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새아기는 여고생(2)
"흐응~ 흠흠 흥~"
수진이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흔들며 자동차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따라 리듬을 타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아?"
"네? 그냥요."
"싱거운 녀석."
나는 지금 심장이 콩닥거려서 미칠 것 같은데 말이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흥건하다.
그렇다고 차를 세우고 땀을 닦기도 힘들다.
"선생님이 왜 저보다 더 긴장하고 그래요. 쫄보래요~"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네가 대단한 게 아닐까?
"괜찮아요. 저희가 좋다는데 뭐 어떻게 하겠어요? 선생님도 성인이고 부모님이 헤어지라고 해서 헤어질 것도 아니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
헤어질 거였으면 고백도 안 했고 지랄도 안 했지.
"그리고 어차피 선생님 친가잖아요? 맘 편히 먹어요. 긴장은 나중에 저희 엄마 만날 때나 하시고."
거기서 어머님 이야기를 꺼내다니 지독한 녀석.
한층 긴장되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후우~"
"아하하하하!"
내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심호흡을 하는 모습을 보며 쾌활하게 웃는다.
왠지 수진이가 저렇게 태연하게 있으니 진짜 별일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신기하네.
점점 몸에서 긴장이 풀려가는 느낌이다.
"고마워."
"뭐가요?"
"그날 휴대폰 떨어뜨려 줘서."
"아하하하!"
수진이의 웃음소리가 한층 진해진다.
너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나는 진심이다.
그날, 네가 휴대폰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마... 혜정이랑은 이혼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녀에 대해서 그렇게 나쁜 감정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수진이와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다르겠지.
참고 참다가 결국은 이혼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증오하던 인간이랑 헤어졌음에도 무언가 빠져나간 상실감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인한 강사와 지금 같은 관계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흡연실에서 우리 아이 어때요? 뭐, 그런 이야기나 듣고 있겠지.
그러다가 인한 강사가 웹소설이 잘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인한 강사를 얕보고 있던 꼰대가 잘나가는 그에게 역한 질투심을 내뿜을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이름의 익명성에 기대서 그의 글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를지도 모르지.
나는 멀쩡한 인간을 흉내 내고 있을 뿐 그 본질은 35살, 그 녀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녀석이니까.
그러니 너무나도 고맙다.
그날, 네가 휴대폰을 떨어뜨려 줘서. 네가 나를 낚기 위해 소설에 떡밥을 던져줘서. 그리고 네가 나를 붙잡아줘서.
수진이의 웃음소리와 차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몰았더니 금세 친가에 도착했다.
"으응~ 하아..."
수진이가 기지개를 켠다.
나도 차에서 내려 몸을 풀고 트렁크를 열었다.
"아."
"왜요?"
"이런... 해산물을 안 사 왔네."
"아..."
아버지 용으로 술은 사 왔는데 해산물은 안 사 왔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일단 들어가자."
"네."
나와 수진이는 짐을 나눠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띵동
초인종을 눌렀다.
`준수니?`
"네. 짐이 많아서 그런데 좀 열어주세요."
`그래.`
어머니가 문을 열어줬다.
"어서 와. 기다렸단다."
"안녕하세요!"
"그래. 네가 수진이니?"
"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어서 들어와. 밥은 아직 안 먹었지?"
"네, 아버지는?"
"그이는 잠깐 밖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 나갔어."
"그래요?"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나는 수진이와 같이 집으로 들어가 식탁에 사 온 물건들을 올려둔다.
시간을 보니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수진아, 나랑 이 근처에 해산물이나 사러 갈까?"
"음... 아뇨. 저 그냥 여기 있을게요."
수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색할 텐데?
"그래? 괜찮겠어?"
"쯧쯧. 이럴 때 포인트를 쌓아야죠. 역시 남자들은 뭘 모른다니까. 어서 다녀오세요."
"그래. 그러지 뭐."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가려니 어머니가 부르신다.
"준수야, 어디 가니?"
"해산물을 안 사와서요. 좀 사 올게요."
"됐어. 방금까지 운전해서 피곤할 텐데 그냥 있어."
"괜찮아요. 뭐 얼마나 된다고."
"수진이는?"
"저는 여기서 어머님 도와드릴게요!"
"그, 그럴래?"
어머니도 수진이의 활발함에 다소 놀란 모양이다.
"다녀올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네."
문을 열고 나갔다.
어머니는 해산물은 다 좋아하신다.
그래도 뭐 수진이도 나도 아버지도 먹긴 해야 하니 먹기 쉬운 해산물로 사 가면 되려나.
가을이니 새우나 전복, 꽃게나 좀 사서 가야겠다.
***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해산물을 사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신발장에 벗어진 신발을 보니 아버지도 들어오신 모양이다.
"아니고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두고두고 드세요."
"그래. 고마워 준수야."
해산물을 부엌으로 옮겼다.
"그래서요~ 선생님이 절 끌어안고 여긴 로마도 아니고... 아 선생님 다녀오셨어요?"
"어,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점심식사준비 도와드렸는데요?"
"그래?"
아버지가 웬일로 소파가 아니고 식탁에 앉아 계시네.
식사준비가 끝나기 전까진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시는 데 말이다.
"역시 준수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예?"
사람 보는 눈이 있으면 혜정이랑 결혼 안 했죠. 어머니...
"아주 좋은 신붓감으로 골라왔네?"
"아."
아무래도 어머니는 우리의 관계를 허락하시는 모양이다.
"헤헤, 어머님. 저 좋은 신붓감이에요?"
"그럼. 예쁘고 착하고 말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데 일등 신붓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사온 해산물을 냉장고에 넣으신다.
"아 저도 도와드릴게요."
수진이도 어머니를 도와서 정리를 돕는다.
"왔느냐."
"네."
우리 부자의 대화는 그걸로 끊어졌다.
"준수야.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 불편하잖니."
"네, 그럴게요."
그러고 보니 수진이는 어느새 입고 왔던 옷을 갈아입고 조금 편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내 방으로 들어간다.
옷을 갈아입고 있으려니 문득 왜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있었는지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아까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수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것 같은데.
나는 방문을 살짝 열고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요 선생님이 막 그러는 거예요. 회귀해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저랑 못 만나는 게 더 무섭다고."
"정말로 준수가 그랬니?"
"네! 그러다가 제가... 그 선생님이 조금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려고 했거든요. 그땐 아직 이혼도 안 했고요."
"그래서?"
"그런데 선생님이 절 이렇게 뒤에서 끌어안으시더니 손가락질을 받든 욕을 먹든 싸대기를... 아니 뺨을 맞든 저랑 함께하겠다고 했어요. 아! 로마의 휴일이라고 아세요? 그게 예전에 유행하던 영환데..."
그렇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어렸을 때의 광경이 떠오른다.
책을 읽고 신이 나서 새롭게 배웠던 내용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식사 준비를 하시는 어머니 근처에서 오늘 어떤 책을 읽었는데 내용이 어떻고 등장인물이 저렇고 하면서 떠들던 그때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그때도 저렇게 즐겁다는 듯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셨지.
나는 어머니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이 기뻐서 더 열심히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미 나이를 드셔서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셨지만, 그때와 무엇하나 바뀌지 않으셨다.
이렇게 멀리서 몰래 지켜보고 있으려니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왜 식탁에 앉아있었는지 말이다.
아무래도 수진이가 내가 잠깐 나간 동안 나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고 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신문을 펼치고는 있지만, 아까부터 페이지가 넘어가지도 시선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나와 수진이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들으려고 저기에 앉아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왜 TV는 안 켰나 했네.
아버지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떨어져서 화장실로 갔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떠들고 있는 상황에서 거실에 들어서면 왠지 굉장히 어색할 것 같아서 도저히 들어가지 못하겠다.
밥이 다 됐다고 부르면 그때야 모르는 척 슬그머니 들어가야지.
이제 누가 손님인지 모르겠다.
나보다 우리 집에 더 잘 녹아들었네.
내가 외동이고 수진이는 오빠가 있어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수진이 말대로 별로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어서 먹자꾸나."
"..."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니는 내가 온다고 하면 불고기나 갈비 같은 고기요리를 항상 준비해 주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식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들이 늘어서 있다.
수진이는 식탁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불고기... 갈비..."
"왜 그러니 아가?"
이제는 수진이에서 새아기가 되었다.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린다고?
"아뇨. 선생님이 좋아하는 반찬뿐이라서요."
"후후후. 준수가 나이를 먹어도 입맛은 변하지를 않아서."
"네. 선생님 아직도 카레랑 돈가스 좋아한대요. 히힛."
"카레랑 돈가스가 뭐 어때서? 맛만 좋구만."
평소와는 다르게 시끌벅적한 식사시간이다.
TV를 켜지도 않았는데 식탁은 매우 훈훈했다.
"새아기는 가리는 음식 없고?"
"저는 다 잘 먹어요."
"기특하네. 우리 준수는 어렸을 때 고등어도 못 먹었는데."
"네? 왜요?"
"가시가 많아서 먹기 불편했나 봐. 잘 안 먹더라고."
씁.
왜 자꾸 그런 옛날이야기를 꺼내시는지 모르겠군.
수진이가 그 특유의 심술궂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선생님~"
"왜?"
"지금도 고등어 못 드세요?"
"먹어."
"진짜로?"
딱
수진이의 이마를 한 대 때렸다.
"아!"
"밥이나 먹어."
"힝."
수진이가 앙탈을 부린다. 힐끗거리며 어머니를 쳐다본다.
이 자식이?
"왜 애를 때리고 그러니?"
"장난이에요. 어머니도 이 녀석이 이런 녀석이란 거 알잖아요."
"이런 녀석이 뭐니 이런 녀석이."
수진이는 그 잠깐 사이에 부모님의 마음을 완전히 휘어잡아버렸다.
뭐 어떤 말을 했길래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런 게 가능하지?
제가 사실은 연 10억 원을 벌고 있는 기성작가입니다. 뭐 그런 식으로 소개했나?
나는 어머니한테 그냥 수진이가 소설가를 하고 있다고만 말했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해 드리진 않았다.
가능성이 있긴 하다.
자식이 신붓감이라고 데려왔는데 미인에 성격도 좋고 요리도 잘하는데 돈도 많다?
이건 헤어지라고 하는 게 이상하지.
생각해보니 진짜로 내가 걱정할 일이 없었네.
아버지는 조용했지만, 식탁에서 웃고 떠든다고 뭐라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매우 천천히 식사하시고 계신다.
평소라면 벌써 다 드시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하는데 아직 반 공기나 밥이 남았다.
아무래도 수진이가 웃고 떠드는 이야기가 제법 맘에 드시는 눈치다.
매우 걱정했는데 정말 별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맞이했던 그 어떤 명절보다 즐겁게 느껴진다.
혜정이와 막 결혼해서 명절을 보내기 위해 내려왔을 때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수진이를 바라본다.
"왜요?"
"아니, 입가에 뭐가 묻어서."
"응~"
눈을 감고 턱을 살짝 내민다.
오늘따라 애교를 더 많이 부리는구나.
어쩌면 부모님에게 우리의 사이가 이렇게 좋아요~ 하고 어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치밀하다.
나는 수진이의 입가를 닦아주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매우 흐뭇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버지도 아닌 척을 하면서 힐끔거렸다.
...수진이는 정말로 여러 가지로 치트인 녀석이었다.
먼치킨은 김준수 따위가 아니고 이수진에게 어울리는 칭호다.
먼치킨 이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