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처남 강림...!(4)
"속도위반으로 결혼하면 어머님은 절대로 허락 안 하시겠지. 결혼식에 오시지도 않을 거야. 그러면 수진이 결혼을 축하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그러니까 천천히 설득해야지."
"..."
그는 내 말을 천천히 듣더니 한숨을 내쉬고 맥주를 전부 마시고 또 다른 캔을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병신같죠?"
"어?"
"오빠라는 새끼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으면서 오빠 흉내나 내면서 오지랖이나 떨었는데 가족이 학교에서 왕딴데 뭣도 모르고..."
그가 다시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결국 맥주다. 이 정도로 취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친해진 거에요?"
맥주캔을 내려놓고 물어보는 그를 바라본다.
나와 수진이가 친해진 계기가 그건 아니다.
하지만 아마 적잖은 이유를 차지하긴 할 것이다.
수진이의 교우관계가 정상이었다면 또래에 대한 적개심을 품지도 않았을 테고 정상적인 학창 생활을 보냈을 테니까.
수진이는 미인이니까 인기도 많았을 것이다.
"뭐 그것도 한 이유는 되겠지."
나는 그렇게 운을 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된 지에 대해서.
요즘따라 우리의 이야기를 자주 말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하지 않아도 말이 술술 나왔다.
그동안 그는 내 말에 허나 어나 음 같은 말을 내뱉으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굉장히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동생 연애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뭔가 근질거려서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맥주를 마신다.
뭐 확실히 그렇긴 하겠다.
나도 그를 바라보며 마주 맥주를 마셨다.
그는 맥주를 마시다가 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수진이가 선생님한텐 여러 가지 털어놓은 거 같은데 뭔가 더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악동 같은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의 관계를 어느 정도 인정은 해준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나와 수진이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끔 웃고 어렸을 때 수진이가 어땠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그래?"
"뭐 저는 이 결혼 반대는 안 할게요. 어차피 수진이가 알아서 하겠죠. 그런 녀석이니까."
"그러면 고맙고."
"엄마랑은 언제 만나보실 거에요?"
"수능 끝나면 바로 찾아봬야지."
"잘됐으면 좋겠네요."
"그래야지. 아무튼, 이해해줘서 고마워 처남."
"예이.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형님."
그렇게 말하며 병장 경례를 하고는 집에서 나갔다.
나는 몸에 긴장이 풀려서 소파에 추욱 늘어졌다.
다행이다. 그가 말이 통하는 상대라서 어떻게든 무사히 넘겼다.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서 수진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빠 잘 설득했어. 어머님한텐 내가 나중에 찾아뵙는다고 했고 우리 사귀는 거 그냥 못 본 척 하겠데."
그렇게 카톡을 보내자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선생님, 괜찮아요? 그 새끼가 지랄 안 했어요?`
"오빠한테 그 새끼가 뭐야. 좋은 사람이더구먼. 친하게 지내."
`선생님은 누구 편이에요?`
"수진이 편이지 누구 편이기는. 아무튼, 무사히 잘 넘겼으니까 마음고생 하지 말라고."
`후우~ 와 진짜 거기서 오라비가 나타났을 때 진짜 숨넘어가는 줄 알았던 거 알아요?`
수진이가 자리에서 움찔거리며 살짝 튀어 오르고는 딱딱하게 굳어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작게 웃음이 나왔다.
`아 왜 웃어요?`
"수진이가 귀여워서."
`칫.`
수진이가 혀를 한번 차더니 마음이 놓였는지 오늘 데이트가 어땠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진이의 이야기에 호응을 해주며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근데 수진아, 지금 전화 받아도 돼? 어머님이 집에 계시는 거 아니야?"
`밖이에요. 집에 들어가기 무서워서 그냥 밖에서 시간 보내고 있었어요.`
"그럼 어서 들어가고. 푹 쉬고."
`네. 선생님도요.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내일도 놀러 가도 돼요?`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네~ 선생님 사랑해요.`
"그래 나도."
`아~ 성의 없게 그러지 말고 똑바로 해줘요.`
"사랑해 잘 자라."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전화를 뚝 끊었다.
그러자 수진이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를 끊어요! 다시 해주세요. 못 들었으니까.`
"사랑해 수진아."
`네 저도 사랑해요.`
쪽
휴대폰 너머로 그 소리가 들려오고 전화가 끊겼다.
아무래도 전화로 쪽을 해보고 싶었는데 끊어서 화가 난 모양이다.
귀여운 녀석.
나는 휴대폰을 한번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방금까지 전신에 모든 힘이 빠져나간 것처럼 기운이 없었는데 몸에 힘이 솟는 느낌이다.
나는 수진이가 전화에 쪽을 하고서 조금 부끄러워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했다.
꼬르륵
"아."
그러고 보니 밥을 먹지 않았었네.
***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로 코앞이다.
내가 학원을 그만두는 것은 이미 확정이다.
12월 수능이 끝나고 나면 겨울방학 특강부터 시작해서 학원에서 새로운 스케쥴이 짜지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부턴 다정 강사가 강의를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2개월 하고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백수가 되는 것이지.
수진이의 어머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번듯한 직장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메모장을 켜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위해서 무언가를 적으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떠올라오지 않았다.
초조해진다. 과연 내가 글로 먹고살 수 있을까?
나는 방에 장식되어있는 지포라이터에 눈이 갔다.
지금이라도 전에 다니던 원장님에게 이야기를 꺼내봐야 하나...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네 여보세요. 오랜만입니다. 원장님"
`준수냐? 야 오랜만인데. 잘 지내고? 그리고 이제 우리 학원 강사도 아니니까 형이라고 불러."
"알았어요. 형. 저야 뭐 잘 지내죠."
`야 근데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했냐. 평소에 전화도 안 하던 녀석이."
"뭐 별건 아니고요..."
`별건 아닌 게 아닌 모양인데? 뭐 바쁘냐? 오랜만에 한번 만날까? 자주 가던 거기 어때?`
나는 시간을 확인해봤다. 오후 8시가 된 시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갈게요."
`그래. 오랜만에 얼굴 좀 한번 보자.`
"네, 바로 갈게요."
`오, 그래`
뚝
전화가 끊어졌다.
나보다 15살이나 나이가 많은데 여전히 활기차시다.
당시에 같은 대학 친구분 3명이 공동출자로 학원을 만들어서 원장으로 학원을 운영하던 사람이다.
내가 같은 대학 출신이라고 신경을 많이 써주셨지.
언제나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학원이니 원장님이라고 불렀었다.
좋은 사람이었지. 잘 지내시는 거 같다.
지포라이터를 만지작거린다.
내가 일회용 라이터를 쓰는 게 별로 맘에 안 든다고 사주셨었는데.
너무 정신없이 살아온 듯하다.
나름 잘 챙겨주던 사람인데 안부 전화도 안 하고 살았으니까.
이제 최소한 아는 척은 하고 살아야겠다.
요즘 수진이와 전화나 카톡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단답형으로 카톡을 하면 귀찮으냐고 물어보고 자기 전에 잘 자라고 통화하지 않으면 다음 날에 삐쳤다는 느낌이 풀풀 풍기는 녀석이다.
처음엔 왜 굳이 전화나 톡 같은 걸 계속해야 하는지 잘 몰랐지만 하다 보니 이 귀찮은 행동에도 나름에 의미가 있음을 배웠다.
상대방에 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내용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하찮더라도 적어도 상대방은 전화를 걸었다, 카톡을 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무소식은 희소식일 수 있지만, 무관심이 희소식은 아니다.
***
"이야 준수 이게 얼마 만이냐? 이 자식 연락도 없고 쯧, 일단 한잔하자. 근데 왜 이리 늦었어?"
"맥주를 조금 마셔서요. 대중교통으로 왔어요."
"그래? 그럼 말을 하지. 술도 못 먹는 놈이."
"괜찮아요. 정말 조금밖에 안 마셨으니까."
나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원장님을 아니 만수 형을 보았다.
이제 50에 들어선 나이
하지만 아직도 정정해 보인다.
"형은 사람이 안 변하네요. 아직도 강의하죠?"
"야, 먹고살려면 다 이렇게 살아야지. 그래서 그, 어? 너 반지는?"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던 만수 형은 내 손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물었다.
"이혼했어요."
"어, 이혼? 하 요즘 이혼들 많이한다 싶었는데 니가 이혼을 하네"
"뭐 안 맞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그렇긴 하지."
"..."
나는 천천히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 뭐 됐고.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어? 다시 이쪽에서 다니려고? 상관은 없는데"
"네? 어떻게 알았어요?"
"짜식아, 니가 돈 빌려달라고 하는 놈도 아니고 그럼 뭐 일거리 없는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
"..."
"와이프랑 이혼하고 전셋집도 뺐으니 집도 없어서 곤란한 상황인 거 아니냐? 괜찮아 다 아니까. 마셔!"
그렇게 말하고는 잔을 부딪쳐온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너무나 쉽게 정리되어버린 상황에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입을 닫아버렸다.
만수 형은 취기가 살짝 돌리 시작했는지 추억이란 이름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내가 가정교사 알바로 힘들게 구르다가 간신히 졸업하고 이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때 내 경력이랑 출신지를 보고 뽑아줬고 같이 일하다 보니 마음에 들어서 계속할 줄 알았다는 이야기.
갑자기 결혼한다고 해서 여자 이야기도 없던 녀석이 결혼이라길래 낯설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는 이야기.
등등.
그러고 보니 결혼식에도 왔었던 사람인데 지금까지 안부 인사도 안 한 거 보면 나도 참 몰인정한 놈이다.
"그래서 잘 살고는 있고?"
"네. 그렇죠."
"그래서 바로 다닐 거야?"
"저 그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학원 강사를 그만둔다고 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혜정이가 학원에서 깽판을 칠지도 모른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이던 혜정이랑은 이미 다 끝났다.
그리고 남은 게 여고생이랑 갈 때까지 가버린 녀석이 학원 강사를 해도 되는가 하는 윤리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그 윤리적인 문제는 생계문제 앞에서는 매우 초라해졌다.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젠데 윤리가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다니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진이에게 학원을 그만두더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그때의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라서 그런데 조금 기다려주실 수 있어요?"
그러니 나는 딱 잘라서 거절도 그렇다고 다니겠다는 의사도 표현하지 못했다.
"뭐, 복잡한 상황인 거 같으니 알아서 하고. 학원 강사 자리야 경력도 있으니 찾아보면 많을 거다. 나중에 마음 정해지면 연락해주고. 이 근처 학원에 알아봐 줄 테니까."
"고마워요. 형."
나는 만수 형과 술을 마시며 가슴에 담아뒀던 불안감을 조금 해소했다.
돌아갈 자리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비겁하게 도망칠 자리를 마련하는 내 모습이 조금은 초라해 보였다.
나에게도 수진이와 같은 재능이 있었다면... 하다못해 도전하는 젊음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