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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화 〉장모님. 따님을 주세요!(5) (124/301)



〈 124화 〉장모님. 따님을 주세요!(5)

"죄송합니다!"

인한 강사가 고개를 팍 숙이며 그렇게 말해왔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90도 인사다. 내가 그한테 사과받을 일이 있었나?


"뭡니까?"

"10월 10일까지 드린다고 했는데 정산금이 20일에 들어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아~"


그러고 보니 인한 강사가 나에게 70만원을 빌려 갔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1달이 넘게 지난 모양이다.

예전에는 꽤나 민감하게 반응했을지 모를 문제긴 했다.


"그러니까 20일에는  수 있다 이 말이죠."

"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나는 자리를 정리하며 그의 사과를 대충 받아드렸다.

지금은 70만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하면 수진이의 어머님을 설득하고 우리의 관계를 허락하게 만들지가 더 중요했다.

솔직히 다른 건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인한 강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얼굴만 살짝 들어서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나에게서 언짢음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깨달았는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세요?"


"커피라도 한잔 뽑아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말이다. 주면 받아야지.

나는 강의를 준비하다가 수진이가 보낸 카톡을 확인했다.

안에는 수진이가 찍어서 보낸 간호사 근무표가 있었다.


수진이의 어머님은 연차가 있으셔서 내년쯤엔 수간호사를 다시는 모양이다.

수간호사 바로 밑에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지은.


아무래도 수진이의 어머님은 이혼하고 자녀들의 성과 본을 바꾼 모양이다.


매사에 철저하고 한번 어긋난  결코 용서하지 않는 단호함을 느꼈다.

수진이 어머님의 근무표를 바라보며 나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N이라고 적힌 야간 근무에는 찾아갈  없다.


D라고 적힌 오전 근무도 주말이 아니면 찾아가기 힘들다.


E라고 적힌 오후 근무도 내가 학원을 끝내고 찾아가면 이미 끝난 시간이다.


...이번  일요일과 다음 주 토요일에 딱 2번 오전 근무와 오후 근무가 잡혀있었다.


딱 2번.


2번으로 어떻게든 어머님을 설득하거나 최소한 말이라도 섞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크게 한숨을 내뱉고 의자에 등을 묻었더니 인한 강사가 웃으면서 커피를 들고온다.

"여깄습니다. 준수 강사님."


"네. 잘 마실게요."

나는 인한 강사가 타준 커피를 손에 들고 커피 향기를 맡았다.


달달한 커피 향에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마일드 해진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으려니 인한 강사가 휴대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 토요일에 모의고사가 있네요?"

"아. 그러고 보니 학원 모의고사가 이번 주였네요."


나는 인한 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탁상 달력을 바라봤다.


10월 17일은 학원에서 치르는 모의고사가 있다.

원래라면 11월에 있는 수능을 보기  마지막으로 모의고사를 한 번  진행하여 학생들이 실전에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를 풀어볼  있도록 예행연습을 겸한 일정이다.


하지만 수능이 1개월 연기되는 바람에 조금 애매한 시기에 시험을 보게 되어 이걸 연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회의를 하다가 학원 스케쥴이 꼬일 가능성이 있어 그냥 스케쥴 대로 진행하기로 한 시험이었다.


"고맙습니다. 인한 강사님."


"네? 아니 이건 뭐, 제가 약속을 안 지켜서 그런 거니까요.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면목이 없다는 듯이 손을 흔드는 인한 강사.

딱히 커피가 고맙다는 뜻은 아니었다.

덕분에 수진이의 어머님께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끔 잊을 때가 있는데 나는 일단 학원 강사다.


그러니 성적을 핑계로 어머님과 만나면 되는 것이지.


이번 주 토요일.

학생들은 쉬는 날인데도 아침부터 학원에 찾아와야 해서 귀찮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강사들도 전부 귀찮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

"으에~"


수진이는 뭔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허물어졌다.


"왜 그래?"


"토요일은  쉬면 안 돼요?"


"아~"

아무래도 이번 주에 보는 학원 모의고사가 귀찮은 모양이다.


나는 작게 웃으면서 카푸치노를 한입 마셨다.

"으~ 선생님은 좋겠다~"


"우리도 시험은 안 쳐도 등원은 해야 해. 감독하고 채점하고 그래야 하니까."

"그래도 시험은 안 치잖아요? 그게 얼마나 귀찮은데."

"귀찮기야 하지."


수진이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아메리카노를 한입 마셨다.

나는 그런 수진이를 천천히 살펴봤다.

주말 동안 어머님에게 많이 시달렸을 텐데 그런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기특한 녀석.

나는 수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뭐, 뭐에요?"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자 흠칫 몸을 떨면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역시 그 또래의 애들로 보인다.


내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인상을 쓰면서 손을 살짝 쳐낸다.


"애 취급하지 말라니까요."

"애 취급 안 했어."

"그럼 머리는 왜 쓰다듬어요?"

"귀여워서."

"...그게  취급 아니에요?"


"아니야."

하아. 역시 수진이랑 있으면 전신에 활력이 돋는다.


"수진아."


"네?"


수진이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다가 내가 부르는 소리에 손거울 너머로 힐끔 하며 시선을 보내온다.

그러다가 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손거울을 집어넣고 살짝 긴장된 모습으로 내 다음 말을 기다린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시험 보면 문제지 가채점해서 나한테 넘겨줘."

"...왜요?"


"어머님을 설득할 방법이 생각났거든. 아, 그리고 어머님 휴대폰 번호도 알려줄래?"


그렇게 말하자 수진이의 얼굴이 의아한 표정에서 점점 활기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역시 아닌척하고 있었지만,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수진이는 방긋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서 나에게 어머님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수진이는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나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꼭 어떻게 할 생각인지 빨리 알려달라고 보채는 느낌이다.

나는 그런 수진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도 학부모야. 네 성적과 관련해서 상담할 일이 있다고 하면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시면서도 만나는 주시겠지."

"헤~"

수진이는 입을 벌리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이런 대책 없고 무례한 행동이 신기한 모양이다.

후르릅 소리를 내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수진이가 작게 웃었다.

"왜?"


"아니요. 선생님이 진짜 많이 달라지셨구나 싶어서요."


"준범이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네."

"역시 선생님이 변하시긴 했어요."

"그래서 싫어?"

"아니요. 역시 역키잡은 이 맛이죠?"


"뭐라는 거야."

나는 수진이의 뻘소리에 잘게 웃어주며 별것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이걸로 수진이는 당분간 괜찮을 것이다.


시험에도 전력으로 임할 수 있겠지.

이제는 내가 어머님을 설득시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나는 차분하게 나는  수 있다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


처음에는 어머님의 사정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병원으로 돌진할까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욱 미움을 받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말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일단 무언가 이야기라도 해야지 허락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사정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무례한 인간을 허락하는 인간은 많지 않으니까.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여고생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40에 가까운 변태로 낙인 찍혀있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직장까지 찾아오면 나에 대한 인식은 바닥을 기다 못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갈 것이다.

나의 발버둥이 미련하고 더러운 행위로 보이겠지.

인한 강사. 정말 고마워.

나는 수진이의 시험지를  손에 들고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수진이 어머님의 연락처에 문자를 보냈다.


수진이의 성적과 우리의 앞으로의 대해서 상의하고 싶다는 요지의 문자.

수진이와 항상 가는  카페의 주소와 함께 오실 때까지 언제까지든 기다리겠다는 내용을 써서 보냈다.


일요일 오후 1시.

수진이가 보내준 근무표를 살펴보니 어머님의 이번 주 근무는 토요일이 오전 근무고 일요일은 오프라고 되어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토요일은 학원에서 감독관을 맡아야 했으니 일요일로 시간대를 변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지 않으시면 뭐... 수진이의 집 앞으로 달려가서 나올 때까지 농성이라도 하는 수밖에.


나는 수진이의 어머님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선은 수진이의 시험지부터 확인해봤다.


이번 시험의 난이도는 9월 모의고사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진이의 성적은 국어를 저번 모의고사보다 1개  틀렸지만, 수학과 영어는 각각 3문제를 틀려서 1등급을 받았고 사탐은 1문제만 틀려서 1등급이었다.

한국사도 1등급을 받았으니  정도면 정말  문제라도 없는 이상 무난하게 수진이가 바라는 학교로 갈  있을 것 같다.

아직 시험까지 1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았으니 충분히 기대해볼 만 하다.

수진이는 어머님에게 성적에 대해서 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쯤 어머님은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하실 것이다.

믿었던 딸이 어디서 늙다리 놈팡이 놈을 데려와서 결혼하겠다는 말을 꺼내서 정신  차리라고 엄하게 대했더니 성적이 곤두박질친  아닐까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나는 치사하게도  때까지 기다린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양심이 찔리는 비겁한 문자.


어머님은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하루하루 굉장히 불편하고 짜증이 나실 거다.

역시 나에 대한 인식은 좀 더 나빠지겠지.

그래도 어떻게든 나와 대화는 해주실 것이다.

우리가 놓인 이 상황은 피한다고 어떻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나는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슬쩍 확인해봤다.


시간은 2시가 넘었고 커피는 바닥을 보인다.

천천히 마신다고 마셨는데 아직은 오시지 않을 모양이다.

나는 30분간  시간을 보내다가 카운터에서 카푸치노를 1잔 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이번에는 커피 1잔을 3시간에 걸쳐 마신다는 생각으로 앉아있어야겠다.

아마 오실 것이다.


...오시겠지?

나는 초조한 마음이 들면 커피를 아주 조금 입에 머금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이 커피가 사라지기 전에 수진이의 어머님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잠이 오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이렇게 졸릴 수가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어머님과 만나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고민하느라 요즘 잠을  못 자기는 했다.

아직... 아직 잠들면 안 되는데.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천천히 눈꺼풀이 감겼다.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수진이의 어머님을 기다렸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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