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62-2 미친년.
“반가워, 후배. 카페 이후로 처음 만나네.”
“그만두시죠.”
다음주 축제 준비로 한창 바쁜 와중.
2학년 교실에 홀로 남아 기다렸다는 듯이 알렌을 반기는 파멜라.
“뭘 그만둬?”
파멜라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사탕을 물며 모른다는 손짓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다 알고 왔습니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후배. 오늘부터 나랑 연인하자.”
“제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뭐 어때?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능글맞게 사탕을물던 파멜라가 내게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매혹적인 제안.
다른 사람이라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겠지만.
나는 아니다.
파멜라는 저주받은, 이상한 아이템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소위 컬렉터 기질이 있다고 할까.
처음에는 신기한, 특별한 아이템을 모으기 위해서 온갖 권력과 재력을 사용하며 원하는 아이템을 소유한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질릴 때가, 언젠가는 쓰는 것보다 더 좋은 아이템이 나오길 마련이다.
그렇다면 남은 아이템은 어떻게 되는가?
‘창고’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세계에서, 먼지를 먹으며 살아가고 싶진 않다.
“제가 뭘 원하는 줄 알고 들어주신다는 거죠?”
“무엇이든 좋아.”
“그럼 제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겁니까?”
“원한다면.”
책상 서랍에 손을 넣는 파멜라는 웃으면서 그것을 꺼내 들었다.
아니, 애초에 책상 서랍에 저런 걸 넣고 다니는 파멜라의 도가 넘는 행동.
“칼. 내려놓으세요.”
알렌의 만류.
그러나 파멜라는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어때? 나의 것이 된다면야 내 목을 이렇게 샤샤샥~! 그을게. 그러면 되겠지?”
햇빛을 머금은 시퍼런 칼날이 붉게 타오르며 파멜라는 스스로 새하얀 목에는 아주 작은 선혈을,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칼과 새하얀 블라우스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일단, 내려놔요.”
파멜라의 안전은 어떻게 되든 솔직히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 미친년이 자신의 목에 칼을 갖다 대며 대놓고 피를 보여줄 리는 없다.
지금의 행동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저지르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파멜라 선배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문에 서 있던 알렌은 여전히 목에 칼을 들이댄 파멜라를 향해 힘차게 걷는다.
그리고는 피가 배어난 칼을 뺏어 들자 파멜라는 천진난만하게 웃기 시작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하거든? 친하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자해하며 죽는다고 몸소 보여주면...”
“저는 협박 같은 거 안 통하는데요.”
“맞아. 안 통할 것 같더라. 그러니까 더 가지고 싶은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가지고 싶어.”
자상이 난 목을,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혓바닥을 내밀어 할짝거리는 파멜라.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너를 꼭 가지고 싶어.”
야릇하다.
흡혈귀가 손에 묻은 피를 핥아 먹는 모습이랄까.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모습은 내 시선을 붙잡아두기는 충분했다.
“요즘에는 웬 남자가 후배랑 자주 어울리던데.”
“궁금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어쩌다가 만난 사람입니다.”
“흐으응~ 그렇구나. 그냥 어쩌다가 만난 사람이구나~ 그러면 내가 박살 내버려도 되는 거지~?”
해맑은 목소리로 박살을 낸다고 말하니 이것 참... 말이... 쉽게 안 나온다.
“그렇게까지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어쩌다가 만난 사람이라면서? 그러면 후배는 상관없잖아, 내가 뭘 하든? 막말로 후배는 후배일 뿐이지 내가 다른 사람을 박살 낸다는데 웬 참견이야? 아직 내 연인도 아니잖아? 응?”
늘어지는 말투가 바뀌었다.
“요즘에는 미약을 파는 파렴치한 사람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너무하지 않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약이 아니라 사랑을 줘야 하는데, 나처럼.”
제대로 미친년이네.
이거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 결판내지 않으면 이와 같은 일이 또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마시고. 저랑 거래하시죠.”
“싫어. 오늘부터 나랑 놀아.”
“파멜라 선배도 이득, 저도 이득인 거래를 하도록 하죠.”
“아니.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는데 거래를 왜 해? 후배는 조금 바보스러운 면도 있구나? 괜찮아. 나랑 있으면 그것마저, 단점마저 사랑으로 감싸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훗.”
시발. 말이 안 통한다.
“나는 기다리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어떻게 할래?”
“...싫어요.”
“이상하네? 보통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던데. 이상해. 정말 이상해.”
자리에서 일어난 파멜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알렌에게 무심히 다가간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무릎을 꿇던가, 아니면 살려달라고 거짓 눈물을 짜내는데, 우리 후배는 참 이상하네? 내가 말한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우리 후배가 내게 올까? 응? 한번 말해보렴.”
목소리는 똑같다.
그러나 눈이 무섭다.
죽은 사람처럼 생기 없는 두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끈질길 정도로 조건을 말해보라는 파멜라.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사줄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다면 밟아줄게. 더욱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면 지원할게. 뭐든 해줄게. 그러니 내 것이 되도록 해. 그 누구에게도 때 묻지 않은. 태어난 아기처럼 나만을 위한다면. 뭐든 줄게.”
위험하다. 한층 무거워진 분위기를 자아내는 파멜라는 내 가슴을 더듬으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왜? 왜? 왜? 왜? 왜?이렇게나,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아. 이런 행운과 기회는 네 인생에 결단코 찾아오지 않아. 그러니까, 내게로 와. 나라면 너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사랑할 자신이 있어. 믿을 수 없다면 계약을 해도 좋아. 너를 버린다면 이제껏 내가 이룬, 심지어 내 목숨마저도 후배에게 바칠 수 있어.”
점점 말이 길어지며 이제는 평소의 파멜라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나를 싫어해? 나는 후배 좋아해. 요즘 들어 부쩍 키도 크고. 남자다운 얼굴에다가 몸도 탄탄하고. 무엇보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 하며 누구에게도굴하지 않은 빳빳함이 마음에 든단 말이야. 아니면 내가 싫어? 머리카락을 자를까? 아니면 붉게 빛나는 눈을 파내어 다른 눈동자로 바꿀까? 아니면 내 몸이 마음에 안 들어?”
초조한 손.
파멜라는 알렌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말하기 시작한다.
“가슴은 좋아해? 아니면 약으로 더 키울까? 부작용도 없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가슴... 아니다. 혹시 작은 가슴이 취향이니? 그렇다면 이 칼로 내 가슴을 도려낼까? 혹시 키가 큰 여성이 좋으면 내가 약을 먹고 키가 클게. 반대로 발목을 자를까? 그러면 더 작아질 수 있어. 우리 후배의 취향대로 키가 작은 아이가 취향이라면 기꺼이 기뻐하며 무릎을 자를게.”
알렌의 손에 쥔 칼을 보며 섬뜩한 말을 쉬지 않고 내뱉는 파멜라.
“그만하시죠. 저를 그렇게 원하시는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저번에도 바로 앞에 있는 보물을 놔두고 다른 보물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하셨지만, 굳이 이렇게.”
“...싫어. 가질 거야. 나는, 파멜라 쉴버나스는 알렌 메스티아를, 후배를 원해. 그러니 나한테 와. 앞으로 내가 잘할게.후배가 원하고 명령한다면 명예나 체면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내게 전라로아카데미를 돌아다니라고 해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일 거야. 후배가 내게 옷을 벗고 즐겁게 해달라고 하면 그에 응하며 후배를 기쁘게 해줄 거야. 때려도 좋아. 아프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때리는 거잖아? 사랑의 매. 무엇을 해도 좋아. 나는 후배가 좋아, 나는 후배가 너무 좋아. 사랑해. 떠나지 말아줘. 나랑 평생을, 영원히, 설령 썩어 문드러진다고 해도, 영혼이 된다고 해도,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남부끄러운 망상을 하며 바랐던 것이 있었다.
어디 부잣집 아가씨가, 얀데레 아가씨가 나를 좋아해 주면 좋겠다는 그런 망상을 한 적이 있었다.
상상 속에서는 정말최고라고 여겼는데...
지금 직접 경험하니 이거... 존나 위험한 것 같다.
“좋아해... 사랑해... 그러니까... 네 모든 걸 부서트려서 다시는 고치지 못하게 하기 전에 나를 사랑해줘...”
파멜라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허와도 같은 붉은 두 눈동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이 원하는 것에게, 내게 미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내 주변 사람을 제거하고 다시는 빛을 볼 수 없게 만들 것이 분명한 두 눈동자였다.
“좋아해... 결혼하자... 지금 여기서 할까...?”
“진정... 일단 진정하세요. 파멜라 선배.”
“무슨 소리 하세요, 당신? 우리 이미 결혼했잖아요? 자, 여느 때와 같이 파멜라~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세요~ 헤헤~ 다녀오셨어요? 뭐부터 하실래요?”
무섭다.
이 한 마디로 파멜라를 표현하기는 부족했지만, 무서웠다.
“슬슬 우리도 아이를 가질까요? 당신과 저를 닮아 아주 예쁜 아기가... 아니야...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 사랑하는 자기의 관심이 아기한테 향하잖아요? 우리는 아기가 없어요. 맞죠? 사랑해요. 키스해주세요.”
홀로 망상하는 파멜라는 알렌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쪽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들이댔다.
“그만 하세요, 파멜라 선배.”
“...내가 싫은 이유가 뭐야?”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이 일순 원래대로, 아니 더욱 차갑게 변하며 알렌에게 묻는다.
“내가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사랑을 안 받아주는 거야? 혹시 다른 계집들 때문에 그래? 내가 그년들 죽이면 너는 나를 사랑해줄 거야?”
“그게 아니잖아요.”
“아, 좋은 생각이 났어!너와 잠깐이라도 말을 섞은 여자가 있다면 다 죽이면 되겠네? 그러면 후배 주위에는 나밖에 없잖아? 아, 잠깐만 기다려. 곧 해결하고 올게.”
허리에 닿은 손이 떨어지며 파멜라는 책상으로 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익숙한 물건이다.
현실에서는 본 적이 아예 없지만, 쏴본 적은 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사버렸지 뭐야~ 아주 예쁘지 않니? 이렇게 예쁜데 사람을 단숨에 죽일 수 있다니.”
리볼버였다.
“생각해보니까, 차라리 너를 죽이면 영원히 내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편이 더 재미있겠지? 그러니까 고르렴.”
총구의 끝이 나를 향하며 파멜라는 내 대답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