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7일차
자연스럽게 대사에 색칠이 됐다.
[제니퍼 3단계 통과. 4단계는 연기력입니다. 주어진 대사와 연기를 따라하세요.]
이 와중에 제니퍼가 3단계를 통과했다. 제니퍼가 먼저 통과한 것을 보면 마리는 역시 체력이 약했다. 과연 모두 통과할 수 있을까. 마리도 아슬아슬 하다.
다시 집중이 깨졌다. 살짝 떨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 때 취기 때문에 흑역사가 생긴 날도 느꼈지만 난 몰입을 너무 잘해서 탈이다.
"너한테 훨씬 좋은 목걸이 선물해 줬잖아. 뭐가 문제야?"
"이런게 다 문제야. 그냥 선물 차이 때문에 화난거로 보여? 내가 그렇게 속물같아?"
대사에 (목소리를 더 높이며)라는 지문이 있었다. 나는 너무 내 성격으로 차분하게 반박해 버렸다. 감정은 담겼지만 지문을 따르지 않아 색칠이 되질 않았다.
"후우."
[마리 3단계 통과. 4단계는 연기력입니다. 주어진 대사와 연기를 따라하세요.]
마리도 결국 체력을 통과했다. 개조를 받아들이겠다던 그녀도 페널티는 두려운 모양이다. 아니면 막상 하다보니까 승부욕이 붙어서 열심히 하는 이유일수도 있다.
살짝 촉박해졌다. 남은 시간을 보니 30분 정도 남았다. 나는 얼마 안남은 대사를 이어갔다.
"이런게 다 문제야! 그냥 선물 차이 때문에 화난거로 보여? 내가 그렇게 속물같아?"
목소리를 크게 냈다. 감정이나 톤, 얼굴표정 등 여러가지를 조합해서 통과를 주는 시스템일까? 살짝 애매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통과했다.
"그러면 왜. 내가 사귀는건 너인데 왜 그렇게 질투하는거야?"
"이게 왜 질투야! 당연한 반응이지! 또 이렇게 매번 네 행동이 아니고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투도 짜증나!"
"그렇게 짜증나면 헤어져. 나도 네 집착 질려!"
"그래 헤어져! 이 쓰레기야!"
다 좋았는데 마지막 대사 후에 (눈물을 흘리며 등을 돌린다) 라는 말이 붙어있었다.
난 꽤 몰입했다고 생각했지만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역시나 색칠이 되질 않았다.
어떻게 울어야 하나 고민이 됐다. 남은 시간도 별로 없는데 큰일이다. 여기서 이렇게 막힐 줄 몰랐다.
나는 최대한 슬픈 생각을 하려 했다. 하지만 몰입에 비해 감정은 살짝 매말랐는지 아무리 슬픈 생각에도 눈물이 안 나왔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계속 눈을 뜨고 감지 않았다. 눈꺼풀이 찌릿대고 감길듯이 내려왔다.
파르르 떨리며 감기기 직전이 되자 화 내듯이 소리쳤다.
"그래 헤어져! 이 쓰레기야!"
진짜로 화가 나서 말은 잘 나왔다. 그리고 뒤 돌며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뒤를 보자 대사에 색칠이 되었다.
"예쓰."
주먹을 꽉 쥐고 성공을 기뻐했다.
내 앞이 검게 가려지더니 넓은 방으로 옮겨졌다.
[세리아 4단계 통과! 중간평가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와! 짝짝짝! 축하드립니다! 편집된 영상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앞에는 영화관처럼 거대한 스크린이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스크린이 켜지며 바뀐 내가 꽃받침을 하고 윙크하는 사진이 나왔다.
저건 뭐지?
나는 저런 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데 뭔가 싶었다.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심지어 MC가 얘기한 편집된 영상은 무슨 소리인가 하고 영상을 봤다.
처음에 내가 통과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왔다. 넓은 방에 바뀐 내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상상 이상으로 창피했다.
배경을 무슨 콘서트처럼 해놔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편집은 엄청 잘해놨다.
"오호..."
노래의 일부가 나온 뒤 끝나고, 바로 내가 춤추는 장면이 나왔다. 짧지만 백댄서까지 동원한 것 처럼 꾸며놨다.
사람들 사이에 스포츠 브라에 팬티만 입고 춤을 추는 장면을 보자 수치스러웠다. 내가 저런 식으로 춤을 췄구나. 생각보다 더 못춘다.
그 다음엔 내가 운동하는 장면을 짤막하게 다 보여준다. 아까 생각했던 것 처럼 스포츠웨어 광고 같았는데 다른 운동은 그렇다 쳐도 스쿼트는 진짜 보기 그랬다.
마지막으로 연기한 영상은 제일 충격이었다. 내 얼굴과 목소리가 아까 배우들이 연기한 영상에 합성되어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내가 정말 헤어지는 모습 같았다. 비교적 연기를 제일 잘해버려서 더 느낌이 이상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와중 그나마 노래, 춤 보다는 연기가 가장 나아보였다.
이제 살짝 체념해버렸다.
시간을 보자 20분 남았다.
[엘리스 4단계 통과! 중간평가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와! 짝짝짝! 축하드립니다! 편집된 영상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내 시야가 가려지더니 다시 보였을 땐 옆에 엘리스가 있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살짝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확실히 승부욕이 있는게 느껴졌다.
엘리스의 꽃받침 윙크 장면이 스크린에 나왔다. 그녀는 입을 쩍 벌렸다. 나는 괜히 놀려주고 싶어서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아. 아냐! 내가 찍은거!"
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영상은 그런 엘리스를 무시하고 계속 되었다.
감성적인 발라드를 불렀다. 엘리스 또한 자신의 노래가 울려퍼지자 내 귀를 막으려고 나에게 왔다.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며 노래를 들었다.
상당히 듣기 괜찮았다. 왜 통과하기까지 오래 걸렸나 의아할 정도다.
그 다음 춤추는 장면이 나왔다. 편집 방식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백댄서들 앞에서 스포츠브라와 팬티바람인 엘리스가 춤을 췄다.
"아니. 무슨 저런 편집을."
엘리스도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먼저 오니까 이런 재밌는 상황이 생긴다.
굉장히 빨리 통과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춘 것을 보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훨씬 잘 춘다. 나는 박수를 쳐줬더니 엘리스의 표정이 빨개졌다.
운동이야 뭐 잘 하는거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편집을 해놓으니 멋져보였다. 마지막으로 합성된 연기가 나왔다.
엘리스는 아예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살짝 대사치는게 연기 느낌이 났지만 넘어갈 만 했다. 헤어지며 눈물 흘리는 것까지 마치자 그녀는 아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보는 사람이 옆에 없었는데도 창피했는데 오죽할까.
[마리 4단계 통과! 중간평가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와! 짝짝짝! 축하드립니다! 편집된 영상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야가 가려지고 떠오른 뒤 마리가 있었다.
마리도 우리 둘이 있으니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오히려 마리가 먼저 탈출하다니. 연기에 소질이 있는게 아닐까?
화면에 꽃받침 윙크하는 마리가 나왔다. 그녀 또한 얼떨떨하게 그 사진을 봤다. 다들 반응이 비슷비슷 하다.
그녀는 애니메이션 노래를 불렀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저거였나보다.
"어? 어?"
마리는 상황 파악이 덜 된건지 리액션이 고장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다 점차 눈치를 챘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거대한 스크린으로 자기가 노래부르던게 나오면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싶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이상 말이다.
춤 추는 장면도 나왔다. 마리는 나보다 춤을 더 못췄다. 동작도 굉장히 소극적이고 이상하게 어색했다.
저 백댄서 합성은 누가 한건지 궁금하다. 우리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편집이라면 대성공이다.
운동은 편집을 잘 해줬는데도 뭔가 어설펐다. 제대로 된 헬스나 자세를 몰라서 그런 모양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려줘야 할 것 같다. 계속 운동 할 것 같은데 저렇게 하면 몸 망가진다.
마지막 연기까지 나왔다. 나는 마리가 굉장히 연기를 잘한다는 느낌은 못 받았지만, 그녀가 굉장히 몰입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옆에 앉은 마리를 보자 아까 생각이 나는건지 눈망울이 촉촉하다. 눈물 연기가 얼마 안걸려서 금방 끝낸 모양이다. 대단한 몰입도다.
마리의 영상까지 끝나자 시간은 5분 남았다.
제발 둘다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누구 하나 페널티 받으면 피해가 우리한테도 온다.
여태 나온 페널티들이 다 나체, 취기, 발정. 이런 것 밖에 없었던걸 생각한다면 아무도 안걸리는게 제일 좋았다.
두근대며 기다리는데 시간이 끝나갈 때 쯤 알람이 나왔다.
[제니퍼 4단계 통과! 중간평가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와! 짝짝짝! 축하드립니다! 편집된 영상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우리 옆에 제니퍼가 나타났다. 마리는 둘 다 안 될 것이라 생각했는지 제니퍼가 나온게 좋다고 작은 박수를 쳤다.
제니퍼가 심호흡을 했다. 자기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서 떨렸나보다.
그 때 엘리스의 짖궃은 표정이 나왔다. 나도 바로 이해해 버렸다.
큰 화면에 제니퍼가 꽃받침 윙크한 사진이 나왔다. 그 때 엘리스가 말했다.
"어? 우리는 증명사진처럼 나왔는데 제니퍼는 다르네?"
그녀는 어리둥절하게 엘리스를 쳐다보다가 켜진 스크린을 보고 경악을 했다.
"네? 엥? 저게 뭐야!"
엘리스는 바로 낄낄댔다. 나도 살짝 웃고 말았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다니 나도 변해가는게 느낀다.
이 와중에 제한시간은 끝났다. 줄리는 페널티를 받게 되었다.
제니퍼의 노래 부르는 영상이 나왔다. 의외로 보이그룹의 댄스곡을 불렀다. 노래는 평범했는데 생각보다 랩을 잘했다. 그녀는 부끄러우 죽으려 했다.
춤은 무난했다. 못 추는 것 처럼 보이진 않는데 잘 추지도 않았다. 약간 잘 못추는 애들 중엔 제일 잘 추는 애, 잘 추는 애들 중엔 제일 못 추는 애 느낌이었다.
제니퍼는 자기가 춤추는 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운동도 꽤 했다. 헬스나 몸 키우는 이 쪽에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 치고는 첫 만남 때 꽤 말랐었지만 의외였다.
마지막 연기가 나왔다.
"악! 으악!"
제니퍼는 쪽팔림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난리를 쳤다. 소심하던 애가 저러는거 보면 정말 창피한 모양이다.
대사처리 후 마지막 눈물까지 끝나자 그녀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다들 끝마치고 나니 적막만이 감돌았다. 많은 복합적인 이유로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제 줄리의 페널티가 뭔지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