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네가 왜 여기서 나와?(2) (75/301)



〈 75화 〉네가 왜 여기서 나와?(2)



집에 들어가서 빌려 온 책을 소파 테이블에 올려놓고 옷을 갈아입는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데스크톱에 전원을 넣는다.

13년이나 폼으로 학원에서 강사를 하진 않았다.

 컴퓨터엔 매년 수능시험으로 나왔던 문제부터 어떤 경향의 문제가 나왔는지 정리된 자료나 학생들이 암기해야 풀기가 쉬운 부분을 미리 정리한 것 등 여러 파일이 남아있다.

물론 이 내용을 작성하면서  내용을 머릿속에 충분히 새겨넣고 준비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파일을 갱신하는 일은 있어도  파일을 사용해서  해보지는 않았다.


하얀 백지에 암기했던 내용을 확인하는 느낌으로 써내려간 파일들이 더 많다.


나의 13년의 노고가 보인다.

가장 오래된 문서부터 천천히 읽어보면 과연 이때는  미숙한 점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파일들을 정리하고 요번 모의고사나 학원의 모의고사 등의 자료도 추가로 써넣는다.


어떤 내용을 얼마나 전달해야 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같은 내용을 알려주더라도 10을 알아먹는 사람이 있으면 100을 알아먹는 사람도 있으니 일단은 다 전해주는 건 무리겠고 중요한 내용부터 전달해야지.


어차피 학원이 필요하면 저 신입 강사는 보조 인원으로 쓰고 다른 강사를 추가로 뽑겠지.


솔직히 방학도 없이 여름에는 여름특강, 겨울에는 겨울특강이라는 살인적인 일정이다 보니 특강만 누가 대신해줬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자꾸 잡생각이 드는구나...

머리를 정리하고 차분히 파일들을 정리해나간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정말로 실감이 난다.


이제 학원을 그만두는 것이다.


하꼬분충에서 진짜 분충이 되는 일만 남았나? 아니면 진짜로 전에 다니던 원장님을 찾아가서 살려달라고 빌어야하나

드르륵 드르륵 우당탕 우당탕

이렇게 자꾸 잡생각이 드는 것도 근처에서 들리는 소음 때문이다.


아무래도 진짜 이 라인에 이사를 온 모양이다.


근처에 방이 비었다고 들어서 조아라 했더니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수진이를 방에 데려올  좀 더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아이 싯팔! 언제까지 이렇게 시끄럽게 할거여?

정신이 산만해진다.

나는 정리하던 내용을 어디까지 정리했는지 메모장에 적어서 폴더에 저장하고 컴퓨터를 꺼버렸다.


이렇게 시끄러우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밥을 먹고 빌려 온 책을 좀 읽다가 운동하고 씻은 다음에 더 정리해야겠다.


그때쯤이면 이렇게 시끄러운 소음도  줄어들겠지.


이사하는데 가서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하는 건 싸이코다.


적어도 나는 상식을 아는 인간이다.

이런건 참아야지.

***


식사를 마치고 책을 보다가 운동을 하고 씻고 나온 이후였다.

9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


나는 오늘 수진이의 소설이 어떤 전개로 나갈까 너무 궁금했다.

설마 진짜로 인류애 코인은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렇게 소설을 보려고 하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늦은 시간에 누구지?

나는 인터폰을 확인해본다.

모르는 사람이다.

애초에  집을 아는 사람은 나와 수진이 단 둘뿐이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더 신기하지.


"누구세요?"


그렇게 물어보자 상대방이 인터폰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 밤늦게 죄송해요.  옆방에 이사를 온 사람인데요. 오늘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요. 이산데 조용한 게 더 이상하지. 괜찮아요."

'아, 감사합니다. 이거 이사 떡인데 드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그냥 가려고 하는 상대방

이렇게 마주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문을 열고 떡을 받기로 했다.


솔직히 요즘에 이사한다고 떡 돌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이 정도로 예의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호감이 간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서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려놓고 떠나려던 떡을 집어들었다.

상대방은 흠칫 놀라더니 나를 잠깐 바라보고 "아,아니에요..."하고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는데 일단 여성이고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특징적이었다.

어깨가 조금 라운드 숄더라서 보기 좀 그랬는데  현대인은 누구나 자세가 구부정하니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문을 닫는다.

이사 떡을 다 받다니 요즘으로서는 진짜 드물기는 하다.

나는 떡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수진이의 소설을 마저 읽었다.

과연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한 용사의 모습은 상당히 안정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전개도 깔끔해서 흠잡을 때가 없었다.

간편하게 댓글을 남기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지.

***

"이야 솔직히 좀 긴장하긴 했는데 나름 괜찮았죠?"


"네, 솔직히 작가도 생각이 있으면 급커브를 돌진 않겠죠."

"그죠?  그래도 느낌이 뭔가 더블 주인공이네요. 원래  이런 거 싫어하는데"

"시선이 분산돼서요?"

"역시  아시네요. 이렇게 뭔가 주인공한테 감정이입해서 보고 있는데 시점이 자꾸 넘어가고 그러면  집중이 안 된단 말이죠..."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더블 주인공인 작품은 나름 그 맛이 있지.

예전 모험 활극들은 주인공 원맨쇼가 아닌 동료의 협력으로 모험을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주류였으니 말이다.


이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움직이는 용사와 주인공의 이야기로 동료물은 아니지만 가끔 서로 마주치는 정도로 서술되겠지.


아무래도 예전에 일본의 여성 만화가가 그려서 유명해진 철쇄아를 휘두르는 강아지 요괴의 이야기와 비슷한 전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그 만화 개고구마였는데?

"그래도 작가가 완결 낸 게 몇갠데 알아서 잘하겠죠."

"그죠? 믿고 보는 월억킥 아니겠습니까? 아하하!"


우리가 떠드는 소리를 내고 있자 또다시 양수호 35세 독신이 지랄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아니 씻팔 점심 먹고 쉬는 시간에도 조용해야 되냐? 내가 담배도  펴서 갈 때도 없어 개새끼야.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양수호 35세 독신은 시선을 내리깐다.

오늘도 같잖은 영어신문을 펼치고 지적 허영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시간에 영어로  서적을 한 권 더 읽겠다.

한국어로 번역된 녀석들은  나라 특유의 언어체계에서만 나오는 맛깔을 못 살리는 경우가 있단 말이지.


이렇게 계속 시선을 두는 것도 낭비다.

나의 시선에는 가능한 한 좋은 사람들만 담고 싶다.

이젠 질척한 진흙탕은 이쪽에서 사양이다.

그렇게 잠시간 인한 강사와 떠들다가 강의를 마치고 칼퇴근을 한다.

냉장고에 식재료가 떨어져서 마트에 다녀와야 하니 서두를수록 좋다.

타임세일도 있고 말이다.

수진이가 얼마나 자주 놀러 올지는 모르지만 혼자 먹기에는 조금은 많은 식재료 들을 갖출 생각이다.

어차피 밑반찬도 어느 정도 먹었으니 반찬을 만들기도 해야 한다.

냉장고에 뭐가 없었는지 떠올리면서 천천히 카트에 물품을 채워나갔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으니 과연 생각보다 많은 양을 사버렸다.

나는 카트를 밀고  차로 가서 물건들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렇게 물건들을 정리하고 차를 출발하려고 하니 무언가 엄청나게  짐들을 낑낑거리고 옮기는 사람이 보였다.

긴 갈색 머리에 약간 라운드 숄더인 어깨, 지금은 무거운 걸 짊어져서 더욱 쳐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아마도 옆 옆방에 이사온 사람


처음엔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이사한 날에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도 하고 떡도 돌리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다.


받았으면 돌려주는 것이 상식 있는 사람이겠지.

나는 차를 몰아  사람의 근처에 세웠다.


빵빵

작게 울리는 크락션

옆옆방 사람이 깜짝 놀라서는 이쪽을 쳐다본다.


"무거우신 거 같은데 트렁크에 실으세요."

"네...?"


"어차피 같은 아파튼데 이 정도는 돕고 살아야죠. 아, 이거 성희롱으로 신고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차 블랙박스 있어요?"

그렇게 말하자 갈색 머리 여자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팍 숙인다.

"가, 감사합니다!"

이런. 요즘 이렇게 90도 인사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는데 말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서 손수 트렁크를 열어서 그녀의 짐을 실어 주었다.


...무거웠다.

아무래도 이사를 했으니 여러 가지 살  많긴 했나 보다.

이럴거면 그냥 마트에서 보내달라고 하지...라고 생각하다가 곧바로 써야 하는 몇몇 물건들이 보였다.

뭐 어차피 마트에서 집까지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으니 그럴 수도 있고 말이다.

그녀는 내가 트렁크에 짐을 실어 주자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더우신 거 같은데 타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차에 태웠다.


그녀는 뭔가 쭈뼛거리는 느낌이 강했다.


그럴 수도 있지.


솔직히 1번 얼굴  남자를 뭐를 믿고 함부로 차에 타겠는가?

조금 경계심이 부족한 여성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그렇게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고...


그녀는 안전벨트를 양손으로 꾸욱 잡고 있었다.

 손이 약간씩 떨리고 있어서 시선이 멋대로 향했는데 라운드 숄더라서 몰랐다만 가슴이 상당히 컸다.

이건 수진이보다 더 큰 거 같은데...


시선을 들키면 어색해질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차를 운전했다.

어차피 가까운 거리라 금방 도착했다.

"그 정말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뭘 떡도 받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내 짐을 꺼내 들고 들어가려고 하니  낑낑거리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찝찝하다.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려니 어차피 같은 층인데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기다리기도 그렇고 멋대로 내 층을 누르고 올라가 버리기도 그렇다.

그래서 그녀의 짐 중에 부피가 조금 작은 봉투는 내가 들기로 했다.

"어, 어어어어?"

내가 멋대로 짐을 빼앗자 놀래서 어어어어 소리를 낸다.


...훔쳐갈 생각은 없어.

"어차피 같은 층인데 좀 들어 드릴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뒤에서 그녀가 춍춍춍 뛰어오는 게 느껴졌다.

칭챙총

아까보단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이라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뭐라고 말을..."

"됐습니다. 떡값이라고 생각하죠."

굳이  내가 도와줬는지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그렇고 그냥 그렇게 넘겨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연신 미안하고 고마운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짐을 달라고 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내 짐은 문앞에 두고 그녀의 짐을 그녀의 문앞에 둔다.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내 문앞의 물건을 다시 들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생각지도 못했던 선행을 해버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떡값은 했다고 생각한다.

이유없이 뭔가를 받는 건 불편한 일이다.

마트에서 사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차가운 물로 몸을 식힌다.

혼자 이사 왔나?

저 양이면 차가 없으면 2명이서 갔다 와야 하는 분량 같은데?


혼자서 이사 온거면 전세인가? 이 집은 전세가가 상당히 비싼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나야 수진이가 수험을 마치고 대학에 가면 따라나서야 하니 월세로 들어왔는데 아무튼 월세라도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니 부유한 거고 전세라면 그만큼 보유자금이 많다는 거니 부유한 거다.

돈이 많은 여성일지도 모르겠다.

뭐 어차피 이제 얽힐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인수인계와 신입강사 교육을 위한 자료를 준비했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수진이의 소설을 읽고 전화를 하고...

그렇게 하루의 루틴을 끝마치고 잠이 들었다.


변화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일상이 변한 건 금요일 아침이었다.

"준수 강사님이 개인 사정으로 학원을 그만두신다고 하셔서 준수 강사님의 후임으로 들어올 강사님입니다."


"이다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신입강사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친다.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그녀


갈색머리 라운드 숄더


네가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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