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4. 첫 휴일
식사를 하면서 상현 오빠와 나눈 대화가 의외로 즐거웠다. 게임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 시사 등등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난 상현 오빠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1~2시간? 그 정도 지났을까?
화제가 영화로 넘어갔는데 의외로 영화까지 관심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오빠 영화 좋아하는구나."
"영화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에이, 왜 없어. 한 달에 한 편도 안 보고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책보다는 덜 하겠지만 영화도 보는 사람만 봐."
"아, 그래?"
그래도 책보다는 영화가 접근이 쉬우니까 책 보다야 더 많이 보긴 하겠지만 안 보는 사람들은 안 본다고 들었다.
"여기 근처에 영화관 있던데 보러 갈래? 오빠 시간 있어?"
내 말에 상현 오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야 원래 책 사고 숙소에서 쉴 생각이었으니까."
"아, 집에 안 가고?"
"나 집이 어차피 서울이라 자주 가."
"아아. 그럼 같이 영화나 보러 가자. 영화도 내가 쏠게."
"아니야. 영화는 내가 보여줄게. 커피도 얻어먹었는데."
상현 오빠의 말에 난 거의 줄어들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보며 말했다.
"얼마 먹지도 않았네. 아메리카노 안 좋아해?"
"오늘 처음 먹어 봐."
상현 오빠의 말에 난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 진짜? 별로지?"
내 물음에 상현 오빠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
약간 미안함을 담은 표정에 난 손을 들어 보이며 괜찮다는 모션을 취하며 말했다.
"아, 괜찮아. 괜찮아. 나도 아메리카노 처음 먹었을 때 별로였어. 이걸 왜 먹나 싶었거든."
"근데 지금은 괜찮아?"
대화를 하는 동안 진작 다 마셔버린 내 아메리카노를 보며 상현 오빠가 물었다.
"어. 먹다 보니까 괜찮아지더라. 이렇게 밥 먹고 나면 꼭 당기고 그렇더라고. 오빠 안 마실 거면 나 주라. 아깝잖아."
내 말에 상현 오빠는 자신이 몇 모금 마셨던 아메리카노를 내게 넘겼는데 진짜 입도 안 댄 것처럼 가득 들어 있었다.
"마시긴 마셨어?"
난 전혀 줄어들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보며 물었다. 상현 오빠는 손가락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
"어, 조금."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마셔보긴 한 모양이네. 어떤 맛인지 궁금하긴 했던 모양이다. 난 피식 웃고는 아메리카노를 흔들며 말했다.
"이게 좀 요즘 애들 맛이라서 어르신 입맛인 오빠한테는 좀 안 맞을 수 있겠다."
보통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들은 아메리카노를 드시기보다는 믹스 커피를 좋아하시지. 상현 오빠 입맛이 딱 그쪽이라 믹스 커피 취향일 거다.
"편의점에서 다른 커피라도 사줄까?"
내 물음에 상현 오빠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괜찮아."
"그럼 더더욱 내가 영화를 보여줘야겠네. 책값만큼은 그래도 내가 내야지."
영화를 보여줘도 내가 돈을 덜 쓰긴 하지만 어쨌든 상현 오빠가 돈 쓰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카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영화관에 도착한 우리는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사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평일 오후 시간이라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린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볼 영화를 정하고 내가 매표소에서 표를 끊었다. 내가 그렇게 방심하던 찰나에 상현 오빠는 기어이 팝콘과 콜라를 사 왔다.
"아, 그것도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다음에 사주면 되잖아. 이건 내가 살게."
"책 사준 게 비싸서 내가 사려고 했는데."
"밥도 커피도 영화도 다 사주는데 이거라도 사야지."
상현 오빠는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곤 내가 들고 있는 표의 시간을 쳐다본다.
"10분 남았네. 지금 들어갈 수 있겠다. 가자."
상현 오빠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오빠가 힘겹게 들고 있는 팝콘과 콜라 하나를 받았다.
"오빠, 이쪽! H열"!
내가 작은 목소리로 소리쳐 부르자 고개를 돌리며 내가 있는 위치를 바라본다. 안 불렀다간 스크린까지 직진할 기세여서 얼른 불렀다.
확실히 사람이 없긴 없었다. 10분 전이었는데 거의 빈 좌석이 가득했다.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나갈 때 조금 붙잡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심시간 때 붙잡혔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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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영화를 보고 나온 나와 상현 오빠는 불이 환하게 켜지자 알아보는 사람들로 인해서 역시나 잠깐 붙잡혔지만 많지가 않아 금방 끝내고 나올 수 있었다.
"이제야 사람이 좀 많네."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확실히 영화관 안에 사람이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평일에 쉬니까 이런 좋은 점이 있구나.
"주말에만 오다가 평일에 오니까 이런 건 좋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상현 오빠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다른 사람들이랑 쉬는 날이 다르니까."
프로게이머는 주말도 없구나 싶었는데 어쨌든 일주일에 1, 2경기는 꼭 있으니까 그 전날 저녁부터 하루를 꼬박 쉴 수 있으니까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거기다가 남들 일을 할 때 쉬는 거라서 그런지 쾌감도 좀 남달랐고. 그나저나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니까 시간이 조금 애매하다.
"시간이 좀 애매하네."
상현 오빠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그러게."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도 애매하고 안 먹고 들어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배가 고프지는 않은데 뭔가 좀 허전하기도 하고.
"어쩌지."
"그냥 좀 걷다가 밥 먹고 들어갈까? 어차피 쉬는 날 점심이랑 저녁은 알아서 해결해야 되거든."
"아, 그래?"
"응. 쉬는 날은 아침만 제공이야."
보통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가서 그런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야 어머니도 좀 쉬고 그러시지. 1년 365일 매일 남의 식사를 준비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쉬는 날 점심, 저녁은 사 먹거나 시켜 먹거나 그래야 되겠네.
"그럼 그렇게 하자. 그게 편하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책이 있어서 숙소에 들어가도 심심하진 않을 거라는 거.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진짜 말이 숙소지 숙소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좀 심심하고 답답했다. 숙소에는 컴퓨터를 가져다 놓을 수 없다는 게 좀 충격적이라고 할까...
"그럼 어디 적당한 곳 찾아보자."
"오키."
난 상현 오빠의 말에 핸드폰을 꺼내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주변 2~3km반경 안에 맛집이 있으면 모조리 검색해 살폈는데 상현 오빠도 그런 내 모습에 핸드폰을 꺼내 찾기 시작했다.
상현 오빠는 어디 좀 앉을 곳을 찾는 것 같았는데 그런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아, 저녁은 오빠가 찾아라."
난 그렇게 말하곤 검색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상현 오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왜? 주변에 뭐가 없어?"
"아니, 엄청 많던데. 이번엔 오빠가 먹고 싶은 거 먹자. 점심엔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었으니까. 그래야 공평하지."
난 그렇게 말하며 검색하던 창을 끄곤 미니 게임을 실행시켰는데 오빠는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 진짜 가리는 음식 한 개도 없으니까 진짜 아무거나 골라도 괜찮아."
난 그렇게 말하며 실행한 게임에 집중했다. 상현 오빠는 입술을 만지며 굉장히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해가 조금씩 떨어지면서 날씨가 조금 추워졌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혹여나 춥진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서두르려고 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렇다고 또 대충 고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여기 어때?"
오빠가 내게 보여준 곳은 파스타를 파는 가게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위해서 고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오빠 파스타 잘 안 먹을 것 같은데. 이거 먹고 싶어서 고른 거 맞아? 나 때문에 고른 거 아니야?"
"아니야. 나도 파스타 좋아해."
"그래?"
난 살짝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상현 오빠는 굉장히 떳떳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난 그런 상현 오빠를 보곤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가자. 춥다."
난 그렇게 말하며 게임을 종료하곤 가게가 있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쪽인가?"
언뜻 봐서 상현 오빠에게 물었더니 핸드폰을 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어, 맞아."
난 상현 오빠의 길 안내를 받아가며 파스타 집에 도착했는데 목조로 된 2층짜리 파스타 집이었다. 외관이 굉장히 예뻐서 미소가 나왔다.
"오, 괜찮네."
내 말에 상현 오빠가 그제야 조금 웃으며 말한다.
"그래? 괜찮아?"
"어, 진짜 괜찮은데? 음식도 맛있겠지?"
내 말에 다시 어두워지는 상현 오빠의 얼굴. 난 그 모습을 보곤 힘겹게 웃음을 참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딸랑~
귀여운 종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가장 먼제 눈에 띄었다. 건물 자체도 목조로 된 건물이었는데 내부 인테리어도 거의 목재였다.
"와..."
나무를 깎아서 만든 공예품도 보였고 나무로 만든 시계도 보였는데 중간중간 식물도 있어서 그런지 숲속에 있는 별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어서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아, 네."
카운터에 있던 직원 하나가 싹싹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고 난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며 대답했다.
보통은 나 또는 상현 오빠를 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기 마련인데 이 직원은 나도 상현 오빠도 모르는 것 같았다.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편한 곳에 앉으라고 했고 나와 상현 오빠는 직원을 말대로 두리번거리다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이랑 물 드릴게요."
직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받으면서 눈은 물과 물통에 갔다. 나무로 된 컵과 물통이었는데 자연스레 눈이 갔다.
"와, 나무 물컵이랑 물통이네."
짙은 갈색을 띠는 나무 컵과 물통은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는데 나무 특유의 문양이 굉장히 보기 좋았다.
난 벽을 보고 다시 컵과 물통을 봤는데 어째 재질이 비슷해 보였다.
"이거 이 건물 재료로 만든 건가요?"
내 물음에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건물을 짓고 남은 자재로 만든 거예요. 여기 사장님께서 목공예를 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아아. 그렇구나."
나무 목공예를 하시는 분이 요리사로 변신한 건가?
"그럼 여기 있는 공예품이 다..."
"네. 저희 사장님이 만드신 거예요."
굉장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직원의 모습에 사장님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굉장히 귀여운 인상의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분이셨는데 아마 나와 나이가 비슷할 것 같았다.
"아, 그렇구나. 대단하시네요."
정말 빈말이 아니라 곳곳에 있는 공예품 중에는 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퀄리티가 높은 것들도 있었다.
"팔지는 않으시나요?"
"팔진 않으시는데 간혹 마음에 드는 손님이 계시면 선물로 드리긴 해요."
"아, 그래요? 여기 자주 와서 사장님 눈도장 좀 찍어야겠네요."
"우리 사장님 엄청 좋아하시겠네. 이렇게 예쁘신 단골손님도 생기시고."
난 미소를 지으며 아까부터 열심히 메뉴판을 보고 있던 상현 오빠를 쳐다봤다.
"골랐어?"
난 이제서야 메뉴판을 열고 보기 시작했지만 사실 들어올 때부터 먹고 싶은 파스타가 있었다.
"어, 난 골랐어. 넌?"
"나도 골랐지."
난 메뉴판을 대충 훑어 넘기며 내가 먹고 싶은 파스타가 있는지 먼저 확인했는데 없을 리가 없었다. 난 메뉴판을 덮고 말했다.
"난 크림새우파스타."
내 말에 상현 오빠도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전 명란 파스타 하나 주세요."
"네, 크림새우파스타 하나, 명란 파스타 하나요. 혹시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실까요?"
직원의 말에 상현 오빠가 날 쳐다봤고 난 고개를 저었다. 상현 오빠는 그제서야 직원에게 말한다.
"없습니다."
"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손님들이 없으니까 내부 구경하셔도 돼요. 2층엔 더 많거든요."
"아, 그래요?"
난 직원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현 오빠도 내가 일어나자 덩달아 일어났는데 난 그런 오빠를 보며 말했다.
"나 여기 좀 돌아보고 올게. 오빤 힘들면 앉아서 쉬고 있어."
내 말에 상현 오빠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아니야. 나도 구경 하고 싶었어."
"아, 그래? 그럼 같이 돌아보자."
건물 자체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공간을 굉장히 잘 활용한다고 해야 할까? 남는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곳엔 어김없이 나무로 만든 공예품이나 식물이 있었다.
그게 참 찰떡같이 있어서 답답하다는 느낌보다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 이렇게 오밀조밀하게 배치하면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아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누군진 몰라도 되게 섬세하신 분이다. 진짜라고 해도 믿겠다."
허투루 만든 게 정말 하나도 없었다. 나무로 만든 앵무새는 정말 금방이라도 말할 것처럼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얘는 진짜 금방이라도 말할 것 같지 않아?"
나무 횟대에 올라가 있는 앵무새의 부리를 조심스럽게 건드리며 상현 오빠를 보고 말했는데 별안간 말소리가 들렸다.
"아야!"
난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앵무새를 쳐다봤다.
"뭐, 뭐야? 진짜 말했어!"
내 말에 어디선가 굵직한 남자의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