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35-1화. 슬피 우는 아이.
'피곤하네.'
알렌은 비비안이 버리라고 했던, 자신의 손길이 닿았던 수건을 들고 기숙사에 들어가 보관한 후, 원래 가려고 한 식당에 앉아 아침이 나오길 기다렸다.
'심심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하아... 개 피곤하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적지 않게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알렌은 식당 테이블에 엎드려 밥은 언제 나오나 그렇게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좋은 아침이다, 알렌."
"...어? 뭐야? 네가 여긴 왜 왔냐?"
딱딱한 말투. 어디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풍채. 어제부로 내 노예가 된 웰턴 아르스나의 인사에 약간 당혹스러웠다.
"식당에 오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겠지."
바로 앞자리에 앉은 웰턴은 팔짱을 낀 채로 알렌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잘생긴 놈 처음 보냐? 뭘 그렇게 야리냐?"
"밤새 생각했다."
'뭔 개소리야 갑자기?'
"어제 큰 저택에서도, 카지노에서도 너는 나를 노예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동등이 대했지."
'그거야 공작 가문 자제가 내 따까리라고 하면 마로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보여서 그렇게 해준 건데.'
"그래서 앞으로도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정했다."
"뭐를 결정했다는 건데?"
"앞으로. 나, 웰턴 아르스나는 알렌 메스티아의 충실한 검이 되기로 결정했다."
"너희 집안 내력이냐? 존나 낯간지럽네."
"나는 진심이다. 알렌. 네가 원한다면 차기 가주도 포기할 수 있다."
"미쳤냐? 그 좋은 자리를 포기하게? 됐고. 나보다 약한데 네가 내 검이 된다고?"
"노력하겠다."
대뜸 검이 되겠다는 웰턴의 말에 알렌은 헛웃음이 터저 나왔다. 그러다가 녀석에게 새겨진 술식은 살펴보려다 그냥 그만뒀다.
왜냐하면 알렌은 이런 녀석을. 약간 중2병 ㄷ다워도 충직한 녀석을 꽤 좋아했기 때문이다.
'새끼가. 닭살 돋게 말을 잘하네. 그러면 그쪽에 한 번 보낼까?'
"어차피 넌 내 소유물이니까 그딴 건 상관없고. 그럼 날 지킨다는 말을 지킬 수 있는지 어디 테스트 한 번 하자."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겠다."
"내가 어떤 아이템이 잠든 던전 지도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근데 이게 혼자만 갈 수 있는 던전이야."
물론 구라다. 독보적인 천재가 아닌 이상 누가 1인용 던전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 아이템을 가지고 돌아온다면 그때는 내 검으로 인정해줄게. 간단하지?"
"알겠다. 그러면..."
"새끼가 급하게 움직일 필욘 없잖아? 주말에 가자고."
"그 안에 다른 사람이 아이템을 채 간다면 어쩔 셈이지?"
"그땐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무튼 주말에 출발하도록 하자고."
"알겠다."
'새끼가 지도도 없이 어딜 가려고. 그래도 연기라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진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
알렌은 속으로 웃으며 일어나 시킨 아침을 가지고 온다.
"그럼 맛있게 먹으십시오, 알렌 님."
"푸웃! 씨, 씨바... 뭐야, 그 갑자기 말투와 호칭은 왜 바꿔?"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안 드신다면 바꾸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됐어. 걍, 원래대로. 내 평소처럼 행동해."
"알았다. 그럼 맛있게 먹어라, 알렌 메스티아."
'새끼. 뭔가 빡치면서도 말을 잘 들으니 더 빡치네...'
입가를 닦으며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그대로 먹는 알렌.
다른 이가 보았다면 예의니 예절이니, 예법이니 태클을 걸고넘어지겠지만, 감히 누가 알렌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는 메스티아 후작 가의 차남이자, 그와 함께 앉아있는 학원생은 아르스나 공작 가문의 삼남이다.
왕족이나 타국의 황족 등,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두 사람을 건드릴 사람은 매우 극소수였다.
"ㅇ, 안녕하세요..."
알렌에게 인사를 건네는 귀여운 목소리의 주인공.
"오, 일찍 일어났네? 잘 잤어?"
"아, 네...! 그, 그런데..."
미라이는 조금 겁을 먹은 듯한 눈으로 알렌의 앞에 앉아 식사하는 웰턴을 살짝 노려보았다.
"미안하다."
"ㄴ, 네엣!?"
뜬금없이 겁을 먹은 미라이를 향해 다가가며 미안하다고 하는 웰턴 아르스나.
"어제의 무례한 행동. 사과하마."
"아, 그, 그게..."
"야, 사과를 그렇게 무섭게 하면 어떡하냐. 정중히. 네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신사답게 용서를 구해야지."
알렌에게 쓴소리를 들은 웰턴은 아! 하며 깨달은 표정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으며 미라이를 보며 말한다.
"미라이 미레이 양. 어제 제가 한 무례한 행동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꽤 교과서적인 신사의 행동을 취하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웰턴.
'기본 예법은 배운 모양이네.'
무식한 줄로만 알았던 녀석이 이렇게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긴 했다.
"저, 저는..."
"미라이. 이 녀석이 무섭다면 굳이 용서하지 않아도 돼."
"하, 하지만..."
"웰턴이 무섭다면 내가 또 막아줄게. 아니, 입도 뻥끗 못하게 패줄게. 그러니 방금 말한 것처럼 용서하지 않아도 돼."
알렌이 지켜준다는 말에 미라이를 용기를 냈다.
"아,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 요!"
"알겠습니다."
"호, 화가 나도! 사람을... 사람을 때리지 마세요...!"
작게나마 울리는 소녀의 고함.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있던 우리에게는 똑똑히 전달되었다.
'착하네. 나였으면 싸대기 두 대 날리고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제3 자로 지켜보던 알렌은 왠지 모를 흐뭇함이, 대리만족이 느껴졌다.
'아, 딸 가지고 싶네. 그러면 진짜 잘 놀아줄 텐데.'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 저는 아직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저, 저를... 때리려는 큰 손이..."
"웰턴. 이만 가라."
"알겠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알렌의 말에 대답과 함께 미라이에게 인사하며 먹다 만 식사를 들고 떠나는 웰턴.
"잠깐 나갈까?"
"...네."
****
원망이라는 감정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나약한 노인이라도, 힘이 없는 아이라도. 무언가 자신들을 불행히 만든 잘못이 있다면 다정하던 그들의 시선과 태도는 180도 변한다.
언제나 다정했던 사람.
언제나 따뜻했던 요리.
언제나 따스했던 손길.
그러나 불행이라는 체질을 타고난 미라이의 실체를 안 마을 사람은 아주 냉정했다.
언제나 다정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분노한,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이 세상에서 존재하면 안 된다는 얼굴과 함께 미라이를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하찮게 대했다.
언제나 따뜻했던 요리는 쓰레기통의 굴러다니는 찌꺼기가 아니라면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언제나 따스했던 손길은 농기구와 돌을 던지며 미라이를 마을에서 내쫓아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경비를 서기도 했다.
어떤 이에게는 마나는 축복이지만, 동시에 또다른 이에겐 저주이기도 했다.
그 어린 소녀가. 아직 사람들의 손길에서 성장하며 커야 할 소녀는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고 혹독한 것인지를 불과 3살 만에 깨달았다.
"저, 저는 훌쩍..."
"괜찮아."
학원의 뒤뜰 벤치.
등교 시간이라 그런지 뒤뜰 벤치에 앉은 알렌과 미라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우는 소녀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물론 알렌은 미라이의 과거를 모른다. 하물며 암시장에서 나오는 악덕 저주 상인. 이른바 꽝.
걸리면 있는 돈은 다 털리는 쓸모없는 상인일 터인데.
"솔직히 웰턴 녀석을 용서하면 안 되지. 때리려고 했으니까."
"흐윽...!"
당황스럽다. 일단 울 것 같아서 뒤뜰로 오긴 했는데... 나와 있어서 안심한 걸까. 서럽게 우는 미라이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꾸, 꿈에서도... 그 커다란 손이 저를... 흐윽...!"
"괜찮아... 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네. 그래.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말이야. 이겨내야 해, 미라이."
"흐윽... 하, 하지만... 흑..!"
"계속 이렇게 울면서 살고 싶지는 않잖아? 조금 쓴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운다고 해결될 문제는 없어. 세상은 상당히 혹독해. 조금 비약하게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운다고 해서 누가 구해줄 희망을 품지 마. 어떻게든 스스로 행동하고 나아가며 살 궁리를 해야 해."
잔잔히 흐르는 목소리. 미라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혹독함과 경멸, 온갖 세상의 부조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소년이 냉정히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미 터진 눈물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는 아니잖아? 정 힘들면 나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되고, 또 네 친구들에게 부탁해도 되고. 물론 내가 앞서 말한 말과 상반되는 의미지만, 그래도 사람은 홀로 서되 서로 도우며 나아가는 거라 생각하거든?"
'아 씨바... 내가 뭐라 말하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니까... 그... 뭐라 해야 하나... 음... 미안하네. 내가 말재주가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뭐 힘든 일이 있다면 일단 있는 힘껏 부딪쳐 봐. 그래도 안 된다면 나와 함께 부딪쳐보자."
"교, 교먑쯥니다... 훌쩍..."
한참을 울던 미라이의 코를 훌쩍이며 눈가에는 마지막 눈물이 떨어졌다.
"어우... 눈가가 퉁퉁... 불었네. 보건실에 가서 일단 한숨 자자."
"져, 져기... 훌쩍... 호, 혼쟈셔는 못 쟈는.. 훌쩍..."
"그러면 내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