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변화(1)
수진이와 통화를 한 다음 날.
나는 평소와 같이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지저분해진 턱수염을 깎고 코털은 삐져나왔는지 눈썹은 너무 너저분하게 자라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좋아. 오늘도 깔끔하다.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아내가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하고 있다.
아내의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그녀 나름의 행동이겠지.
나도 아내의 `착한 척`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요즘은 아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 나는 퇴근해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그런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아내는 내 행동을 보고 화해를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지.
이미 내 마음엔 다른 여성이 들어와 있다.
난 요령이 없어서 동시에 두 명의 여자에게 마음을 주진 못한다.
그저 별 탈 없이 이혼을 하기 위해 예전과 다를 바가 없음을 어필하고 있을 뿐이다.
그걸 제외해도 난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뭔가를 받는 게 상당히 꺼려져서 아침 식사를 대접받았으면 돌려준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있잖아."
"어."
밥을 먹다가 들려온 소리에 아내를 힐끔 바라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우물쭈물하고 있다.
나는 아내를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으면 다시말을 걸겠지.
나는 아내가 차려놓은 밥상을 내려다봤다.
밥솥으로 지은 쌀밥, 국은 지난밤 내가 끓였던 쌈장 된장찌개다.
내가 아내에게 처음 레시피를 알려줬더니 맛있다며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했던 그 요리.
반찬은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우린 둘 다 직장인이라 반찬은 해먹는 것보다 사서 먹는게 더 편했으니까.
"오늘은 언제 돌아와?"
"알잖아?"
"그래? 그럼 있잖아... 이번 주 일요일은 시간 괜찮을까?"
"일요일?"
"응, 5월 24일."
"잠깐만."
나는그날이 뭔 날이 있는지 잠깐 생각해본다.
휴대폰의 일정도 살펴본다.
학원행사나 다른 일도 없다.
"월요일 수업준비 시간을 빼면 오후 5시까진 괜찮겠네."
나는 휴대폰을 보며 그렇게 고한다.
그러자 "그래~"하며 나를 보는 그녀
"그럼 이번 주 일요일에 잠깐 마트 좀 다녀오자."
"마트?"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
"냉장고에 뭐 먹을 게 없네. 오랜만에 다녀오자."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한 아내.
확실히 밥상이 좀 빈약하긴 하지.
"그래. 뭐, 그러지."
고개를 끄덕이곤 식사를 계속했다.
우리의 관계도 곧 끝이 나겠지만, 그때까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기보단 말이라도 통하는 게 그나마 낫겠지.
내가 아내에게 보여주는 행동은 딱 그 정도의 의미 만을 담고 있다.
***
상쾌한 아침 공기.
이제 5월도 곧 끝이 난다.
오늘이 지나면 주말이라 한동안 수진이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구나.
이 가슴의 초조함은 금연으로 인한 금단 증상일까 아니면 그냥 수진이에게 미쳐버린 걸까.
초조한마음에 강의준비실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뚜벅뚜벅 걷고 있으려니 어느새 흡연실에 도착했다.
그래. 내가 갈만한 곳이 학원준비실, 강의실, 화장실을 제외하면 여기밖에 없긴 하지.
금연을 해도 습관은 좀처럼몸에서 빠지지 않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흡연실에 와버렸다.
이 시간엔 아무도 없겠지. 있다면 그건 상상을 초월하는 꼴초가 아닐까.
"어, 금연하셨으면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뭐야. 있었네.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네오는 인한 강사.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거 보니 완전 니코틴 중독인데 금연에 성공하려나 모르겠네.
그는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냈다.
"이번 전자담배는 냄새도 프레쉬하고 니코틴양도 확 줄인 물건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새로 산 전자담배에 대해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데...
아니, 들어주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누구나 능변가가 되는 법이니까.
나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며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낙타는 다 피셨어요?"
"..."
다 핀듯하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좋았습니다. 낙타. 제가 피던 거랑 다른데 모던한 느낌이라서."
모던이고 자시고 담배는 그냥 피우는 순간에 기분이 좋으니까 피는 거지.
황당하지만 인한강사는 담배에서마저 뭔가 패션을 추구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의 재미없는 전자담배 이야기가 지겨워져 화제를 돌리려고 했는데 알아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월억킥 작가가 쓰는 `작가 초대`요즘 진짜 물오른 거 같더라고요."
다행히도 그가 이번에 꺼내 든이야기는 나도 잘 아는 이야기다.
"재밌죠. 내용이 생생해서 보는 재미가 있어요."
"그죠? 특히 그 작가가 도적 떼들 상대하는데 처음으로 살인을 경험하곤 손을 덜덜 떨면서 충격을 받는 장면은 굉장히 실감 나더라고요."
그렇지. 나도 동감이다.
"그걸 보다 보니까 걍 쓱싹하고 으엑!하고 죽여버리는 요즘 사이다패스 소설들이 좀 싱거워졌어요."
요즘 독자들은 그렇게 염병 떠는 묘사를 싫어한다.
그러니 사이다에 사이다에 의한 사이다를 위한 소설이 유행하는 건데 모두가 다 유행을 즐기지는 못하지.
나 같은 인간처럼 말이다.
그러니 수진이가 쓰는 소설은가뭄 속의 단비 같은 소설이다.
"그런데 좀 의외네요."
"뭐가요?"
"전 요즘 용사였던 주인공이 전투하는 묘사가 힘이 빡들어간 게 느껴져서 그걸 좋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아 그것도 좋죠. 뭔가 이렇게 기사들 싸우는 거 보면 그냥 갑옷이 천 쪼가리처럼 찢어지는데 왜 입고 있나 싶은데 그건 다르죠."
"예, 갑옷의 무게를 실어서 공격하거나 달라붙어서 휘두르기 곤란하게 된 검은 그냥견갑으로 흘려내고 목으로 검을 찔러넣는다든지 묘사가 좀 세밀하긴 해요."
그것 말고도 두꺼운갑옷의 이점을 살려 완벽하게 피하진 못하더라도 공격을 흘려내는 기사들만의 중갑 방어술 등등.
유파에 따라 다른 무기를 사용하며 유파마다 특별한 필살기를 사용해서 적을 죽이는 일격필살의 공격 등 전투씬은 뭔가 진짜 기사들의 싸움 같아서 멋있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소설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꺼냈더니 인한 강사가 제법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이야, 준수 강사님. 혹시 강사님이 월억킥 작가 아니에요? 이거 뒷광고 각인데?"
"제가 월억킥이면 강사 안 하죠."
"아하하하하하하!"
한참을 웃던 인한 강사는 전자담배를 쓰읍하고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다음 보는 이쪽이 기분이 좋을 정도로 시원하게 내뱉었다.
"뭔가 준수 강사님이 이런 분이신지 몰랐는데 말이에요."
"이런 분이 뭡니까?"
"뭔가 이 세상엔 관심이 없다. 지루하고 따분하다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지금이 더 좋네요. 네, 보기 좋아요."
그리 말하며 시원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는 인한 강사.
당신 눈에도 내가 좀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건가.
"뭐, 결국 이리 사나 저리 사나 똑같다는 걸 알았거든요. 이왕 살다 갈 거 건강하고 즐길 거 즐기다 그렇게 갈렵니다."
"하하! 좋네요. 그거. 오늘만 산다. 뭐 그런 겁니까?"
"그럴 거였으면 담배는 계속 피우겠죠. 아, 그리고 저보다 인한 강사님이 더 의외네요."
"저요?"
"예, 대충 휙휙 넘기면서 읽을 거 같은데 의외로 꼼꼼하게 읽으시나 봐요."
"저를 지금까지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자판기 커피같은 남자?"
"거참 실례되는 사람이네."
우리는 아무도 오지 않는 흡연실에서 별것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잠깐 시간을 보냈다.
***
"뭐 그런 느낌이야."
"헤ㅡ, 의외네요. 그런 점."
"뭐가."
"또 뭐가래. 뭐가 뭐가 뭐가, 흣흐. 크흠.전 선생님은뭔가 인간관계가 좀 더 심플한 줄 알았어요."
심플? 이거 악담 아닌가.
아니, 심플하긴 하지.
수진이를 제외하면아내와 했던 연애가 처음이었고 친구들이랑 같은 초중고를 다녀서 친구들도 다 초등학생 때부터 알던 녀석들이다.
대학 친구들도 몇 명 친하게 지내던 녀석들도 있지만, 지금은 연락처도 모른다.
심심할 때마다 전화나 카톡이나 문자로 안부를 전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먼저 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니 그런 이유로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겠지.
나는 나의 생활권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눈에 닿는 위치에 있지 않으면 서서히 나의 관심에서 멀어져간다.
한때는 정말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던 아버지도 이젠 그 새끼에서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항상 잘해주시던 어머니를 한때는 모시고 살려고 생각했으나 이젠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차갑게도 느껴지지만 나란 인간은 원래 이런 녀석이지.
그래도 나쁘기만 한건 아닌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으니까.
신기하다. 10년이 넘게 쌓아온 악감정이 어느 순간 희석되기 시작하다니.
이게 다 수진이와 만나서 생긴 변화겠지.
아주 조금씩 하지만 뚜렷하게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
"맞아."
내가 본인의 말을 긍정하는답변을 해올지는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기색이 어깨너머로 전해져온다.
"이젠 아니고."
당황할 필요 없다.
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 나잇대의 인간들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뿐이겠지.
하지만 조금은 나아졌다.
강인한 강사.
단순히 철없던 인간이 결혼하고 팔불출로한 단계 진화한 줄로만 알았던 그가 이렇게 달라 보이지 않나?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남자다.
그는 그런 남자였고 지금까지 계속 그런 남자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그래.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만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지는 거다.
나는 이제야 주변 사람들에게 품고 있던 열등감을 떨쳐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좋네요. 그런 거."
그리 말하곤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는 수진이.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그래. 너의 웃음소리는 카푸치노 같다.
매번 아메리카노랑 케이크를 시키더니어느 순간부터는 카푸치노를 시키고 있는 너.
너 역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가고 있는 걸까.
그 변화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오늘 하루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운동을 통해 튼튼해지기 시작한 내 몸처럼 내 내면도 변화하고 있다.
이젠 아내가 기다리는 전셋집도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
아니, 이건 그것만의 문제가 아닌가.
아내가 기특하게 행동하니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거겠지.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앙칼지게 잔소리를 하던 너.
내 잔소리엔 개가 짖는다는 듯이 시큰둥하던 너.
내가 어떤 데이트 장소에 데려가도 지루해 보이고 어떤 선물을 줘도 기뻐하지 않던 너.
내가 모쏠이었다고 해서 병신은 아니었다.
아무리 입가에 미소를 띄워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와 억지로 짓고 있는 미소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장애인은 아니라고.
술을 먹고 폭언을 토해내기 전에도 나와 너는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꼭 맞선을 본 그때 그 순간처럼 기특한 척을 하고있다.
그래 봤자다.
너랑 수진이는 모든 게 달라.
수진이는 매우 사소한 것도 고마워한다.
금연하려니 입이 심심해서 샀던 사탕을 몇 개 줬을 때 수진이는 굉장히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당뇨병이 올지도 몰라 사탕은 그만두고 은단을 사서 먹기 시작하자 수진이는 내가 먹는 은단이 신기했는지 본인도 먹어보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었다.
`음, 뭔가 이상한 맛인데 중독되네요?`
그리 말하며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 줘요.` 라며 손을 내밀던 수진이.
이렇게 비교를 하니 명확해진다.
사람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아.
기특한 척을 해봤자다.
사소한 선물에도 순수한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을 만난 지금 나에겐 아내의 모든 태도가 가식적으로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