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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6일차 (26/94)



〈 26화 〉6일차

얼마만에 온기인지 모르겠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포옹을 할 일이 없으니 이런 감각이 낯설 정도였다. 부모님이라도 껴안아 드릴 걸 그랬다.


계속 서있다 보니 다리에 힘이 없었다. 아마 취기 때문에 더 빨리 힘든 감도 있었다.

나는 엘리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말했다.


"앉아도 돼에?"

"그. 그래."

순간 그는 꿈에서 깬 것 처럼 반응했다. 아마 내 목소리 때문이겠지. 나는 오히려 내 목소리를 듣자 기분이 좋았다. 아직 나는 남자라는게 확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포옹도 한 번 딱 하고 끝내면 되는건데 길게 해버렸다. 나는 벽에 기대며 주르르 내려가듯 앉았다.


엘리스는 뭔가 못마땅한지 팔짱을 끼고 날 쳐다봤다.

"이게 주사야?"


"뭐언 주사아."

"애교 부리는거."


애교같은 소리하네. 살면서 그런 비슷한 것도 한 적이 없다. 난 그의 착각을 정정해 주기로 했다.

"킥. 애교같은 소리하네에! 응? 나처럼 상 남자가 어디이 있다고오!"

내가 또박또박 대꾸하자 엘리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페널티가 무섭긴 무섭네. 그 대단한 세리아를 이렇게 만들어 놓는 거 보면."


"흐음.  또옥! 같은데?"


그는 이제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내가 발음을 정확히 하려  수록 더 우스워지는게 느껴졌다.

"나 다 기억한다아! 조오심해! 응?"


내가 으름장을 놓자 엘리스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내 얼굴이 구겨질 수록 더 웃는 모양이다. 화가 잔뜩 나서 나는 입을 닫았다.

"진짜 다 기억했으면 좋겠네."


한참을 깔깔대며 웃은   번의 숨 고르기를 하고 나서야 엘리스는 웃음을 멈추고 날 봤다.

"삐졌냐?"


"..."

"아휴. 또 삐지긴 뭘 삐지냐."

아무 말 않는게  삐진거야. 뭔 말을 해도 웃으니까 안 말하는 거지. 원인을 자기가 제공해놓고 내게 책임을 묻는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다.

"잘못했어. 안 웃을게. 응?"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말 하면 소용이 있겠니? 나는 쓸데없이 싸움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


"...에휴. 마음대로 해."


엘리스의 말이 왜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나 생각해 봤는데  여자 대하듯 하고 있다. 자기 여친한테나 저 말투로 하길 바란다.

아니 오히려 지금 그는 여자같으니까 남자친구에게 하듯이 한 것 아닐까? 그럼 맞는 반응인가? 목소리만 들으면 확실히 여잔데.


혼란스러워진 난 그냥 다시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역시  자세가 제일  탈 없고 마음도 편하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우리는 각 방으로 돌아갔다.





[자! 3라운드 조건을 말해드립니다! 1번방은 '포옹' 방. 2번 방은 '뽀뽀' 방. 3번방은 '키스' 방. 4번 방은 '애무' 방입니다. 10분동안 선택해 주세요!]

갈 수록 가관이다. 애무같은 소리하네.

나는 일어나서 쿨하게 포옹을 또 골랐다. 다른건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저 방은 안 고를 것이다.


보통 이정도 시간이 지나면 취한 감각이 사라지는데 처음이랑 계속 비슷했다. 그런데 멀미도 없고 속이 울렁거리지도 않는다. 참 신기한 감각이다.


마치 마약을 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애초에 알콜이 마약인가?

이 곳의 기술력이 정말 무섭다. 사람 하나를 마음대로 발정도 나게 했다가 취하게도 했다. 뭐. 잠도 재우고 안재우고 조절하는데 뭘 못할까.

"에휴."

적어도 지금은 고민을  잊고 쉬기로 했다.

10분이 지나고 또다시 이동했다.

눈을 떠보자 제니퍼가 있었다. 나는 한 번을 혼자 있질 못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머쓱하게 웃었다.


[1번방과 2번방에 각각 2명이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마이너스 1점씩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조건을 실행해 주세요! 지키지 않으면 벌점입니다!]

2번방에 들어간  명이 누구인가 보자 엘리스와 줄리였다. 줄리도 계속해서 벌점을 받고 있다. 이대로면 공동 꼴등은 나랑 줄리일 것이다.


마리는 4번 방에 들어가서 아직까지도 키스 해보고 싶다며 외치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엔 4번 방은 '애무' 방이었는데 여전히 키스를 외치는거 보면 상당히 취한 모양이다.


아까 엘리스랑 포옹을 하고 났더니 기분이 괜찮아졌었다. 생각보다 사람의 온기라는 건 대단한 걸지도 모르겠다.

미션을 하긴 해야하니까 제니퍼를 쳐다봤더니 우물쭈물하며 손만 만지작 거렸다. 숫기 없는 건 마리나 제니퍼나 비슷했다. 물론 지금의 마리는 폭주중이었지만 그 전에 마리는 수줍어 했었다.

아니면 여자 속옷 차림인게 부끄러운 걸까? 이제와서 의상을 부끄러워 하진 않을 것 같다. 근데 포옹은 원래 남자끼리도   있는건데?

내가 먼저 팔을 벌리자 제니퍼는 잠시 머뭇 거렸다. 그리고 눈을 꼭 감은 채 쪼르르 내 앞으로 오더니  안겼다. 그녀가 내게 안기는 반동으로 인해 몸이 흔들렸지만 나는 벽에 살짝 기대며 버텼다.

엘리스와 달리 내가 더 크니까 제니퍼는 안아주는 맛이 났다. 아까 내가 느낀 온기를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껴안고 가만히 있었더니, 제니퍼는 살짝 빼려다가 다시 고개를 묻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금방 뺄줄 알았나 보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턱에 간질거렸다. 전 여자친구 생각이  났다. 헤어진 후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요근래에 가장 많이 생각난다.


꽤 오래 안았는데도 그녀는 먼저 포옹을 풀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흐흣 하고 웃었다.

충분히 온기가 전해졌다고 생각한 나는 포옹을 풀었다. 그러자 제니퍼는 같이 뺐다. 약간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냥 지은 표정인데 내 멋대로 생각하는 건가?

예쁜 여성이 안아주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 하다가도 기분이 미묘했다. 내가 예쁜 여성으로 느껴지는 걸까?

그녀가 웃은 것이나 포옹을 먼저 풀지 않았다는게 무슨 의미일까. 별 의미 없이 취한  맞춰주기 위해서일까?

어떤 이유였든 날 맞춰준 제니퍼에게 고마웠다. 취기 때문인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다른 방을 보자 줄리와 엘리스는 아직도 뽀뽀를 못하고 있었다. 30분 제한 시간 안에 하긴 해야겠지만 엘리스의 표정이 굉장했다.


살짝 불편하게 썩어있는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더 줄리랑은 어색한가보다. 그런 기미가 보이긴 했었다. 아마 젊은 꼰대같은 생각을 가진 놈이면서 줄리에게 반말한 것 때문이겠지.

어쩔  몰라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깔깔 웃었다. 그런 나를 제니퍼가 미묘하게 쳐다봤다.

보이는 걸론 확실히 줄리나 엘리스 둘  예뻐졌다. 줄리는 섹시한 누나 분위기의 외모였고 엘리스는 부티나게 예쁜 혼혈 느낌이었다. 둘이 마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림이 됐다.

여기서 중요한  줄리는 취해 있었다. 마치 관능적으로 엘리스를 유혹하는 표정이 됐다. 자신이 남자라고 착각 중인가 본데 파급력은 꽤 있었다.


그가 얼굴을 들이밀면 엘리스가 거부하는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결국 눈을 꽉 감은 엘리스에게 줄리는 볼 뽀뽀를 했다. 뭔가 결심을 한 모양이다. 다행히  뽀뽀도 미션 성공으로 봐주는 모양이다. 그와중에 나는 줄리가 뽀뽀를 엘리스 입에 할까봐 조마조마 했다.

그는 뽀뽀를 받고 나더니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지 줄리에게  뽀뽀를 했다. 줄리는 예쁜 여성이 뽀뽀해준다고 생각하는지 헤벌레 해졌다. 저 얼굴로 헤벌레 하니까 조금 웃기다.


엘리스가 많은 여성을 사귈 때 관계를 중요시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같다. 외관상으론 충분히 예쁜 줄리를 거절하는 모습이 말의 신빙성을 높여줬다.


나와 제니퍼는 멍하니 그걸 보고있었다. 마리는 4번 방에 지쳐서 쓰러져 있었다. 앞으로 마리랑 술마시면 안될 것 같다.

엘리스와 줄리가 뽀뽀를 하는 저 장면을 보며 내가 든 생각은 놀랍게도 '뽀뽀 정도는 불쾌하지 않게 볼 만 하다.'였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배우들 처럼 연기 하는 것이다.


가끔 예능에서도 개그맨들이 종종 하지 않던가. 저 MC는 감독이고 나는 연기자라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 해결됐다.

게이나 레즈비언 연기를 하는 배우들도 사실은 이성애자다.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여기서 시키니까 이것들을 어쩔 수 없이 하더라도 내가 연기라는 것만 자각한다면 버텨낼 수 있다.


나는 뜬금없이 제니퍼를 보며 물었다.


"너어는 나랑 키스해도 괜찮게써어?"


"네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지하게 물어보려 했는데 혀가 풀렸다.


근데 이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차분하게 말을 정리하고 말하려 했다.


"만약에. 여기가 키스 방이었으면 해써야 하자나아. 나랑 할 준비가 됐냐구. 그냥 물어보고 싶어서."

뭔가 말이 애매하게 전해졌다. 이게 아니지.


"나 싫어?"

이건 더 아니다. 어째 말을 하면 할 수록 이상해진다. 그런데 제니퍼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 아뇨! 싫지 않아요... 아! 아니.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아니고. 아니! 좋아하긴 하는데. 그냥... 네."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제니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나는 큭큭 웃었다.

우리 둘은 나머지 시간동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고 각자 방으로 옮겨졌다.


[마지막 4라운드 조건을 말해드립니다! 1번방은 '뽀뽀' 방. 2번 방은 '키스' 방. 3번방은 '애무' 방. 4번 방은 '절정' 방입니다. 10분동안 선택해 주세요!]

이정도면 1번 아님 2번 고르라는게 아닐까. 솔직히 다들 1번만 골랐으면 행복했을 텐데. 괜히 1라운드에 3명이 페널티 먹는 걸 보고 겁먹은 모양이다.

어차피 나는 꼴찌다. 차라리 마리처럼 4번만 픽했으면 이겼겠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그 전략을 펼쳤으면 꼼짝없이 마리와 계속 만났을 것이다.

이게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그건가. 날 저격해서 동반 자살 하려던 전법을 가진 마리만 1등 후보다.

나는 고민 하다가 2번 방을 골랐다.

이젠 나도 포기했다. 물론 내가 포기한 선은 키스까지다. 더 이상은 못 버틴다.

그래도 마음가짐을 다르게 했더니 키스 정도는 충분히 할 것 같다.


나는 다시 철푸덕 누워 눈을 감았다. 빨리 이 취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금새 10분이 지나고 나는 2번 방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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