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58-2 새로운 연극 준비.
점심시간.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떠난 교실.
금발의 소년은 펜대를 굴리며 어떤 연극이 좋을지 깊이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쪽 세계는 어떤 연극이 좋으려나.”
수업 시간 내내 계속 고민해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른 이야기는 없었다.
“뭔가 애달픈. 그러면서도 대중을 사로잡을 이야기가 필요한데...”
해피 엔딩은 누구나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새드 엔딩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운에 남으니까.
안타까우면서도 슬프게 끝나는, 그런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역시. 내가 아는 비극적 이야기는 그것밖에 없겠네.”
몇 번을 고민해도 그 작품밖에 없다.
나 같은 문학 무지렁이도 알만한 비극적인 이야기.
말로 이룰 수 없는.
보는 사람마저 안타까우며 그들의 사랑이 끝내 이뤄지지 않는 슬픔의 이야기.
‘이쪽 세계는 아직 반전 요소가 든, 비극적인 사랑으로 끝나는 미디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다들 좋아하겠네.’
수업 시간에 정리했던 노트를 그으며 알렌은 빠른 속도로 노트를 써내려갔다.
“이거 괜히 유명해지면 피곤해지는데.”
****
방과 후 교무실
알렌은 정리된 노트를 코델리아에게 건넨다.
“뭐긴요. 축제 연극 때쓸 시나리오에요. 간략하게 요약만 정리했으니 읽어보세요.”
노트를 넘기며 요약한 시나리오를 읽은 코델리아는첫 페이지부터 흥미로웠는지 다리를 꼬며 책상에 놓인 안경을 쓰며 집중했다.
노트를 넘기는 코델리아의 손이 다급했다.
그리고는 다시 노트를 뒤로 넘겨 내가 쓴 시나리오는 두어 번 더 읽고는노트를 덮으며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알렌. 정말로 혼자서 이 이야기를 쓴 거야?”
안경을 고쳐 쓰며 여전히놀란 눈으로 묻는 코델리아의 색다른 모습은 귀여울 뿐이었다.
“당연하죠. 점심도 거르고 쓴 건데.”
“놀라워. 연극 업계가 한 차례 파란이 일어날 정도로. 파급력 있는 이야기야.”
“마음에 드세요?”
“이거라면 교장 선생님도 허락, 아니, 적극 승낙하실 거야...! 그럼 교장실에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덮어둔 노트를 들고 교장실로 향하는 코델리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앉아있는 알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 극의 제목은 뭐지?”
“그것까진 생각하지 않았는데, 코델리아 선생님은 뭐가 좋을 것 같아요, 제목?”
소파에 앉아있는 알렌의 옆에 앉는 코델리아는 다시 노트를 펼쳐 고양된 목소리로 제목을 생각하며 말하기 시작한다.
“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은 어때? 아니면... 가문의 비극? 또...”
열을 내며신이 난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교무실에 있는 선생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도도하고 냉정하다는 코델리아가 저리도 좋아하는, 일개 학생이 노트에 쓴 시나리오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던 선생들이 슬그머니 우리가 앉아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시선을 끄는 건 달성했네. 이제 선생들에게 각인시키면 되려나.’
사실 알렌은 시나리오만 썼을 뿐, 제목은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나 멋진 시나리오를, 이야기에 제목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러니 코델리아의 반응을 예상한다면 분명 제목이 없다는 것에 태클을 걸 게 분명했다. 아니, 확신했다.
물론 코델리아가 제목을 안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교장실로 향하는, 기뻐하는 코델리아의 반응이 궁금해하는 선생들이 관심을 두는 것도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좋은 연극이라는 걸 인식하는 셈이니.
“다른 선생님께 물어볼까요? 선생님들. 이번 축제 연극 때 쓸 시나리오인데 살짝 읽어보시고 어떤 제목이 괜찮을지 추천 좀 해주세요.”
코델리아 손에 들린 노트를 가져와 가까운 선생에게 건네자.
옹기종기 모이는 꼴이 마치 학창 시절 만화책을 가져와 구경하는 급식들 같았다.
천천히 노트를 넘기라는, 아직 못 읽었다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와 작은 감탄사가 들리는 왠지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들이 노트를 덮으며 내게 건네주자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아마, 적절한 제목을 추천하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건 어때? 사랑의 슬픔?”
“에이, 그거보다 차라리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어때요?”
“차라리 비극, 이렇게 간단히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저마다 제목을 주고받으며 흡사 토론하는 분위기.
심지어 코델리아마저 슬그머니 참여해 제목을 토론하고 있었다.
‘어차피 제목은 내가 생각한 게 있으니 머리 안 굴려도 되는데.’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선생들이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있으니까.
“제가 처음에 생각한 제목이 있는데, 이건 어떠세요?”
제목을 짓던 선생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제가 제목을 짓는 재주가 딱히 없어서, 이렇게 부르려고 했거든요.”
잠깐의 호흡. 저들의 눈빛이 어서, 빨리, 제목을 내놓으라는 눈빛을 보며 알렌은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때요?”
****
“다이스.”
“네, 알렌 도련님.”
“상황이 바뀌었어.”
“어떤...?”
교장에게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이 허가된 이상.
새로운 소문을 흘려야 했다.
“푸른 마녀 이야기 말고, 오리지널 연극을 준비해뒀다고 사용인들에게 일러둬.”
“다른 이야기로 교체됐나요?”
“그래. 내가 직접 쓴 연극이야. 한 번 읽어 봐.”
정리된 노트를 건네자 다이스는 정중히 노트를 건네받고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까.
다이스는 노트를 덮으며 경외하는 눈빛으로 알렌을 쳐다보았다.
“저, 혹시 도련님. 무례한 말이지만, 혹시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파셨습니까? 어떻게 이런... 아직 젊은 나이신데도, 정말이지... 뭐라 표현할 수가 없군요.”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
재능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다.
“이빨 털기는. 하여튼, 스토리 기억했지?”
“네.”
“그럼 이제 뭘 해야 할지 잘 알겠지?”
“네. 새롭게 짠 시나리오로 연극, 그리고 사용인들에게 소문을 퍼트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비비안 영애가 여주인공이라는 점도 빼먹지 않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답변이다.
이래서 머리 좋은 놈을 부하로 두면 일이 편하다.
“좋아. 그러면 바로 실행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이스는 허리를 숙여 알렌에게 인사하고는 사용인 기숙사로 돌아갔다.
“잘 돼야 할 텐데.”
걱정이 된다.
설상 소문이 퍼져 어쩔 수 없이 비비안이 여주인공 역을 맡는다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기는 잘할 수는 있는지.
애초에 거절을 전제로 하지 않을까?
또 다른 급식이 여주인공을 맡는다고 한다면?
다이스한테 맡기는 불확실한 도박.
그러나 나는 확실히 원한다.
내가 로미오. 비비안이 줄리엣이 되는 것을 아주 명백히 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배가 고프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점심도 못 먹고 계속 노트에매달려 시나리오를 썼으니.
“먹고 생각하자. 먹고.”
슬슬 어두워지는 하늘.
알렌은 느릿한 걸음으로 조금 전의 고민은 날려버리고 오늘 저녁이 무엇이 나올지 기대하며 식당으로 걸어갔다.
****
탁.
“무슨 약속 했어.”
“...?”
쌓여만 가는 깨끗하게 빈접시 사이 맞은편.
그곳에는 저녁으로 나온 오므라이스를 허겁지겁 먹는 알렌의 앞에 청백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묶은, 포니테일을 한 비비안이 앉으며 묻는다.
입안에 든 오므라이스를 삼키며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비비안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알렌.
“미안한데 무슨 약속을말하는 거야?”
“오늘 아침.크리스틴 언니랑 뭘 약속했어?”
‘봤나? 안 보이길래 오늘은 안 나온 줄 알았는데?’
“알렌 메스티아. 대답해.”
오므라이스 소스가묻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는 알렌은 테이블에 놓인 물을 마시며 비비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체육 창고 앞에서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말 안 해줄 거야?”
“흐음... 크리스틴 선생님한테 물어봤어?”
“아직. 물어보진 않았어.”
포니테일이 흔들리며 고개를 젓는 비비안.
“너는 내가 말해줄 거라고 생각해?”
“물음에 답해주면 좋겠어.”
“그러고 싶지만, 둘만의 약속이라서.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건조금 그렇지 않을까, 비비안 아락시스?”
호수처럼 잔잔한 푸른 눈.
“말해줄 생각이 없나 보네.”
“내 부탁 들어주면 말해줄 생각이 날 것 같은데. 부탁 들어줄래?”
“이상한 부탁이면 쌓인 접시로 네 머리를 때릴 거야.”
‘...섬뜩하구만.’
무의식적으로 쌓인 접시를, 내가 먹어 치운 접시를 보았다.
“빨리 말해줘.”
“이상한 부탁만 아니면 안 때리는거지? 그럼 이번 축제 때. 내가 쓴 여주인공 배역을 맡아줘.”
“알았어.”
“뭐? 방금 뭐라고... 했지?”
“여주인공 역할 맡는다고 했어.”
‘황당하네. 뭐지?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나?’
“이봐, 비비안. 어떤 연극인지도 모르면서 대뜸 여주인공 배역을 맡는다고?”
“그래.”
“네가 말한 이상한 연극이면 어쩌려고 그래?”
“아카데미 축제에서 이상한 연극을 허락하겠니.”
‘맞는 말이지.’
“그러니 빨리 말해줘. 크리스틴 언니랑 무슨 약속을 한 거야? 언니 얼굴이 빨갛던데.”
“별거 아니야. 그냥 주말에 같이 식사하자고 권유했어.”
“크리스틴 언니좋아해?”
“훅 들어오네. 그런데 약속했던 건만 말해주는 거 아니었나? 사적인 질문은 좀 그런데?”
“알았어. 더는 묻지 않을게.”
그렇게 말한 비비안은 가져온 오므라이스를 먹기 시작했다.
“하여튼, 약속한 거 말해줬으니까. 여주인공 하는 거다? 응?”
“알았으니까, 밥이나 먹어.”
비비안은 무덤덤하게 오므라이스를 먹고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왜 금발 소년의 맞은편에 앉은 건지도.
굳이 약속에 대해 캐묻는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너. 연기는 할 줄 알아?”
“할 줄 알아. 괜찮은 척하는 건 자신있으니까.”
“그럼 다행이네. 내가 쓴 연극은 연기력이 아주, 많이 필요한데. 정말 자신 있지?”
“쓰레기 같으니라고...”
일순 비비안은 숟가락을 놓고는 싸늘한, 벌레만도 못한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원래 얼굴로 돌아온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는 다시 숟가락을 들어 아무렇지 않게 오므라이스를 먹는 비비안을 본 알렌은 입을 살짝 벌려진 채였다.
“흐, 흐음... 연기는 쪼오그음 하네. 쪼오그음...”
헛기침하며 일순 달라진 모습에 충격받은 알렌은 살짝 말을 더듬는다.
‘나보다 잘하네...’
그렇게 알렌은 숟가락을 들어 오므라이스를 먹으려는순간이었다.
“대본은 언제 나와.”
잘 먹고 있던 비비안이 갑자기 대본은 언제 나오느냐는 말에 알렌은 입에 넣으려는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비비안을 쳐다보며 말한다.
“한, 이틀 걸릴 거야. 그건 왜 물어봐?”
“내가 여주인공이니 완벽히 대사를 외워야 하잖아.”
‘책임감도 있네. 어중이떠중이 급식이랑 다르네. 아니면 축제에 진심? 모르겠네.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오는지도 모르겠고.’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지만, 결과적으로는 비비안이 여주인고 역할을 해 준다고 하니 일단은 기뻐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알렌은 다시 접시 위에 놓은 숟가락을 들어 오므라이스를 먹이 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