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6일차 (29/94)



〈 29화 〉6일차

정신이 들자 다들 먼저 일어났는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제일 늦게 일어나는 건 처음이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뭔가 하다 말고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그대로 상체만 일으킨 채 멍하니 있었다. 다들 무슨 생각인지 너무 조용하다. 너무 관심주면 좀 그런데.

"아아아."


혹시나 하고 말해보자 맑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도 목소리가 바뀌자 목을 매만져봤다. 매끈한  밖에 안만져진다. 확실히 목소리마저 날 떠나갔다.


쓴 웃음이 나왔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렇게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애매하게 쓸어넘겼다. 이것도 익숙해지려나.

고개를 숙여보자 똑같이 하얀 스포츠브라를 입고 있었다. 정말 악취미였다.

"다들 일 보세요."


아직도 아무말 안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 마디 했다. 지나친 관심은 괴롭다.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이번엔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덮었다. 몸에 힘도 없고 돌아다닐 의지도 없었다.


아래로 손을 내리자 부드러운 여성용 팬티가 만져졌다. 새삼 궁금해져서 손을 넣고  음부를 더듬어봤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막 귀두를 매만지는 기분이 아닐까 했는데 좀 다르다.

정말 살살 만지는데도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민한 것도 예민한건데 내 몸을 완전히 뒤바꾸는 기술이 더 신기했다.


그냥 겉보기엔 가랑이 사이에 금 간 모양이었는데 느낌은 확실히 생생했다.

호기심이 생기자 살짝 손가락을 넣어 질과 요도의 감각이 어떤지 봤다.

"큿."

무심코 신음이 샐 뻔 했다. 생긴지 얼마 안되어서 민감한 걸까 아니면 여성들은 다 이런 느낌을 받는 걸까.


조금만 만져보고 기분이 이상해지기 전에 다시 손을 뗐다. 습관적으로 냄새를 맡아보니 완전한 여성의 냄새였다. 스트레스가  솟았다.


다시 잠들기엔 잠이 너무 확 깨서 그 길에 일어났다.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자 가랑이의 감각이 다르다. 여성기가 생겼다는게 느껴졌다.


애써 시선을 피해 다른 관심사를 찾자 뭔가 방의 느낌이 달라졌다. 아까는 몰랐는데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더 넓어져 있었다.


그리고 정말 피아노를 갖다 놔줬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일단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 내 보지였지만 냄새나는  냄새 나는 거다. 빡빡 씻었다.

씻고 나와서 거울을 봤다. 긴 머리에 오밀조밀하게 꽉찬 얼굴이 새삼 엄청나게 느껴졌다. 원래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다면 길거리에서도 보기 힘들 미인이다.

나는 거울을 더 보고 있기 힘들어서 습관적으로 피아노 앞에 갔다.

꽤 좋은 피아노였다. 완전 최고급은 아니어도 충분히 비쌌을텐데 용케 구매할 생각을 했나보다.


내가 피아노를  만저보자 제니퍼가 내 옆에 왔다.

"피아노 쳐주시기로 한거  잊으셨죠?"


제니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괜찮나고  물어 봐줘서 고맙다."

내 맑은 목소리가 순간 역하게 들렸다. 순간 목을 쥐어 뜯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트레스 수치가 굉장히 높아진 모양이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손을 풀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  해보려 했는데 손의 모양이 바뀌어서 치는 느낌이 너무 달라졌다.

피아노는 익숙해질 정도로 반복해서 쳐야 하는 악기인데 낯설게 느껴졌다. 능숙해져야 제대로 된 한 곡 완주라도 할 텐데 이래서는 아무것도 못치게 생겼다.


그나마 좀 더 쉬운 손풀기 곡으로 가볍게 하나 치려고 했는데 실수 투성이였다.

"손이 바뀌어서 지금은 바로 못치겠는데?"


내가 고개를 돌려 말하자 제니퍼는 손사레를 쳤다.

"지금 당장 들려달라고 한게 아니니까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감각을 익히기 위해 연습했다.

손도 작아졌고 팔에 힘도 줄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더 중학교 때 생각이 났다.

연습을 하다가 너무 혼자 쓰는 방처럼 굴었다는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에겐 소음이 될 수도 있는데 깜빡했다.

괜히 미안해져서 연습을 그만뒀다.


그래도 확실히 피아노를 치니까 옛날 스트레스 풀던 그 느낌이 다시 났다. 마음의 안정을 좀 찾았다.


"그만하게?"

이번엔 줄리가 내 옆에 왔다. 나는 무심코 그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네."

화장까지 개조당한 줄리는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 모습이 어땠는지 살짝 가물가물 했다. 그는 내가 놀란게 보였는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나도 아까 일어나서 거울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데. 화장실에 벅벅 문질렀는데도 그대로더라. 손에 묻는 것도 없어. 진짜 피부가 변한거야. 무섭지?"


 속눈썹을 깜박이며 말하는 모습이 슬퍼보였다.

"흐음. 흠."

줄리는 잠시 말을 끌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너가 전에 했던 얘기들. 정신은 남성으로 남아야 우리의 가치관이나 그런 걸 지킬 수 있다는 거 있잖아."


"네. 우리는 아니고 제가요."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내가 말하려는건. 우리  여성으로 변한 건 사실이니까. 모든 변화를 거부해야 하는지는 나도 사실 잘 모르겠어. 그렇게까지 연연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 그러시구나."


줄리도 저렇게 말하는  보면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되나보다.

"너 깨기 전에 엘리스, 마리, 제니퍼까지 넷이서 이것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일단 변한 몸에 적응하는게 맞지 않을까 해서."

"여자로 지내는 거에 적응하라는 건가요?"

"물론 강요하진 않아. 나도 아직은 스스로를 남자라 분명히 생각하고 있고. 그래도 너무 스트레스 받지는 말자는 거지."

한 공간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불편하게 있는게 불편하다던가.


"일단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안 될 것 같네요. 이 불편함이 끝나는 순간 이 곳에 끌려오기 전의 저는 죽는거나 다름 없을 거예요."

"그래... 알겠어. 확고하네."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잠시 얹었다가 떼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머리에 손을 짚었다. 거절하는 모양새가 어찌 내 잘못처럼 느껴지게 했다.  문제에 잘잘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들 자기만의 극복 방식이 있는 거고 나는 남성성을 고집하는 방법으로 버티는 중이다.


내가 나머지 사람들보고 이렇게 하라고 강요한적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줄리는 은연중에 너무 불편하게 여기지 말고 적응하라는 뉘양스로 말을 했다.


 나에게 적응을 강요 하는 걸까. 본인에게 뭐가 좋다고. 단지 불편한 분위기가 싫어서?


방금 내게 보지가 생겼는데 안 심각하고 버티는게  이상하다.

정말 순수하게 날 걱정해서 해주는 말인가? 그렇다면 미안하긴 한데 쓸데없는 말인건 변함 없다.

나는 마리처럼 긍정적으로 변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적응하지 못한다. 여자로 지내는 것에 찬성할 수 없다.

여자로 변한 걸 생각하면 괴롭기만 했다. 정신을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해 다시 피아노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복잡한 마음을 풀고 싶었다.

이번엔 엘리스가 내 옆에 왔다.


"잘 치네."


"고마워."

별 다른  없이 계속 피아노를 쳤다. 계속 치다보니까 감각이 약간씩 살아나고 있다. 아직 연습은 한참  해야겠지만.


치던 피아노를 멈추고 엘리스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내가 묻자 그는 골똘히 고민했다. 줄리처럼 여자로 적응하는게 어떠냐고 물어볼 생각인가?

"글쎄. 딱히 무슨 말을 해주려고 온게 아니라서. 피아노 계속 쳐."


"그래. 없음 다행이고."

내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마리도  옆으로 왔다.


"넌  왜?"


"그냥요. 피아노 치는거 보려고요."


둘이나 옆에 와서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전혀 집중이 되질 않아서 일어났다.

"얘기좀 하자."

"그래."

내가 말하자 엘리스는 바로 즉답했다.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일어나기 전에 다들 대화했다며. 그럼 너도 여자로 살기를 결정한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전혀 아니야. 줄리가 말을 이상하게 전했나 보네."


내가 말을 너무 과대해석해서 논리적 비약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아냐.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렇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줄리의 잘못은 아냐."


정정해주자 엘리스는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했다.

"내가 얘기해 주고 싶은건 너가 오늘 게임에서 키스할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묻고 싶어서야."

흑역사 얘기를 꺼내자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아직도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다시 생각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취기 때문에 생긴 일이야. 홧김에 하긴 했지만 후회중이고. 제니퍼에게도 사과 했잖아."


"아니. 그래도 마리나 줄리 얘기 들어보니까 기억은 다 난다면서. 무슨 생각으로 질렀는지 물어보는거야."


창피했지만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 기억이 났다.

"내가 연기자고 이 상황이 가짜라는 생각을 했지. 제니퍼에게도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취기 때문에 실수했어.  잘못이야."

"맞아! 바로  포인트야. 지금 이 상황을 우리가 가짜라고 인식한다면 무슨 짓을  뒤에도 괜찮을 거란 얘기야. 한 달 정도 여자가 되어 생활하는 연기를 한다면 되는거 아냐?"

엘리스가 맞장구를 치며 내게 동조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술 취한 상황이니까 통한 논리지 실제는 안된다고. 말 그대로 연기는 잠시  상황인  하는 거니까 몰입 후 돌아오는게 되는데 우리 몸은? 진짜 여자야.

심지어 연기 엄청 잘하는 배우들은 그 캐릭터에서 나오는데도 오래 걸린다고 하잖아. 그만큼 그 방법은 문제가 많아.

남자가 여자인 척 하면서 하루를 지내도 몸은 그대로 남자니까 몰입에서 깰  있겠지. 그런데 우리는 '연기에서 깨어나야지!' 했는데도 아직 여자야. 그럼 혼동이 오기 시작한다니까."

엘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야말로 오바하는거야. 한 달 몰입한다고 그게  깰 까봐 무섭다는게 말이 돼? 너무 걱정이 많은  아니냐고."

"내가 걱정이 많다고? 미안한 말이지만 난 벌써 다른 사람들 원래 얼굴이나 목소리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넌 어떤데."

"그건..."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잠자코 듣던 마리가 말했다.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벌써 우리가 부럽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예쁘고 더 좋게 바뀐건데  싫어해요?"

나는 마리를 보며 차분히 말해줬다.

"남 시선이 뭐가 중요해. 내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  몸인데. 너의 몸이 네 맘에 든다면 넌 그걸로 된거야. 난 싫어서 이런거고. 이 개인의 차이를 계속 본인들의 편의에 맞춰 들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거야."

"아하. 전이 더 좋으시구나..."

이해하는 듯이 대답했지만 표정 보니 전혀 모르고 있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사는 것이 전보다 좋다고 계속 은연중에 생각하는 거겠지.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니까 난 먼저 잘께."

"그래라."


엘리스는 미묘하게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마지막으로 침대로 가는 길에 한   제니퍼에게 사과했다.


그 다음 안대를 쓰고 누우며 한숨을 한 번 쉰 후 잠을 청했다. 가장 기분 나쁜 하루가 매번 갱신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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