫을 봉투에서 꺼내 뒤로 넘겨줬다.


수정이는 영화를 보기 편하게 자리를 잡고 먹을 것도
편하게 집어 먹을 수 있도록 위치 조정을 끝내더니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준비 완료."

나 또한 나름의 준비를 마치고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후와 수정이에게 시선이 갔다. 시험이라는 핑계로 한동안 둘을 멀리했던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시험이 정말 중요하기도 했고, 사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리고 나를 윤세진이 아닌 윤세나로 대하는 이정후와 정수정이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뭐, 나쁠 건 없네.'


지나친 걱정이고  기우였다. 둘은 평소와 똑같았다. 다만 나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여자인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 좋았다.


소꿉친구라고 나를 막 대했던 행동들이 고스란히 정후에게로 옮겨간 건 약간 시원 섭섭하다고 할까? 하지만 반대로 나를 무척이나 애정 어리게 바라보고 의지하는  느껴져서 여자인 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가장 달라진  정후였다. 남자였을 때와 여자였을  정말 천지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렇게나 신사적인 놈이  줄이야. 내가 남자였을 땐 서로 욕도 시원하게 박고 가끔은 정말 진심으로 싸우기도 했다.

특히 게임할  엄청 싸웠는데...

근데 지금은 전혀 그런 게 없었다. 행동 하나, 하나 조심하고 약간 어떻게 보면 소심하게 사람이 변했다는 생각이  정도로 나를 대하는 게 조금 낯설 때도 있었다.


'뭐, 남자랑 있을 땐 또  그러겠지.'

내가 여자로 변했기 때문이겠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꽤나  수 없는 게 많아졌다. 가장 많은 시간을 평소에 보냈던 사람도 이젠 정후가 아닌 수정이로 바뀌었다.


수정이는 천상 여자였다. 재잘거리기를 좋아했고 내가 둘 모두를 피했을 때도 꾸준히 내게 연락하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했다.


'남자였을 땐 상상도 못하던 일이지.'

 피식 웃으며 막 시작한 영화에 눈을 가져갔다.


#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집에 아무도 없었다. 세연 언니 또한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잔뜩 놀고 들어올 거라고 했기 때문에 늦게 들어올 것 같았다.

난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브래지어를 집에 오자마자 등에 손을 집어넣어 후크를 풀어버렸다.


"후와."


뭔가 숨이 탁 터지는 느낌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여자가 되고 하루 중 가장 좋은 날을 꼽으라면 이 시간인 것 같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차고 다니는 거지?"

난 브래지어를 들고 흉물스러운 것을 보듯  던져버렸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PC방에 나갈 채비를 했다.


 라인에 흰색 줄이 세 개 그려진 트레이닝복 바지에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흰색 무지 긴팔 티를 입고 위에 가볍게 회색 패딩을 입었다.


"음..."

화장대에 잔뜩 올려져 있는 화장품들을 보고 앉기는 앉았는데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험기간 동안에는 화장대에 앉아 볼 시간이 없어 오늘 처음으로 앉아봤다.

 화장품을 하나씩 들어 보다가 그나마 몇 가지 낯이 익은 화장품들을 보기도 했다.

"BB크림은 알지."


보통 여자들이 화장을 못하면 BB크림은 바른다고 했던  같은데. 이것만 바르고 PC방 가면 되려나? 난 대충 BB크림을 떠서 손가락에 묻힌 후 얼굴에 묻혔다.

"으음."

차가운 크림이 얼굴에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츠렸다. 골고루 펴서 바른 후 화장대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는데  모르겠다.


"바른 거랑  바른 거랑 별로 차이가 없는데."


아무리 봐도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난 고개를 갸웃하곤 뺨을 살짝 두드리며 마무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편하게 카드 지갑 하나와 핸드폰만 들고 나온 나는 여전히 밝은 하늘에 미소를 지었다. 오전에 시험이 끝나고 영화를 보고도 아직 5시 정도 밖에 안 됐다.

그렇다는 말은 게임할 시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지. 혹여 언니가 집에 들어와서 나를 찾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저녁 늦을 시간일 가능성이 높았고.

혹여 찾는다고 해도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하면 크게 혼나진 않을 것 같았다.


"남자였으면 엄청 욕먹었겠지."

 그런지 모르겠지만 언니는 여자인 내겐 관대했다. 막내라? 이건 절대 아니다. 남자였을 때도 난 막내였으니까.

아마도 같은 동성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남자였을  누나들은 서로 엄청 싸웠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그 살벌한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쥐 죽은  살았다.


그래서  호구스럽게 보인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싫은 소리 하나 않고 잔심부름을 많이 했다.

'그래서 그런가?'

남자였을 땐 호구스럽게 보였지만 여자일 땐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가? 뭐, 사실 여자가  나를 보면 확실히 미워할  없는 얼굴이다.

원래 남자든 여자든 예쁘고 귀여운 것엔 약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 덕을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와, 방금 지나간 여자 봤어?"
"트레이닝복? 봤어, 봤어. 완전 여신이던데."
"남자친구 있겠지?"
"있겠지. 저런 여자를 가만히 두겠냐?"

좀 멀리 가서 떠들던가. 일부러 저렇게  들리게 얘기하는 건가? 하여간 시험기간 동안 가끔 답답하면 학교나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할 때마다 시선이 느껴지는 건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도 남자였을 때 예쁜 여자들에게 눈이 가는 건 뭐,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 시선이 가는  붙잡지 않았는데 내가 막상 그 대상이 되고 보니까 무척이나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또 뭐라고 하기가 좀 그렇네.'


내가 그랬기 때문에 그런 남자들을 보고 뭐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다. 몸매 좋고 예쁜 여자가 있으면 눈이 자연스레 따라가는  남자들의 슬픈 본능이니 그걸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난 남자였던 터라 그런 걸 이해하는 쪽이었고. 물론, 너무 노골적으로 가슴을 본다던가 하는 시선들은  불쾌하긴 했지만.


지금이야 패팅을 입었기 때문에 다리로만 시선이 가는 게 느껴졌지만 패팅을 벗으면 십중팔구 가슴에 시선을 받는다.

그건 어디를 가나 그랬다. 70E컵이었던가? 브래지어에 사이즈가 붙어 있다는 걸 난생 처음 알았다.  가슴 사이즈가 보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무려 E컵이라니.


가슴이 크면 어깨가 결리고 허리나 목에도 통증이 있다고 하는데 겨우 2주가 지났지만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 주고 있기는 하지만 남들이 모르는 고통이 있었다. 남자일  당연히 가슴 큰 여자들이 좋았는데 막상 여자가 되고 보니 이거 순전히 남자들만 좋은 거였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카운터에서 알바생들이 거의 기계적으로 인사를 하긴 했지만 난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동네에서 가장 큰 PC방으로 온 나는 이른 시간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야야! 124방향! 124방향에서 온다."
"나 좀 살려줘! 나 좀 살려줘!"
"와... 이게 죽네."
"궁 좀 쓰라고 제발! 궁! 궁! 궁!"
"이거 맞냐? 이거 아닌 것 같은데? 이거 맞냐?"


왁자지껄한 PC방 안의 분위기에 난 살포시 웃고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최대한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마우스를 흔들어 모니터를 깨우곤 능숙하게 로그인했다.


난 손가락을 풀며 주변을 둘러봤는데 우리 학교 말고도 이 근처에 대학교들이 네 곳이나 더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같았다.

"뭐 시키면 늦게 오겠지."

PC방 규모가 커서 일하는 알바생들도 꽤 많이 보였지만 게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뭘 하나 시키기도 미안했다.

게다가 PC방에 감도는 은은한 라면 냄새가 시간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와, 누가 라면 먹나 봐. 냄새 죽인다."
"그러게. 우리도 라면 하나 시킬까?"
"그럴래?"


아니나 다를까, 한 명, 두 명 시키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라면을 먹겠다고 난리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못 먹겠네."

이렇게 큰 규모의 PC방에서 사람들이 너 나  것 없이 시키기 시작하면 1시간 뒤에나 먹을 수 있을 거다.

그냥 중간에 배고파지면 나가서 먹거나 조금 더 참다가 시켜 먹거나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문제는 오늘 우리 학교가 제일 늦게 기말고사가 끝났다는 거다.

'다들 시간이 널널한 사람들이다 이 말이지.'

난 가는 한숨을 내쉬며 패딩을 의자에 걸어 놓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좋아, 시작해 볼까?"


난 떨리는 마음으로 LOM을 실행시켰다.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증명하듯이 PC방에 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LOM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게임을 자주 플레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당당히 골드 2티어라는 달고 있었다. 골드 3티어면 그래도 상위 25% 안에 들어가는 계급이었다.


난 손가락을 풀며 랭크 게임을 실행했다. 이미 스킬을 위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게임[S급]이 LOM에도 적용된다는 건 당연히 믿고 있었다.


내가 지금 알고 싶은 건 이 S급의 스킬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건지 궁금했다. 가장 높은 등급, 가장 높은 포인트를 요구하는 등급인 만큼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일 것 같긴 했다.

"페이크 선수처럼 잘해지는 거 아니야 나?"


LOM은 몰라도 페이크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LOM에서 페이크, 이상현 선수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자자했다.


다른 선수들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퍼포먼스로 단숨에 전 세계 LOM 유저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천재적인 프로게이머였다.

그의 커리어와 현재까지도 보여주는 실력은 결코 쟁쟁한 신예 선수들에 밀리지 않았다.


"같은 팀이나 같은 무대에서 뛸 수도 있지 않을까?"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헤헤. 남자라면 페이크 선수와 함께 LOM  판 하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그것도 남자의 본능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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