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4)
"야."
"서, 선생님?"
"내가 싫다고 했잖아. 나 이런 거 싫다고."
안대를 벗고 정색하고 노려보고 있으려니 수진이도 욱한 감정이 들었는지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인상을 써야 하는 건 난데 말이야.
"선생님도 평소에 멋대로 하잖아요. 나도 그래서 멋대로 한 건데요?"
"난 묶어놓고 이런 식으로 한 적은 없잖아."
내가 정색한 채로 그런 말을 꺼내니 수진이도 정색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왜 화를 내느냐는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노려본 채로 시간이 흘렀다.
허벅지에 걸쳐져 있던 팬티와 바지를 다시 입으려고 하니 끈에 묶여있던 손이 쓸려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
흐르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당황해서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 피, 피가..."
놀란 표정으로 내 손을 만지고 있던 수진이가 서둘러서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수진이가 손에 약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덜덜 떨면서 내 손을 지혈하고 연고를 발라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한숨만 나왔다.
"죄, 죄송해요. 이,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어처구니가 없네. 몇 번이고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그렇게 했으면서 이러려고 한 게 아니면 도대체 뭐지?
차분히 식었던 머리가 또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이런 거야? 아까 다 끝났다며. 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건데?"
"..."
"할 말이 있으면 해봐."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수진이도 할 말이 있는지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잘못한 거잖아요."
"내가 뭘?"
"선생님도 평소에 그렇게 제가 싫다 하는데 멋대로 하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러세요?"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했잖아?"
사소했다. 정말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일이 감정싸움으로 이어져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대로 있으면 감정싸움만 되리라.
"선생님...?"
"..."
수진이를 내버려둔 채 집 문을 열고 나갔다.
쿵.
등 뒤로 들려오는 문소리.
잠시 후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여고생을 상대로 뭔 병신같은 짓거리를 하는 거냐.
사정관리니 뭐니 하는 이상한 상황 때문에 이성이 마비돼서 정신이라도 나간 걸까.
수진이는 19살짜리 여고생이다. 그런 미숙한 아이한테 어른스럽지 않게 이게 뭐하는 짓이지.
한숨과 함께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수진이가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울어."
"크흡... 으..."
서럽다는 듯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술렁였다. 내가 당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네가 울고 있는 거야.
그 처량한 모습을 보니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 울고 있는 수진이를 방치할 수도 없어서 살짝 끌어안았다.
"미안해."
"크흡... 으... 흡..."
수진이가 나를 꽈악 붙잡은 채로 어깨에 고개를 묻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진이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그래. 내가 잘못을 하긴 했지.
시대가 변했다. 내 행동은 오지랖을 넘어선 그 무언가였다.
수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었고 화를 낼만한 상황이었지.
수진이도 화가 나서 욱한 마음에 날 묶어놓고 그런 짓을 했으리라.
생각해보면 그것도 내가 자초한 일이지.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다.
아내와 결혼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부부관계를 맺고 살아오다가 19살짜리 여고생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소중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런 말을 내뱉고 있으면서도 섹스를 하게 되면 수진이를 도구처럼 다루고 내 멋대로 하려 들었다.
수진이도 그게 스트레스였겠지. 내가 그렇게 멋대로 해도 혹시라도 내가 실망할까 봐 거절도 못 했겠지.
그러다가 이번에 내가 한 삽질에 화가 나서 쌓아뒀던 감정이 터져 나온 결과물이 이것이리라.
생각해보니 그런 낌새가 있기는 했다.
저번에 전 아내의 침실에서 나를 깔아뭉개고 펨돔섹스를 했을 때 그런 낌새를 보였었지.
그때 그 어둡고 질척하면서도 성깔이 있던 모습이 수진이의 또 다른 면인가.
아니, 오히려 그게 본심인지도 모른다. 나에겐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던 걸지도 모르지.
나도 수진이 앞에서는 어른인 채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니까 서로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으으... 흑..."
"울지마."
"서, 선생님이 나한테 질려서... 나 버리고 가는 줄 알았어."
"내가 널 버리고 어딜 가."
돌아가기엔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 이제 수진이가 없는 일상은 상상도 못 할 정도다.
"한 번도 안 싸운 연인은 한 번 크게 싸우면 헤어진다니까 미리 한 번 싸운 거라고 생각하자."
수진이는 나를 끌어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그저 한 번 싸웠을 뿐이다. 싸웠으면 화해를 하면 될 뿐이다.
이미 난 한 번 배웠으면서 또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혜정이랑 싸웠을 때도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였으면 이렇게까지 악화가 되진 않았으리라.
상대적으로 가난해지긴 했지. 하지만 그것뿐이다.
돈은 벌었으면 됐고 성격이 맞지 않았으면 듣지 않으려고 해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말을 했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나도 혜정이도 조금 바뀐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는 말자.
내 사과를 들은 수진이는 조금 우물쭈물하면서도 천천히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수진이를 품에서 놓아주고 놔서 다시 팔을 내려다보니 이리저리 쓸려서 엉망이 된 팔이 보였다.
공사장이나 시골의 마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빨랫줄로 사용되는 끈.
이런 끈이 아니라 SM 플레이에서 사용되는 수갑을 사서 묶었다면 상처가 나지 않았겠지.
...그건 좀 무린가? 무리겠지.
수진이는 19살이다. 미성년자지.
SM 플레이에 사용하는 그런 종류의 물건은 성인이 아니면 살 수 없다.
SM 플레이에 대해 듣고는 뭔가 실험 정신이라도 생겨서 해보려다가 이렇게 된 거겠지.
묶는 방법도 어설펐다.
SM 플레이를 할 생각이었다면 내 팔이 다치지 않도록 팔에 토시나 수건이라도 두른 다음에 묶었어야 했다.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상처를 마저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아직도 불안한지 내 눈치를 살피며 조마조마 치료하는 모습이 좀 안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왁!"
"꺅!"
혹시나 싶어서 큰소리를 냈더니 수진이가 엉덩방아를 찧고는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히죽히죽 웃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발끈한 표정으로 상처가 난 팔에 연고를 짓누르듯이 바르기 시작했다.
"아파."
"잇! 이익!"
이제 좀 수진이 다운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역시 넌 그렇게 당당한 모습이 더 어울려.
"수진아. SM이 그렇게 좋은 플레이는 아니야."
"그래요? 선생님은 스팽킹이나 그런 거 좋아하시던 거 같은데..."
"나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너랑 할 때만 되면 이성을 자주 잃는 것 같아. 그때만 남성호르몬이 흘러넘쳐서 좀 컨트롤이 안 되는 거 같아."
내 말을 들은 수진이는 뭔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조금 진정이 된 상태로 뒷정리를 마저 하고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 서로 소파에 앉았다.
수진이는 내 상처가 계속 신경 쓰였는지 힐끔힐끔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가 죄책감이 남아있어서 계속 이럴 것 같은 분위기라 조금 불편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
"수진아."
"네."
"나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네? 어, 어디요?"
"괜찮아. 금방 돌아올게."
조금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보이는 수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집을 나섰다.
솔직히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렇게 우물쭈물 죄책감을 느낀 상태로 접하는 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당했으면... 갚아주면 되는 거지.
이번에는 내 입장에서 소프트한 SM 플레이를 해주면 될 일이다.
***
SM용 물건을 파는 성인용품점이 근처에 있어서 물건을 사고 돌아오니 약 2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금방 돌아와서 좀 안심이 됐는지 수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 저 얼굴에 내리 앉은 불안감과 죄책감을 덜어줘야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짜고짜 뛰어들어서 강제로 묶어버리고 덮쳐?
아니, 그러다가 상처라도 나면 곤란하지.
적당히 죄책감도 덜어주면서 내가 느꼈던 굴욕감도 갚아주는 방법이 가장 베스트다.
그렇다고 멋대로 하면 또 상처받아서 삐질지도 모르니 허락은 받고 해야겠지.
"수진아. 그, 이번엔 네가 묶여서 해보는 건 어때? 그걸로 퉁치자. 이제 그런 표정 그만 짓고."
"...여친이 약해진 틈에 그런 말 하는 건 좀 비겁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해줄 거야 말 거야?"
"자요."
수진이가 등을 돌리고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뭔가 가학심을 자극하는 느낌이라 더 좋게 느껴지기도 하고.
수진이의 양팔에 SM 플레이용 수갑을 채웠다.
그러자 수진이가 조금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괜찮아. 아프게는 안 할게."
아프게는 안 한다. 조금 거칠게는 할진 몰라도.
수진이가 내 눈에 씌웠던 안대를 손에 들었다.
"그, 그것도?"
"괜찮아. 아프게는 안 할게."
아프게는 안 한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 수진이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안대를 씌웠다.
좋아. 지금까지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잘 넘어왔다.
이제 다음부턴 조금 반항심이 생길 수 있는 행윈데... 죄책감에 쭈글해져있는 모습보단 울컥해서 화를 내는 모습이 차라리 더 낫지.
가게에서 사 온 물건을 꺼내 들었다.
볼개그.
구멍이 숭숭 뚫린 골프공처럼 생긴 물건으로 일종의 재갈이다.
처음에 SM 플레이가 나오는 야동을 봤을 때 이런 이상하고 불편해 보이는 물건을 왜 여자 입에 채우는가 생각했는데 막상 내 여자한테 이걸 채운 상태로 섹스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몸을 움츠리고 있는 수진이의 입에 볼개그를 가져다 댔다.
"서,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 우읍!"
수진이의 입에 볼개그를 채운 다음 SM용 족쇄도 꺼내어 다리에 채웠다.
그러자 좀 더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기획물에서 여형사가 악당의 아지트에 찾아왔다가 붙잡혀서 강제로 묶인 다음에 따먹히는 장면이 연상되어 자지가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건 또 못하겠지.
내가 SM 플레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수진이도 별로 취향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니 오늘은 좀 거칠게 해도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진이를 자리에서 조금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