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7. 데뷔전 Y1 vs 한하
내가 생각했을 때 우리 팀의 엔트리는 파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 경기의 중요성을 감독님이나 코치진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런 엔트리를 짠다고?
칸느, 앨림, 클로서, 구마, 가디스
난 엔트리 발표를 하시는 감독님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정말이냐고 물었고, 감독님은 그런 내 눈빛에 웃기만 하셨다.
'진짜... 스프링은 실험만 하시려고 하는 건가?'
공식적인 인터뷰에서도 스프링 시즌은 최대한 실험을 하면서 로스터를 확정 짓고 서머 시즌부터는 확정된 로스터로 21 시즌 끝까지 밀어붙일 거라고 하시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게 정말 맞나 싶었다.
기존의 1군 선수들도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엔트리에 선발된 선수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했는데 지금의 상황이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작년에 데뷔한 4명에 올해 데뷔한 나를 첫 경기에 내보낸다고?'
이번에 출전하는 구마, 민영이도 따지고 보면 LCK는 이번이 첫 데뷔 무대라고 봐야 했다.
그럼 작년에 데뷔한 3명에 올해 데뷔하는 2명이 LCK 첫 경기에 나가게 된다.
"편안하게 해도 되니까 한 번 보여줘 봐."
감독님의 말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져도 상관이 없다는 얘기인지. 스프링 시즌은 정말로 로스터를 확정 짓기 위한 오디션 같은 개념인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님의 말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감독님과 코치진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거.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대 감독 앞에서 리그 경기를 뛰는 축구 선수가 된 느낌이 들었다.
'부담이 되겠는데.'
아마 다른 선수들도 나와 같은 느낌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야 포지션 경쟁이 없으니 저 말을 들어도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했지만 자기 포지션에 경쟁자가 있는 나이 어린 선수들은 꽤나 심한 부담감을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좀 여유가 있어 보이는 건 작년 시즌에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칸느, 찬동이 정도? 나머지는 감독님의 말에 조금 굳은 표정을 보여주는 게 확실히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노련하시네.'
어쩐지 감독님의 의도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경기장에 나서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와 깜짝 놀랐다. 꽉 들어찬 경기장의 모습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사람 엄청 많다."
"SKY잖아."
수많은 관중이 눈에 들어오니 조금씩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건 청심환을 먹은 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줬다.
'수능 볼 때 먹어보고 처음 먹어보네.'
난 피식 웃으며 장비 점검을 시작했다. 가볍게 손을 풀면서 선수들과 농담을 나누며 긴장감을 풀었다.
혹여나 못 온다고 하시고 부모님이 오시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관중석을 봤는데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온다고 했는데.'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언니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아 난 결국 포기하고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하e스포츠생명의 출전 선수들은 감독님과 코치분들이 예상한 거의 그대로였다.
모건, 아셔, 초비, 대프트, 비스타
모르긴 몰라도 한하 쪽은 우리 팀의 엔트리를 보고 깜짝 놀랐을 것 같다. 같은 팀이 느끼기에도 파격적인 엔트리인데. 아마 예상을 한참 벗어났을 것이다.
부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상대 선수의 모습과 감독, 코치분들을 보니 뭔가 굉장히 분주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아. 누나 들려요?"
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잘 들려 준현아."
마지막으로 보이스 체크까지 마쳤고 곧 경기에 들어간다는 사인과 함께 몇 분까지 지정된 방에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졌다.
처음 접해보는 일련의 과정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떨림이 멈춰 있었고, 밴픽을 하고 있었다.
"일단 아캴리는 무조건 짜를 생각이거든? 괜찮지. 준현아."
"네, 괜찮아요."
재파 코치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뭔가 나도 덩달아서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루시얀 자르자."
재파 코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 둘 밴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루시얀, 야지르, 아캴리를 밴했고 한하는 판태온, 탈리야, 니댤리를 밴했다.
"올라프 가져 올까요?"
앨림의 말에 재파 코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 바로 가져오자."
올라프가 한 타 싸움에서 터져버린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선혈포식인과 스태락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기 때문에 선픽으로 가져가도 나쁘지 않아도 생각했다.
감독님의 지시로 최근까지 앨림이가 연습했던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첫 경기 정글은 무조건 올라프를 가져오기로 얘기가 돼 있었다.
"오케이."
앨림이도 올라프를 가져오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팀원들은 그런 앨림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올라프 진짜 좋으니까 나만 믿어."
앨림의 말에 팀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질색을 했는데 감독님이 연습하라고 할 때는 갸웃하던 놈이 막상 써 보고 나니까 올라프 전도사가 됐다.
"너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100번 채우겠다."
찬동이의 말에 앨림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문을 표한다.
"그래?"
"어. 진짜 농담이 아니라. 100번 채운다."
찬동이의 말에 클로서, 준현이도 웃고 구마, 민영이도 웃고 나도 웃음을 터뜨렸는데 한 술 더 떠서 앨림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럼 한 번 더 해서 100번 채워야지. 올라프 지이이이인짜로 좋아. 오케이. 이제 MAX다. 난 질 수가 없다."
이상한 방법으로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앨림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더니 전반부 픽이 모두 정해졌다.
우린 올라프, 아팰리오스, 쓰래쉬를 가져왔고 상대방은 카이샤, 그래이브즈, 세뜨를 픽했다.
정글과 바텀 라인은 정해졌네. 카이샤야 현재 1티어 원딜이고 세뜨도 나쁘지 않은 픽이다.
"음, 이러면 아마 AP계열에 부담을 느낄 것 같은데."
재파 코치님의 말에 아니나 다를까 바로 씬드라를 밴하는 한하를 볼 수 있었다.
"우린 탑을 하나 짜르자. 뭐 짜를까?"
"레낵톤이 괜찮아 보이는데요."
칸느의 말에 재파 코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짤라."
바로 칸느의 의견을 수용했고 레낵톤이 지워진다. 그리고 한하의 마지막 밴 카드는 트패.
재파 코치님은 마지막 시간까지 다 써가며 고민을 하다가 말한다.
"오리 자르자."
"넵."
우리의 마지막 밴 카드는 미드 오리. 이렇게 모든 밴이 끝나고 다시 픽 시간이 돌아왔다. 서로 미드와 탑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한하는 미드 죠이를 먼저 뽑았다.
"죠이네."
클로서, 준현이는 상대 미드 죠이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아있던 선픽 AP중 그나마 괜찮은 챔피언이었다.
"죠이였으면 오리아나가 나쁘지 않았는데."
현준의 말에 재파 코치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밴을 한 꼴이었다. 아마 그걸 노리고 저쪽에서도 죠이를 가져갔겠지.
죠이를 상대하기 좋은 트패도 잘렸고, 씬드라도 죽었다. 준현이와 재파 코치님은 서로 고민을 하며 의견을 나눴는데 난 처음으로 내 의견을 얘기해 봤다.
"무난하게 갈리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재파 코치님과 준현이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 누나 말대로 갈리온 괜찮을 것 같은데요? 올라프도 있겠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네. 갈리온 괜찮다. 갈리온 갈까?"
"네. 뽑을게요."
준현이는 바로 갈리온을 뽑았다. 이젠 선픽하는 게 조금 부담스러운 탑인데 시간을 충분히 사용하며 의견을 나누던 코치님과 찬동이는 캬밀로 합의를 봤다.
역시 무난한 카드란 생각이 들었다. 조합적인 면에서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뭐 할까?"
내가 순수하게 궁금해 물었는데 찬동이는 선경지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냐르할 것 같은데."
그 말과 동시에 상대방이 냐르의 초상화를 걸어 놓는다.
"오."
"뭐예요, 형?"
"무당 나셨네."
팀원들도 그 모습에 놀라 한 마디씩 했고 찬동이는 그런 팀원들의 놀랍다는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결국 찬동이의 예상처럼 상대 탑은 냐르를 가져갔고 경기가 시작됐다.
"자, 첫 경기라고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너희들이 얼마나 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여줘. 맞춰가는 과정이니까 한 걸음씩 걸어 보자고."
재파 코치님의 말에 우린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아, 내 목소리 잘 들리지?"
"네, 누나. 잘 들려요."
"잘 들려."
"잘 들려요, 누나."
"오케이."
대답을 하는 팀원들을 보니까 퍼뜩 생각이 난 게 하나 있었다.
'나보다 다 나이가 어리거나 동갑이네.'
거기다 다들 출발선이 비슷한 선수들이었다. 작년에 데뷔하거나 올해 데뷔한 멤버들이니까. 감독님과 코치분들이 일부러 이렇게 팀을 짰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갔나?'
어쨌든 내겐 잘 된 일이다. 내 오더를 잘 따르는 사람들로 팀이 구성됐으니까 내가 원하는 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나 말 잘 듣고 재깍재깍 따라라. 진짜 내 말에 토 달거나 즉각 반응 안 하면 평생 저주할 거다."
경기를 시작하면서부터 팀원들에게 귀엽게 협박을 해주곤 난 무섭게 경기에 집중했다.
"민영아, 집중하자. 누나 첫 경기에서 지고 싶은 마음 1도 없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럼요."
"그러고 보니까 민영이랑은 데뷔 동기네. 선배님들 캐리 해주실 거죠? 바텀은 숨만 쉬겠습니다?"
경기 초반에 시야를 먹고 인베이드를 방어하면서 가볍게 잡담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내가 하는 말이 선수들의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장난을 치거나 이모티콘을 날리거나 했지만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있었다.
"이겨보자."
난 나직하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얘기했다. 라인전은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미드, 정글 주도권이 상대방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잘해야 했다.
상대방이 용쪽 시야를 먼저 잡고 시도를 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우리가 라인전을 강하게 미니까 쉽게 시도를 못하고 있었다.
"칸느야, 이거 상대 탑보다 먼저 텔 쓰면 안 된다."
"알았어."
내 오더에 착실하게 대답하는 칸느. 사실 이 팀에서 그나마 믿는 구석이라고 했을 때 찬동이 말고는 없었다.
사실상 작년의 Y1도 칸느의 활약이 없었으면 많이 힘들 거라는 게 정설이었고. 그만큼 지금 멤버 중 가장 핵심인 건 분명했다.
칸느도 본인이 그걸 알기 때문인지 라인전 단계에서 굉장히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거 용쪽 시야 먹혀서 한 번 밝힐 필요가 있거든?"
"라인 한 번 밀까?"
"그러자, 민영아. 라인 한 번 밀고 용쪽 가자."
"알았어."
내 오더에 따라서 민영이는 나와 함께 위로 올라가줬고 아니나 다를까 핑크 와드가 곳곳에 박혀 있었다.
난 부시에 있는 핑크 와드를 제거하고 위로 조금 더 올라갔더니 역시나 핑크 와드 하나가 용 앞에 설치돼 있었다.
난 모두 지우고 일반 와드를 박은 뒤 민영이와 함께 다시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브가 보였다.
난 그브 위치 핑을 찍으며 말했다.
"앨림아 그브 여기 있다. 전령 한 번 쳐봐."
마침 위쪽에서 바위개를 먹고 있던 앨림을 보며 전령 트라이 오더를 내렸고 내 말에 앨림은 곧바로 전령을 치기 시작한다.
"탑 라인 좋아. 바로 가줄 수 있어."
칸느의 오더에 앨림은 자신감 넘치게 용을 때렸고 용쪽 시야가 먹혀서 그런지 죠이와 그브는 아래로 움직이며 용쪽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어? 냐르 내려간다. 냐르."
칸느의 오더에 난 위쪽의 상황을 살피며 빠르게 말했다.
"이거 시야 먹으러 내려오는 거 같거든? 찬동이 같이 내려와 주고 앨림아 너는 안에서 먹다가 가까이 오면 딜 같이 넣어줘. 냐르한테."
"알았어."
"오케이."
"이거 위쪽 시야 없는 것 같다."
전령 주변에 시야가 있다면 죠이가 아래로 내려올 일이 없었다. 이건 100% 전령 쪽에 시야가 없다는 소리였다.
"오케이, 냐르 노플."
역시나 내 예상대로 전령 시야를 먹기 위해 냐르가 내려온 거였다. 갑자기 나타난 올라프와 뒤에서 내려오는 캬밀의 공격에 냐르는 점멸을 사용해 도망쳤다.
"굿! 좋다. 노플이니까 탑 한 번 보는 것도 괜찮겠다."
"오케이. 한 번 볼게."
"알았어, 나 라인 당긴다."
난 미니맵을 계속 보며 그브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브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거 지금 우리가 엄청 불편하게 하고 있거든. 정글이 바텀 찌를 가능성이 높으니까 우리 생각하면서 플레이 하자, 민영아."
"알았어."
앨림은 집에 갔다가 곧바로 탑 동선을 짰고 난 그 모습에 경고를 해줬다.
"지금 정글 안 보이거든? 탑에 있을 수 있다는 거 생각하고. 준현이는 탑 궁각 한 번 봐줘. 안 타고 잡는 게 가장 베스트긴 해."
내 말에 준현이가 탑쪽으로 올라가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칸느가 캬밀 궁을 사용해 가둬놓고 때리기 시작했고 곧바로 도착한 앨림도 따라서 딜을 넣는다.
메가 냐르가 돼서 저항이 심하긴 했지만 결국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나이스."
"좋아!"
"아우, 맛있어."
난 환호하는 팀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