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3화 〉고백(1) (43/301)



〈 43화 〉고백(1)

금요일이 되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수진이와의 세 번째 데이트가 시작된다.

그리고 데이트가 끝나는 그 순간.

나는 고백을 하고 지금의 관계를 끝낼 작정이다.

모가 될지 도가 될지는 모르겠다.

아니. 무조건 모가 돼야지.

도도 다섯 번이면 모다. 내 고백을 받아줄 때까지 부딪혀야지.

내가 도망치려고 했을 때 먼저 붙잡은 건 수진이다.

이번엔 내가 붙잡을 차례다.

솔직히 두렵긴 하다.

어느 정도 자신은 있다.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하리라.

어쩌면 한 번 만에 마음이 꺾일수도 있다.

나와 다시는 얼굴도 보기 싫다며 학원도 그만둬 버리면 만날 수도 없게 되겠지.

아... 갑자기 현상유지가 마렵다.

지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진이가  소설을 읽어보기로 했다.

내용이 궁금하진 않다. 지금은 그저 아주 작은 힌트라도 얻고 싶은 심정이다.

소설 속에 담겨있는 수진이의 심정을 알고 싶었다.

주인공에게 치근거리던 여자가 떠나갔다.

주인공과 그 일행은 최단기로 강해지는 효율 중시의 길을 고르려고 했다.

하지만 곧장 그 생각을 고쳐먹는다.

 회차에서 구할 수 있었음에도 포기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정된 수명으론 그들을 구하는  시간을 소비할 수 없었다.

전체를 위해 소수를 버리는여행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회차엔 수명에 제한도 없어졌으니  손이 닿는 범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해보겠다는 정통파 주인공 같은 다짐을 한다.

그 이후로 주인공의 행보는 그야말로 용사의 행보였다.

이전의 세계에선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구해주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범죄를 저지를 예정이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는 칼과 마법 그리고 야만의 세계다.

현대인들처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그들은 도움을 주는 주인공 일행을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주인공은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유가 없고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

꼭 전 회차의 자신을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이렇게도움을 주면 고마워했는데 지금은 어떤 대가를 받아갈지 두려워하는 사람들.

예전엔 달랐다.

전 회차에선 용사의칭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도움을 순순히 받았었지.

하지만 지금의 그는 용사가 아니다.

그래서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동화를 한 닢씩 걷은 주인공.

주인공은 사람들에게 본인은 용사의 동료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임무를 위해서 잠시 떨어져서 행동하고 있지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용사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자신의 목숨값이 동화 한 닢보다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용사님을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났다.

그 어리숙하고 멍청한 작가 놈이 사람들의 선의에 접해 조금이라도 달라지기를 빌면서 그의 용사라는 타이틀을 이용하기로 했다.

내용은 좋았다.

내용은 좋았는데 이 소설에선 수진이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저 주인공이 한층 더 성숙하고 입체적인 인물로 표현됐을 뿐이다.

다른 독자들은 어떤 반응일지 살펴보기로 했다.

갤러리에서는 어차피 성녀 원툴엔딩이 뻔한데 왜 굳이 쓸데없이 여자 집어넣고 분양시키느냐고 이래서 여자 작가들은 안 된다면서 수진이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수진이의 소설을 재밌게 보고 있는 독자들은 하렘충은 꺼지라며 수진이의 소설을 옹호하고 있었다.

중립 기어를 넣은 채 빌드업 일 테니 지켜본다는글도 많았다.

여러 의견이 난무했지만, 아무튼 소설이 재밌어서 소설 그 자체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약간 멀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들 사이에서 소설이 어쩌고저쩌고 하던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소설을 소설로 보지 못하고 수진이의 감정을 훔쳐볼 수 있는 창구로만 여기고 있다.

독자들의 반응은 평범했다.

결국, 수진이의 감정을 읽어낼 순 없었다.

불안하다.

무섭다.

이미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거절당할까  두렵다.

이성에게 고백한다는 행위는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구나...

***

"그러고 보니 영화는 처음이네요."

나와 수진이는 영화관에서 데이트하기로 했다.

매우 정석적인 데이트 플랜이지만 우리는 세 번째 데이트가 되어서야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게. 요즘은 영화관 오는 사람도 적어서 널널하겠네."

영화관을 둘러본다.

모르긴 몰라도 주말에 이렇게 사람이 적은 것은 처음 본다.

근래에 영화관을 오지도 않았고 같이 올 사람도 없었다.

"영화 좋아하세요?"

"뭐, 싫어하지는 않는데 찾아보지도 않지."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요."

수진이는 입가에 쓴웃음을 띄운 상태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수진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적한 영화관.

오늘 상영되는 영화는 굉장히 오래된 영화다.

로마의 휴일.

대충 줄거리는 이렇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로마를 찾아온 공주가 바쁜 스케쥴에 싫증이 나서 도망쳤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만다.

그런 그녀를 도와주었는데 후에 그녀가 공주인 것을 알게 되고 그녀와 함께하는 사진을 몰래 찍어서 특종거리로 삼으려는 기레기 짓을 하려 한다.

그러다가 둘이 서로에게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결국 그녀에게 특종거리로 쓸려고 했던 사진을 건네주면서 마무리된다.

로마에서 잠깐 휴일을 즐겼던 사내와 공주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

흑백영화지만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는 영화지.

우리는 그 영화를 보러왔다.

"선생님은  영화 보셨어요?"

"음. 2번은 본 거 같은데."

"아! 그럼 말씀하시지. 다른 영화 봐도 되는데."

"아니. 오랜만에 보고 싶어졌으니까 상관없어. 딱히 상영 중인 영화 중에 보고 싶은 것도 없었고."

"혹시 이 영화도 아내분이랑 보러오신 건가요?"

수진이의 물음은 생각보다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꼭 묻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물어보는 듯한 그 물음에서 그녀의 초조함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내 아내를 떠올리며 질투와 불안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니.혼자 봤는데."

"네? 영화를 혼자도 봐요?"

"어차피 오래된 영화라 집에서도 볼 수 있잖아."

"아, 그러네. 그렇구나."

 말을 들은 수진이는 조금 기뻐 보였다.

좋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영화관은 한산했으나 알바생도 있었고 팝콘과 음료도 팔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개인용 팝콘과 음료를 산 다음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이걸로 세 번째다.

같은 영화를 세 번이나 보면 솔직히 지루할 거로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옆에 수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영화에 굉장히 집중했는지 내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느낌이다.

나도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바라봤다.

영화의 오드리 헵번이 연기하는 앤 공주는 분명히 공주라서 연애는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수진이처럼 연애에서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아직 손도 못 잡아 봤는데 스페인 광장에서 웃으면서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손.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만난 지가 벌써 3개월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조차 잡지 않았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진이는 팝콘을 먹다가 음료를 마시고 다시 오른손으로 팝콘을 집어 먹고 있다.

그녀의 왼손이 팔걸이에 올라와 있다.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수진이.

너를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5.

순수하게 손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5.

나는 결국 수진이의 손에 손을 얹었다.

수진이가 깜짝 놀라 앉은 채로살짝 튀어 올랐다.

수진이가 깜짝 놀란 시선을 향해온다.

나를 바라보고 다시 손을 바라보고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본수진이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리곤 손을 뒤집어서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아쉽다.

이곳이 깜깜한 영화관이 아니었다면 수진이의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볼  있었을텐데.

 요망한 행동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있는 힌트가 될 텐데...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영화를 봤다.

이야기는 계속 전개되어 둘이 스쿠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장면에서 앤은 굉장히 과감하게도 주인공을 꽈악 끌어안았다.

과연 앤은 연애경험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여자들은 연애경험이 없더라도 저렇게 대담한 행동을 하는 걸까.

진실의 입에서 주인공에게 놀란 척 애교를 부리고 선상에서 춤을 추며 경호원을 피해 도망친 다음엔 키스씬이 나왔다.

하지만 이야기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점점 우울한 분위기가 되어가고 앤을 보내기 싫었던 주인공은 그녀에게 작업 멘트를 던진다.

하지만 앤은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녀는 이별 멘트를 고민하다가 주인공에게 키스하곤 그대로 떠나 버린다.

앤이 떠나가는 장면을 보며 이별의 아픔을 삼키는 주인공.

당당하게 대사관으로 들어서며  돌아올 줄 알았다는 사람들에게 왕실과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지 못해 돌아왔다는 명대사를 하는 그녀.

마지막으로 기레기로서 병신 짓 거리를 하려다가 포기하고 훈훈한 퇴장을 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나는 영화가 끝났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 손을 놓아버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영화의 뒷부분이 생각나서 뭔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수진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직원이 들어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을 보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진이가 손에 힘을 빼고 깍지를 풀려고 했다.

그래서 손에 힘을 주었다.

"선생님?"

"어차피... 어차피 마스크 때문에 누군지도 못 알아봐. 난 안경도 쓰고 있고."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수진이는 내게 손을 붙잡힌 채로 끌려오는 느낌으로 뒤를 따라 걸었다.

다섯 발자국 정도 걸어나가자 수진이가  옆에 서서 발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뭔가 진짜 연인 같네요."

본인이 말하고도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돌리는 수진이.

그래. 연인 같은 거지 연인은 아니다.

하지만 이 관계도 오늘부로 끝이 나겠지.

우린 영화관을 나와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초밥집에서 주문하고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그 화제는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영화다.

"뭔가 흑백영환데 따뜻한 느낌의 영화였죠?"

"그렇지. 휴일이란 말답게 여러 관광지를 부드러운 템포로 돌았으니까"

"네. 여러 가지로 좋았어요. 앤이란 공주님이 주인공한테 서서히 반해간다는 느낌도 좋았고."

"근데 그건 좀 그렇지 않았나?"

"네?"

"공주니까 연애 경험이 없을 텐데 꼭 연애 경험이 풍부한 것처럼 손도 잘 잡고 뒤에서 껴안기도 하고 키스도 하고 그러잖아."

나는 초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아까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감상을 말했다.

"확실히 좀 그래 보이기도 했죠? 그래도 영화가 짧으니까 언제까지고 진도가 안 나가면 진행이 안 되잖아요?"

"너처럼 연상 남친 설레게 하는 법! 같은 검색 능력도 없었을 텐데 신기해서."

"선생님!"

수진이가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수진이를 달래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법 괜찮은 분위기 속에 식사가 끝이 나고 소화도 시킬 겸 윈도우 쇼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오늘은 수진이의 집에서저녁 식사를 하기로 되어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상태로 기대하라는 말을 꺼내는 수진이.

나는 부엌에 서서 요리를 준비하는 수진이의 등을바라보며 각오를 다졌다.

오늘. 수진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연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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