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고백(2)
수진이가 요리를 위해 꺼내놓은 재료들을 바라봤다.
큼직하게썰어져 있는 소고기, 통마늘, 양파, 파프리카와 버터, 올리브유에 파스타.
"내가 저번에 했던 요리?"
"네. 바로 알아보시네요?"
"왜?"
"왠지 저는 카렌데 선생님은 스테이크라고 하니까 진 거 같아서요."
"요리에 이기고 지는 게 어딨어?"
"그래도 뭔가 카레라고 하니까 어린애 같다는 생각 안 들어요?"
"나는 아직도 카레랑 돈까스, 불고기, 갈비를 제일 좋아하는데?"
"후훗. 입맛은 완전 초딩이시네."
수진이가 요리를 시작했다. 뭔가 조금 어색해 보이고 휴대폰에 띄워진 레시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모양이 아무리 봐도 처음 해 보는 것 같다.
"저 솔직히 처음 해보는 거라서 자신은없어요."
"확실히 집에서 해먹을 일이 없기는 하지. 재료가 싼 것도 아니고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예요."
"응?"
"어차피 선생님이니까 아내분한테 해드린다고 배우셨겠죠? 선생님이 냉부 같은 거 챙겨보고 고급진 레시피 외우고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아니, 그..."
"말하지 않으셔도 알아요.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요리 먹을 때마다 아내분 떠올리실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거에요."
"그, 그래."
수진이는 그 뒤로 아무 말도 없이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저 내가 스테이크를 대접했었으니 승부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확실히 아무리 자취를 많이 했다고 해서 남자가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양식을 익히진 않지. 여자라도 얽혀있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 아내를 의식해서 양식을 준비했다는 뜻이다. 뭔가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했다.
TV에서는 연예인들이 하하 호호 떠들고 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TV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와서 예능이 뭐가 재밌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다.
차라리 수진이의 옆에 서서 요리를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내가 옆에 서려고 하면 저번처럼 화를 내겠지.
기다리자. 아니, 지금 각오를 다지자.
오늘은 수진이에게 고백하는 날이니까.
당당하고 멋진 남자를 연출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자신감이다!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는 수진이의 모습이 보인다.
언젠가 이곳이 아닌 내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수진이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다.
나도 제법 요리를 잘하는편이다.
그러니 수진이와 함께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하며 하하 호호 웃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아이 이름은 뭐로 짓지?
***
"잘 먹을게."
"네, 저도 잘 먹겠습니다."
수진이가 준비한 요리는 스테이크와 파스타로 내가 요리를 했을 때보단 간소화된 상태였다.
그땐 수진이에게 음식을 대접한다고 신이 나서 스프에 빵까지 준비해서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양도 좀 많아 위에 부담스러운 식사였다.
수진이는 시간도 절약하고 위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신경 써서 양을 조절한 느낌이다.
자, 그럼 수진이의 요리를먹어보자.
처음엔 파스타다. 불으면 맛이 없으니 말이다.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말아서 입에 집어넣었다.
맛있다. 그야말로 파스타 맛이다.
"맛있어."
"그래요? 선생님 요리랑 비교하면 어때요?"
"파스타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굳이 점수를 매긴다면... 내 요리는 내가 했으니 80점짜리고 이 요리는 네가 만들었으니 가산점으로 20점. 토탈 100점이야."
"후후."
수진이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수저에 포크를 대고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나랑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는 데도 여성스럽고 귀엽게 느껴진다.
나는 멍하니 수진이를 바라보다가 스테이크를 썰어 입가로 가져갔다.
입가에 넣고 스테이크를 씹고 있으려니 수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감상이 궁금한 모양이다.
"음~"
입가에 포크를 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진이.
"맛있는데 조금 많이 익힌 듯한 느낌이야."
"그래요?"
"응 난 미디엄 정도로 먹으니까."
"아쉽네요."
수진이가 약간 풀이 죽은 기색이다.
나름 미디엄으로 해보겠다고 했는데 조금 많이 익힌 듯했다.
"그래도 맛있어. 나, 고기는 다 좋아하니까."
"다음엔 미디엄으로 구워 드릴게요."
다음도 있나? 그건 좀 기대된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잡담을 나눈다.
우리의 화제는 당연히 오늘 있었던 데이트에 관한 이야기다.
"뭔가 멋지지 않아요? 로마에서 데이트라..."
"여자들 특) 해외여행 가고 싶어 함."
"흡!"
수진이는 내 돌발적인 개소리가상당히 재밌었는지 입가를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곤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 선생님 그거 여혐이에요!"
"아니, 이게... 그렇게 된다고? 심심하면 여혐이래."
"장난이에요. 그래도 정말 한 번은 가보고 싶다."
수진이는 로마의 광경이라도 떠올리고 있는지 약간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도 가보고 싶다. 애초에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 않지만, 수진이랑 함께 라면 나도 로마의 휴일을 즐겨보고 싶다.
신혼여행은 좀 에바인가.
신혼여행이 아니어도 좋다.
언젠가 수진이와 함께 그 영화 속의 거리를 거닐며 사진도 찍고 먹을 것도 먹으며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
"이번에 수능 끝나면 시간 좀 남잖아? 이참에 친구들이랑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건 어때?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지금 쓰던 소설만 완결되면 언제든지 갈 수는 있잖아? 해외에서 연재해도 되고 말이야."
생각해보니 웹소설은 정말 편리한 녀석이긴 하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만 있다면 연재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수진이는 뭔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저, 그게..."
수진이는 뭔가 말하기 좀 꺼려지는 이야기를 꺼낼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실수했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억지로 토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리려고 했건만 수진이의 입이 열리는게 더 빨랐다.
"저, 사실은 학교에 친구 없어요."
"응?"
"그러니까 저 아싸라구요. 아.싸!"
나는 물끄러미 수진이를 바라봤다.
수진이는 어깨를 좀 넘는 길이의 윤기 있는 검은 머리에 약간은 고집이 있어 보이는 눈동자가 특징인 미인이다.
얼굴도 작고 코도오뚝해서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이다.
아직은 소녀틱한 면이 남아있는 얼굴이지만 곧 성인이 되면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되겠지.
10에 9의 남자들이 수진이를 보면 고개가 돌아갈 것이고 여자들은... 뭐,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예쁜 건 고생이네. 나처럼 대충 생기면 그럴 일도 없는데."
"아하하, 대충 생긴 게 뭐에요~ 선생님 정도면 잘 생긴 거지."
"그건 고맙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네 눈에 잘 생겼다면 용기가 난다.
"아무튼, 그런 건 아니에요.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고."
포크로 접시에 담긴 파스타를 휘적거리며 뭔가 고민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수진이가 보인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다.
"저 예전부터 이 근처에서 학교 다녔었거든요. 초등학교, 중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닌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좀 그게..."
수진이는 뭔가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아내려는 듯 물이 담긴 컵으로 손을 뻗었다.
물로 입을 행군 다음 마음을 진정시킨 수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문이 났더라고요. 저희 아빠가 바람나서 딴 년 만나서 도망쳤다고. 누가 소문을 낸 지는 모르겠어요."
수진이의 눈은 조금 울적하고 씁쓸한 감정이 가득했다.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몇몇 애들한테만 말했거든요. 너무 힘들고 슬퍼서 누군가한테 털어놓고 싶어서 그랬는데... 어느새 소문이 났더라고요. 그 애들이 소문을 낸 건지아니면 누가 이걸 엿듣고 소문을 낸 건지..."
후회로 가득한 눈빛이 아련해 보였다.
"그래서 같이 해외여행 다닐 만한친구는 없어요. 학교에서는 그냥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고요. 딱히 친하게 지낼 친구도 없고 공기처럼 지내요."
그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수진이는 학교나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면 전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가장 우선순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같이 시간을 보낼 사람이 없었다.
교실에서 홀로 앉아있는 수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선생님이 부러웠어요. 결혼해서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친구분들 이야기를 할 때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선생님이 부럽더라구요."
"..."
"그리고 준범이란 분이랑도 자주 만나시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힘들 때 누군가 기댈만한 사람이 있다는 게 굉장히 부러워요."
나는 수진이의 연약한 목소리를 듣자 벌떡 일어나서 내가 있어 줄게 라며 멋있는 대사를 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수진이와 같은 또래거나 조금 연상의 남자였다면 그렇게 창피하지만 호기로운 대사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저 수진이를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항상 선생님한테 이상한 말 한다고 하는데 저는 데이트 할 때마다 이러네요."
확실히 첫 데이트 때도 이런 분위기가 됐었지.
"왜 요즘 회귀물이 유행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에요. 확실히 좀 시간을 돌려보고 싶긴 하네요."
수진이가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녀의 의도에 맞춰주자. 이 이야기는 너무 무겁다.
"회귀라... 난 별로 일 거 같은데. 환생은 괜찮을지도 모르고."
"왜요?"
"38살이나 살아보니까 또 살려면 피곤할 것 같아. 또 수능 보고 또 군대 가고 그래야 하잖아. 또다시 그렇게 하려니 음, 좀 그러네."
"완전 아재 냄새 나는 거 알아요? 그리고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이 한 10년쯤 전으로 돌아가도 되잖아요? 돈 모아둔 거 비트코인 사면 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는데."
"너도 생각보다 돈을 밝히는구나?"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것도 그러네."
비트코인이라.
확실히 현대물에서 심심하면 리먼 브라더스니 비트코인이니 하는 매우 편의적인 전개가 나오기는 하지.
20배 레버리지라고 비트코인 100만원이 오를 때 2,000만원이 오르는 효과가 있는 상품도 있었다고 하니 엄청 돈을 벌게 될 것 같다.
상당히 매력적인 이야기는 맞다. 맞는데... 난 좀 별로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시민이다.
그렇게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법을 알고 있다면 쉽게 어그러질 것이다.
만약이다.
정말 만약에 회귀를 하게 된다고 하면 혜정이와 결혼을 하지 않아 편안한 마음으로 너를 만나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비효과로 인해 네가 학원에 오지 않거나 내가 이 학원으로 이직이 실패하는 경우가 생겨 버린다면?
사실 네가 나에게 관심을 가진 건 내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라면.
그런 만약의 사태 때문에 회귀라는 말이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회귀는 싫어."
"네? 그래도 싫어요?"
"회귀했다가 뭔가 꼬여서 이 학원에 이직이 실패하거나 네가 이 학원이 아닌 다른 학원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나는 수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몇 년이나 더 기다리기도 힘들 것 같고."
이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
고백에 가까운 조금 아슬아슬한 멘트.
지금부터 고백을 해야 하니 좋은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작업 멘트를 날렸다.
수진이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오른 수진이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숙여버렸다.
수진이는 얼굴을 가린 채 "잠깐만요..." 라는 말을 하곤 화장실로 도망쳐 버렸다.
수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니 갑자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다.
시발 좆같네.
드라마나 로판에 나오는 남주들은 이것보다 더한 대사도 하는데.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아서 미치겠다.
그래도 뭔가 반응은 좋았다.
반응은 좋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