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데이트 해주세요(3)
"다음은 어디로 갈 거예요?"
안전벨트를 착용하며 그렇게 물어오는 수진이.
부천이 처음이라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모양이다.
부천은 처음인가. 그건 좀 기쁜데.
나도 수진이의 처음을 받아버린 건가?
...수진이가 하면 요망한데 내가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만화박물관"
"만화박물관이요? 한국에 그런 곳이 있어요? 신기하네..."
수진이는 스마트폰을 꺼내 만화박물관에 대해 찾아보고 있다.
나도 부천에 있다고만 들었지 처음이다.
왜 많고 많은 곳 중에 부천을 골랐는지 너는 모르겠지만 사실 난 부천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에 너를 데려와서 내가 가본 적 없던 장소를 둘러보는 게 오늘의 데이트 플랜이다.
내가 고등학생까지 살던 부천에서 너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
너에겐 그저 다른 사람들 시선을 피해 먼 곳으로 왔다는 생각뿐이겠지만 나에게는 잿빛투성이던 학창시절을 너라는 물감으로 덧칠하는 느낌이다.
기쁘다.
이젠 별생각도 나지 않는 나의 학창시절이 흐릿해지고 수진이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차를 세우고 만화박물관에 들어가니 일반권, 가족권, 단체권으로 가격을 따로 받았다.
나는 가족권에 잠깐 시선을 줬다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일반권 2장을 계산했다.
그녀는 그 돈마저 계산하려 했으나 원래 첫 데이트에선 남자가 가오를 부리는 것이니 기 좀 살려달라며 그녀를 말렸다.
"그래요? 그럼 그래야죠."
그렇게 말하며 다시 지갑을 집어넣는 수진이.
나의 말이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미소를 보인다.
드디어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됐다.
박물관은 말 그대로 박물관이었다.
정말 틀딱이다~ 싶을 정도로 오래된 만화책들이 박물관이다! 싶게 전시된 곳.
우리는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서로 발걸음을 늦추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생님. 이만화 본 적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본 적도 없는 낡은 만화를 가리킨다.
"몰라. 오늘 처음 봐."
"에? 그래요?"
짐짓 놀란 표정을 짓는 수진이.
울컥했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그렇게 살짝 뚱한 표정을 지으니 수진이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어른을 놀리는 분충은 용서하지 않아요!
...이런 그쪽 사이트에서 인기 있는 작품들을 보다 보니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나 보다.
나는 잡생각을 머리 한 구석으로 치워두고 데이트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눈에 띈 코너.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놀이가 가능한 모양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고 지는 사람이 밥을 사준다는내기를 했다.
수진이는 자신만만해 보였지만 라떼는 놀게 없어서 딱지나 종이비행기 같은 종이를 가지고 노는 게 놀이의 전부였다.
그래. 종이비행기의 스페셜리스트란 말이지.
"와 쩔어!"
수진이는 요즘 아이들처럼 호들갑을 떨며 내가 날린 비행기가 엄청 멀리 날아갔다며 어떻게 접었는지 알려달라며 종이를 건네왔다.
활발하고 귀여웠다.
그렇게 종이비행기 코너를 지나쳐 다른 만화를 둘러보니 내가 아는 만화가 나타났다.
"어, 외인구단."
그렇게 말하고 잠깐 멈춰 섰더니 수진이도 "아, 이건 저도 알아요." 라고 한다.
네가 이걸? 의왼데.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어"
그건 예전 드라마가 되었을 때의 주제가였다.
나는 정말 의외라는 시선을 향한다.
"엄마가 이 노랠 좋아하거든요."
그렇구나.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라서 찾아본 건가.
엄마... 그녀의 입에서 가족에 대한 화제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늘은 나에게 좀 더 마음의 문을 열어준 느낌이다.
내가 파고들 틈새를 얼핏얼핏 보여주고 있다.
"그래? 우리 어머닌 아톰을 좋아하시는데."
"그래요?"
수진이와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눈에 띄는 만화책이 있었다.
"아, 이건 밍크네, 우리 반 여자애들이 좋아했는데."
일본의 만화잡지처럼 우리나라에도 만화잡지가 있었지.
우리 반 여자애들이 좋아하던 순정만화 잡지 `밍크`
한때 여자애들이 돌려본다고 학교에 가져왔다가 선생들한테 뺏겨서 밍크를 가져왔던 여자애는 손바닥을 맞고 엉엉울고 돌려보다 걸린여자애는 손바닥을 맞아 아파하면서도 밍크를 가져왔던 여자애에게 미안한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지.
그것도 다 추억이다.
음... 오래된 만화나 잡지가 있는 만화박물관을 찾아온건 잘못된 초이스였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나와 수진이 사이의 세대차이만 더 깊어진 기분이었으니까.
내 선택을 잠시 후회하다가 검정고무신에서나 나올법한 낡은 만화방이 보여 안으로 들어가봤다.
수진이는 나를 바라봤다가 주위를 둘러보곤 다시 나를 바라봤다.
"옛날 생각나세요?"
난 그렇게까지 틀딱은 아니야!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수진이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나는 가볍게 그 말을 무시하곤 걸어갔다.
"같이 가요!"
수진이는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삐졌어요?"
"아니."
"그럼 잠깐 멈춰봐요."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선생님!"
당황해서조금 큰 소리를 낸 수진이.
나는 장난에 성공한 꼬마 같은얼굴로 고개만 살짝 젖혀서 수진이를 쳐다봤다.
"화장실까지 따라오려고?"
그제야 수진이는 내가 화장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으으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수진이를 두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점심 때 한방 먹었던걸 갚아준 기분이라 생각보다 통쾌했다.
아무튼 지금까지 분위기는 좋다. 이대로 잘 유지해야지.
이 다음으로 갈 곳은 하이주다.
생기발랄한 여고생과 동물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뭔가 그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지는 듯하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하꼬 작가가 아닌 붓을 놀리는 화가라면 수진이가 토끼에게 먹이를 주며 귀엽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을 새하얀 도화지에 담아낼 수 있을 텐데.
직접 보진 않았어도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겠지.
수진이가 하이주에서 보여줄 모습을 상상하며 조금 신이 난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주위를 둘러보자 화장실을 등지고 조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수진이.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아까 봤던 일반권 밑에 있던 가족권이 떠오른다.
아이들을 이끌고 오랜만에 가족 나들이를 나온 부모들이 보인다.
넘어진다고 천천히 걸으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도 보이고 졸리다고 칭얼대는아이를 팔에 얹고우쭈쭈하며 그런 아내를 따라가는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아내의 얼굴에선 짜증이 아빠의 얼굴에선 피곤이 보인다.
하지만 묘하게 어깨의 힘이 빠져있는 모습.
그림으로 그린듯한 4인 가족의 모습이었다.
"내가좀 늦었나?"
처음 만났을 때 했을 진부한 대사를 뱉어본다.
수진이는 멍하니 가족들을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 표정은 뭐랄까...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괴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애틋하게도 보이는 눈빛.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이렇게 흔들리는 수진이를 보는 것은 그날 카페 앞에서 도망치던 날 붙잡던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
하이주로 가려던 차를 근처 카페로 몰았다.
수진이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 데이트 플랜보다 수진이가 지은 표정의 의미가 더 중요했으니까.
카운터에서도 입구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장소.
우리는 평소처럼 그곳에 앉았다.
처음엔 서로 등을 지고 앉으려고 하다가 어차피 이곳엔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없으리라 생각되어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상태.
수진이는 머그컵을 양손으로 붙잡고 컵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손을 녹였다.
아니, 어쩌면 딱딱해진 마음을 녹이고 있는 지도 모르지.
멍하니 커피를 내려다보던 수진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들었다.
"옛날 생각이 났어요. 아빠랑 엄마, 지금은 군대에 간 오라비랑 소풍 갔을 때가 갑자기 떠올라서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계속 커피잔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아빠가 다른 여자랑 팔짱을 끼더니 뽀뽀를 하더라구요. 처음엔 멀어서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수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지만 그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무거운 내용이었다.
"너무 놀라서 아닐 거다 아닐 거다 하면서 근처 건물에 숨었어요. 그리곤 아빠한테 전화했죠. 오늘 학교 일찍 끝났는데 아빠 어디냐고, 오늘 일찍 퇴근하면 같이 초밥 먹자며 평소처럼 말을 걸어볼 생각이었어요."
수진이는 그리 말한 다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앞에 남자가 여자에게 뭐라 하면서 차에서 내리고는 전화를 받더라구요. 무서웠어요. 아빠가 너무 밉고 지금당장 달려가서 저 여자 누구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집에 있는 엄마랑 매일같이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 듣는 멍청한 오라비가 떠올랐어요."
수진이의 눈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요망하고 매력적이던 눈빛이 지금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저만 조용히 있으면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못 본 것처럼... 없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어요. 하지만 그 일이있고 5개월 후에 결국은 터져버렸어요. 꼬리가 길면 밟히나 봐요. 할 거면 조심이라도 할 것이지. 가족들이랑 마주치는곳에서 그럴 건 뭐람..."
수진이는 할 말을 다 했는지 입을 꾹 닫았다.
그러게. 도대체 그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가족들이랑 마주칠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사실은 아내에게 바람을 피고 있다고 말하는 게 두려워 바람피는 모습을 들키고 싶었던 걸까.
"대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이혼 이야기가 오고 갔어요. 아빠는 우리를 버려놓고 떠났어요."
"그..."
뭔가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잘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선 어떤 말을 꺼내야할까.
"아침에 일어나서 식탁으로 향하면 엄마가 밥을 해줘요. 하지만 그전과는 달리 식탁에 밥그릇이 세 개만 올라가있죠. 그냥, 그런 상황이 됐어요."
할 말을 전부해서 후련해졌는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수진이.
나는 수진이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상상해보았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 또래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았겠지.
그런 수진이의 삶에 찾아온 불운.
그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가정의 식탁을 지키려고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면서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기를 하던 너.
무슨 기분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나잇값도 못하는 자신의 오빠를 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요리를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짐짓 무게를 잡고 평소같이 지내지만, 마음속엔 다른 여인을 품고 있는 쓰레기를 보면서.
동상이몽.
겉에서 보기에는 그림으로 그린듯한 단란한 4인 가족.
그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일상을 지키려던 수진이의 서글픈 발버둥.
나는 인제야 수진이를 조금 이해한 기분이었다.
섬세하면서도 치밀한 묘사가 장점인 천재 작가.
나와는 다르게 본인만의 독특한 감성을 가진 아이라고 생각했다.
적은 사회경험을 했어도 상상력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충분히 많으니까.
하지만 이젠 알겠다.
수진이의 소녀 같지만 어른 같은 언밸런스함의 이유를.
반에서 1~2명 정도 애늙은이 같은 친구들을 본적이 있다.
친구들이 만화며 게임이며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무슨 재미가 있느냐면서 따분한 표정이나 애수가 감도는 질척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아이들 눈에는 낯설게 보이고 재미도 없는 녀석이지만 그 녀석들은 일명 일찍 철이 들은 아이라는 존재다.
왜 일찍 철이 드는가? 이유는 많을 것이다.
머리가 좋아서 다른 애들과는 시선이 다를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애들은 대부분 눈치가 빠른 아이들이다.
눈치가 빠른 애들은 감정에 굉장히 민감하다.
어려운 집안 사정, 팍팍해진 분위기.
애들은 공부나 하라며 인상을 쓰고 부부싸움을 반복하는 부부.
자신들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 아이들을신경쓰지 못하고 아이들이 뭘 알겠냐며대수롭게 넘기지만 아이들은 다 안다.
어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집안에 분위기가 더 나빠지는 게 두려워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를 연기한다.
그리고 그 연기가 곧 그 아이의 성격이 되어버리지.
그래. 마침 내 앞에 앉아있는 저 아이처럼 말이다.
매우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수진이.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그녀는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어린아이로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