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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밀당의 고수?(1) (24/301)



〈 24화 〉밀당의 고수?(1)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표정이 사라져서 딱딱하게 굳은 수진이의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해져서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항상 이렇다.

나는 이런 돌발적인 상황엔 몹시 취약했다.

수진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그러시구나..."

수진이의 시선이  눈을 향하고 있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갑자기 눈을 부릅뜨는 그녀.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나의 왼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왼손을 오른손으로 스윽 가려버렸다.

이게... 이렇게 되다니.

나는 지금왼손에 결혼반지를끼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게 없는 김준수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아내의 앞에서는 끼고 다니던 반지.

오늘은 오랜만에 아내와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옆에 있으니 반지를 낀 채로 밖으로 나왔는데  반지를 수진이가 보게 된 상황.

수진이는 어떤 기분일까.

아내와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고 사귀지는 않지만 그런 분위기를 타고 있던 남자가 사실은 아내랑 사이좋게 주말에 쇼핑을 하는 모습을 발견한 상황.

만약 이 상황이 반대라면 어땠을까.

수진이에게 전 남친이 있었고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만나고 있는 장면을 봤다면...

나는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하지만 수진이는 달랐나 보다.

나에게서 시선을 피해서 아내를 바라보는 수진이.

"데이트 중에 방해해서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며 태연하게 사과를 하는 수진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니에요~"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고 하는 아내.

사뭇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럼 수고하세요~"

수진이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응?"

아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아파서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어찌어찌 계산을 마치고 짐을 차에 싣고 운전대를 잡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수진이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까 그 여자애."

"응?"

나는 수진이를 찾는 아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뭔가 이상하네..."

"뭐가?"

"마트에 들어왔는데 빈손으로 나갔잖아."

아.

그렇구나. 그러네...

수진이가 너무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반응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수진이도 당황했겠지.

수진이의 태도가 너무나 어른스러워서 착각했을 뿐이다.

"생리대라도 사러 왔는데 뻘쭘했나 보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아내는 내 말이 그럴싸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렇게 여심 마스터가 되셨대?"

"10여  간 서 있어 봐. 여학생들이 뭘 좋아하는진 몰라도 뭘 싫어하는지는 알게 되니까"

"후후, 완전 직업병이네."

다행히도 아내에게서는  이상의 추궁은 받지 않았다.

***

금연을 막 시작했을 때보다 초조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전화를 하면 수진이는 전화를 받을까?

나라면 전화를 차단해버릴 거 같은데.

카톡이라면 어떨까? 뭐라고 운을 떼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벌써 1시간이다. 1시간이 넘도록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다리만 떨고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말을 꺼내기 힘들어진다는  알고 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 냉수라도 마시고 속이라도 차리자.

그런 마음에 부엌으로 향하니 아내가 부엌에 서 있었다.

"뭐해?"

"여보... 하아."

한숨을 쉬는 아내.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나다 여편네야.

씨팔!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갔다 왔으면 잘 굴러가는 건데.

뭐가 잘 풀린다 싶으면 꼬이고 꼬인다.

"내일이 우리 결혼기념일인  알아?"

아ㅡ 그랬나.

어쩐지 갑자기 마트를 가자고 하길래 왜 그러나 했는데.

"어차피 내일은 월요일이고 서로 바쁘잖아. 그러니 미리 축하하자고."

그런데 까먹을 만도 하지 않은가?

우리는 2년간 서로의 기념일을 챙기지 않았다.

나만해도생일이 3월 30일이어서 이미 지나쳤고 말이다.

"내생일도 까먹는 남잔데 뭘."

"아하하! 그러네."

아내가 웃는다.

오랜만이다. 아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웃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내의 미소에서 반가움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뭐 선물이라도 사와야 하는 거 아니야? 말하지 그랬어."

마음에도 없는 말이 술술 나왔다.

신기하지. 요즘의 나는 이런 말도 술술 나온다.

"아니, 됐어."

아내는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며 웃었다.

기특하다 기특해.

아니, 기특해 보인다.

착각하지 말자. 아내의 이건 연기에 불과하니까.

나는 더 이상 호구도 병신으로 살지도 않을 것이다.

아내와 처음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태솔로였다.

글로만 연애를 배운 샌님이었다.

무협을 제외하고는 수능에 나올만한 모든 책은  읽어봤고 수필이든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다 읽었다.

남성 독자를 배척하는 부류의 로맨스와 무협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읽었단 말이다.

그래, 여성들이 주로 있는 로맨스 소설도 읽었지.

그 안에는 자신과 나눈 별것 없는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가 서프라이즈로 선물을 주는 남자 주인공의 세심함에 반한 여주인공의 이야기도 있다.

나는 그 소설을 보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입장으로 바꿔서 생각해보기도 했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어느새 자기주장을 하는 턱수염.

매일 면도를 하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지.

그 이야기를 연인에게 들려줬다고 하자.

아무 생각 없이 꺼냈던 이야긴데 연인이 선물이라며 전기면도기를 사다 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이건 설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기면도기의 가격 문제가 아니다.

내가 했던  볼 일 없는 이야기에 관심을 표했다는 그 사실이 더 기쁘게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결심했다.

아내의 별것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센스있는 선물을 하자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내의  생일이 찾아왔다.

7월 5일.

잠이 잘 오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면 뻐근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던아내.

나는 아내를 위해 숙면을위한 베개와 아로마 캔들을 준비했다.

내 입장에선 가장 센스있는 초이스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나에게서 선물을 받은 아내의 표정은 굉장히 미묘했다.

ㅡ고마워~ 그런데 이게 뭐야?

전혀 고맙지 않다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오는 고마워.

ㅡ아니... 요즘 자기가 잠이 안 온다길래.

그래. 그때의나는 아내를 자기라고 불렀었지.

ㅡ하아... 무슨... 아니야. 잘 쓸게.

그렇게 말하며 선물을 챙겨 넣던아내.

난 몰랐다.

센스있는 선물? 그런   헛소리라는 거다.

사소한 걸 기억해주고 눈치채주고 신경 써주는 남자?

그 앞에는 `잘생기고 인기도 많은`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성립하는 이야기다.

로맨스 소설인 거다.

작가의 망상과 독자들의 요구사항이 맞물린 시너지.

존잘남(능력있음, 주위에서 꺅꺅거리는 여자가 엄청 많은데 나만 바라봄)

이런 녀석이 주는 세심한 선물과 30대 한남이 주는 선물이 같을 리가 없지.

수많은 여자가 좋다고 들러붙는데 그런 여자들을 다 무시하고 본인만 사랑한다고 집착하는 남자가 있는데 존잘남에 능력도 좋고 사소한 대화 하나하나를 다 기억해준다?

그런 사람이 챙겨주는 선물이면 돌멩이를 줘도 반하겠다 야.

***

마트에서 깜빡하고 사지 않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뭔가 했더니 아내는 투명한 유리통을 하나 사온 모양이다.

"이게 뭐야?"

"응? 별건 아냐."

그리 말하고 방으로 들어간 아내는  분이 흐른 다음 아까 들고 들어갔던 유리통을 손에 들고 나왔다.

그 유리통엔 뭔가가 들어있었다.

"그게 뭐야?"

"아, 이거? 드라이플라워."

어느 순간 거실에서 사라졌던 장미.

시들어서 버렸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더니 말리고 있었나 보다.

드라이 플라워라니 들어는 봤는데 실물로는 처음 봤다.

아내는 드라이 플라워가 담긴 유리통을 TV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시선을 잡아끄는 위치다.

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TV를 켜고 소파에 앉는 남자라면 바로 눈에 들어올 위치.

나는 한참 그 드라이 플라워를 바라봤다.

수진이에게 갔어야  장미가 이곳에 있다.

머리가 딱딱 아프고 메스껍다.

아내가 갑자기 매우 징그럽고 역겨워 보였다.

왜... 왜 이런 행동을 하지?

그날  덮쳤던 건 실수였다.

너는 나를 한없이 초라한 남자로 만들던 여자다.

나는 당해도 그냥 네네 하며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여도 뒤끝이 있다.

언젠가 선을 넘으면 폭발해버리는 남자다.

내가 그냥 받아주니까 그랬나? 내가 쉬워 보였나?

내가 아다에 순진해 보여서 결혼을 선택했나?

너 정도로 생김새가 괜찮은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까지 수많은 남자들과 연애를 하겠지.

그렇게 수많은 남자를 거치고 거쳐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다 겪은 다음 지쳐서 편리한 남자를 찾았나?

아니면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예전만큼 좋은 조건의 남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나?

역겹다.

나와 화해를 했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억지를 부리는 너의 그 행동이 내 눈엔 그저 계산된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너무나 역겹다.

나는... 너에게 연애를 배웠다.

너를 통해 여자를 배웠다.

여자는 전부비싼 선물을 좋아하고 데이트엔 우아한 식당을 좋아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달랐다. 달랐던 거다.

수진이는 말이다... 수진이는 사탕을줘도 좋아한단 말이다.

내가 사탕을 주면 웃으면서  달라고 손을 내미는 그 천진난만함이 사랑스럽다.

수진이에게 준 생일선물. 로즈골드 18k짜리 귀걸이가 떠올랐다.

학생이 사기엔 조금 비싸지만, 그녀는 나보다 수익도 많고 쌓아둔 돈도 많아서 그녀 기준으론 푼돈의 불과한 선물.

수진이는 그 선물을 받고 교칙 때문에 착용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그 모습은 결코 연기로는 보이지 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수진이를 떠올려본다.

그녀가 데이트에 입고 왔던 옷들.

모르긴 몰라도 전부 가격이 나가는 비싼 옷들이겠지.

패션은 잘 몰라도 수진이가 입고 나왔던 옷들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나보다 돈도 많이 버니 마음만 먹으면 18k짜리 로즈 골드가 아니라 다이아가 왕창 박혀있는 사치스러운 액세서리를 마음껏 하고 다닐 수 있겠지.

그럼에도 내  별것 없는 선물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던 모습.

얼마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가.

그럼 너는 어땠을까?

내가 너에게  귀걸이를 선물했다면?

너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촌스럽고 싸구려 같다고 생각하겠지.

아마 화장대에 있는 장신구 함에 들어간 다음에 영원히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말 어리숙하고 멍청한 남자였다.

아내는 이미 몇 번이고 연애를 한 여성이다.

내가 엄청 특별하고 재밌는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생각하더라도  모든 것들은 이미 너를 거쳐 간 다른 남자들이 충분히 했을 법한 것들이겠지.

내가 뭘 준비해도아내에겐 다   일 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

알아버렸다.

알아버리고 말았다.

수진이라는 존재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준비한 작은 이벤트에도 환한 미소로 감사를 표현하는 그 아이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더는... 아내를 예전같이 생각할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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