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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화 〉비가 그친 다음엔ㅡ(6) (143/301)



〈 143화 〉비가 그친 다음엔ㅡ(6)

"다녀왔습니다."

"준수야 갑자기 무슨 일이니? 밥은?"

"아직이요. 그냥 크리스마스고 해서 잠깐 들렸어요."

나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마트에서 사 온 귤 상자를 부엌에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나.

"아버지는요?"


"잠깐 약속이 있으셔서 저녁쯤에 돌아오신다고 했거든. 일단 자리에 앉으렴."

아무래도 타이밍이 어긋난 모양이다.


외투를 벗고 자리에 앉으니 역시 내가 점심을 먹지 않고 오실 거라 생각하셨는지 고기반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하는 식사는 오랜만이네.


나는 밥을 먹으려다가 먼저 고개부터 숙였다.


"준수야?"


"죄송해요."


"왜 그러니?"

"아시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반찬이 없는 식탁의 구석에 에코백을 올렸다.

그 안에는 부모님이 수진이의 집에 두고 온 내 상장들이 가득했다.


설마 이런 걸 모아두실 줄은 몰랐다.

우리 집에서 좋은 성적이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는데.

"후후..."

어머니는 짧게 웃으시면서 에코백의 상장들을 꺼내서 손으로 표면을 어루만지셨다.


정말로 소중한 물건을 접하듯이 아주 정중한 손놀림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랑 너는 정말 닮았단다."

"제가요?"

"그이도 친구분들 앞에서는 능변가가 되거든. 이 상장들을 이렇게 모으고 관리하던 것도 그이야."

"..."


"술도 약한 양반이 친구들만 만났다 하면 술을 마시지. 그렇게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항상 네 얘기라고 친구분들이 하소연하더구나."

"저요?"


"그래. 우리 아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잘생겼는지 아느냐고 그렇게 자랑을 하신단다. K대를 졸업하고 키도 훤칠하고 잘생겼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신다고 하던데."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믿기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어머니의 온화한 표정은 아무리 봐도 거짓말이 아닌  같다.


"새아기가 전화를 해오더구나. 그것 때문에  거지?"


"네..."

"그이가 12월부터였나? 아무튼, 돋보기를 쓰고 이렇게 인상을 쓰곤 평소 잘 보지도 않던 휴대폰을 들여다보더구나. 뭐 하느냐고 물었더니 별거 아니라고 말하며 넘어가길래 그러려니 했지."


어머니는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떠올린 사람처럼 작게 웃고 계셨다.

"아무래도 저번에 새아기가 찾아왔을 때 네가  소설이야기가 떠올랐었나 봐. 읽을 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왜 저러나 했더니 생각할 일이 많았나 봐. 그러다가 네가 사돈을 찾아가서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나 보더구나."

"그래서요?"

어머니는 잠깐 입을 열까 말까 망설이시다가 천천히 입을 여셨다.

"한밤중에 거실에 나와서 불도 안 키고 혼자서 끅끅대며 술을 마시던 모습이 안타까워서 왜 그러나 물어봤지. 그때 말해주더구나. 준수, 네가 쓴 소설을 읽다 보니 그동안 너무 잘못 살았다고. 미안하다고 그러시더구나."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자식새끼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아파했는지도 모르면서 자식 하나는  키웠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고. 그게 너무 괴롭고 미안해서 널 볼 면목이 없다고 하시더구나. 준수야...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진 말렴."


어머니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하고 계셨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밥을 먹고 자리에서 도망치듯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방심하면 무언가가 흘러넘쳐 나올  같아서 두려웠다.

이 나이가 되어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고 같이 저녁을 먹었지만 나는 준비했던 말을 단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평소처럼 조용히 밥을 먹고 방에 틀어박혔을 뿐이었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술렁여서 도저히 마주 보고 입을 열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도 평소와 똑같았다.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표정.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소와 같은 모습이셨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10시. 평소의 부모님이라면 주무실 시간이었다.


하지만 거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는 식탁에서 혼자서 술을 들고 계셨다.

 드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드시는지.

나는 조용히 술잔을 하나 꺼내 들고 와서 아버지의 앞에 앉았다.

"음?"

아버지는 나를 한번 올려다보시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내민 술잔에 술을 따라주셨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드시면서도 별다른 말을 걸어오시진 않았다.


나도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지 못하고 서로 술잔만 주고받는 상황이 연출됐다.

나는 4잔 정도 술을 마시곤 취기가 도는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와서 보니  술은 내가 저번 명절에 사 왔던 술이다.

제법 도수가 높은 양주였는데 술도 잘  드시는 분이 이걸 혼자서 드시다니.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입을 열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등지고 서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어머님이 허락해주셨어요."


"..."

"그냥... 그냥 그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술도 잘 못 드시는데 적당히 드세요."

나는  힘을 짜내서 그 말만을 건네고 내 방으로 향했다.


"미안했다..."

적막한 거실에선 아버지의 조용한 한마디만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끼익.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하아."


 때문일까.

이상할 정도로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저 단 한마디에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가시가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시가 아니고 마개가 빠진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주르륵 흘러 넘치려고 하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흘러넘치지 않도록 막아놨던 마개가 어디로 갔는지 담아뒀던 감정이 쏟아질려고 했다.

역시 혼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인상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고 있는 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부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1,000글자의 글도 100마디의 말도 필요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미안하다는 사과에 우리는 38년 인생의 섭섭함을 모두 털어냈다.

겉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60이 넘는 세월을 저렇게 살아오셨으니 이제 와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이시진 않겠지.

나도 38년이나 이렇게 살아왔다. 쉽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38년만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


`선생님, 수능 끝났으니까 약속 지켜줘요.`


친가에서 결혼식은 어떻게 할 건지 하객은 누굴 부를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허리가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서 집안 곳곳의 먼지나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더는 집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이제 백수여서 시간에 쫓길 일도 없었기에 5일이나 시간을 보내고 수진이에게 서울로 올라간다는 카톡을 보냈더니 답장이 저거였다.


내가 뭔 약속을  적이 있었나?


`약속?`


그렇게 카톡을 보내자 수진이가 화가 난 이모티콘을 3개 연달아서 보내더니 곧장 답장을 보내왔다.


`수능 끝나면 어디든 데려가 준다면서요.`

`아~`


그 정도는 쉽지.

 또 저번에 소원 2개 들어주기 약속을 말하는  알았다.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할까  긴장했는데 그 정도라면 들어줄  있다.

`그래서 들어줄 거에요?`


`말 만해. 언제든지.`


`그럼 내일 찾아갈게요.`

내일이면 31일이네.


연말은 나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걸까.


장모님이 31일이 지나면 하고 싶은 데로 하라고 하셨으니 많이 참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찌뿌듯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진이가 찾아오는데 최대한 깔끔하게 하고 있어야지.


먼지를 털고 침대 커버를 교체하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그러고 보니 어딜 가고 싶다는 거지?

12월 31일.


아, 새해를 보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올 듯싶다.


새해라 새해.

강원도 하조대로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겠네.

다시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걸 가게 되겠다.


군대에서 개고생할 땐 이쪽으로 오줌도 안 싸겠다고 다짐했는데  가게 되겠어.


차라리 수진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홍콩으로 보내주는 거로 퉁치자고 이야기를 해볼까?

...이러니까 존나 아재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내일이 기다려진다.

***


"자, 그럼 가요!"

수진이는 신이 난다는 듯이 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추워..."


"저도 추워요!"

춥다는 녀석이  이렇게 힘이 넘쳐?

수진이는 내 예상대로 해돋이를 보러  거니 저녁을 먹고 나서야 찾아오겠다는 카톡을 보냈다. 추가로 낮잠을 미리 자라는 카톡도 보내왔다.


수진이의 말대로 낮잠을 자고 밥을 먹은 이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롱패딩으로 통나무가 된 수진이가 찾아왔다.

얼굴만 빨개진 모습이 우스웠고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집에 있으면 태우러 갔을 텐데  여기까지 찾아왔느냐고 물었더니 뭔가 은근슬쩍 말을 돌리던데 왜 그런 건진 모르겠다.

출발하기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들리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히터를 틀고 차를 출발시키려니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수진아."

"네."

"예약은 했어?"


"네?"


"..."

그럼 그렇지.

아싸 녀석이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을 텐데 해돋이를 보러 오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데 공실이 있겠어?

수진이는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다가 "아..." 소리를 내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는 "출발!" 소리를 냈다.

해만 보고 돌아오는 수가 있겠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액셀을 밟았다.


그래. 가끔은 이런 모습도 보이고 그래야 사람 냄새가 나고 그러는 거지.

"수진아."

"왜요?"


"근데 그거 왜 우리 부모님 준거야?"


"그거요?"

"내 소설."

"아~"

나는 제본을 뜬 내 소설을 수진이에게 2부 줬다. 정확히는 상중하로 나뉜 소설 즉, 6권을 수진이에게 건네줬었다.

수진이 소장용으로 3권, 장모님께 보여드리기 위해서 3권, 그리고 내가 소장할 목적으로 3권을 만들었지.

그런데 이번에 부천을 다녀오니 우리 집에 3권이 있더라.

"선생님 그건 당연한 거에요."


"응?"


"선생님이 처음으로 마음먹고  소설이니 부모님들이  부씩 가지고 계셔야죠."


"너도 가지고 싶은 거 아니었어?"


"저흰 결혼하니까 선생님껀 내꺼죠. 아니 여보껀 내꺼야."

키득이며 그렇게 말해온다.


"부인. 내껀 내꺼야."

"내가 여보꺼니까 상관없잖아요?"

"..."

여보라고 부를 때마다 발기하는데 정상인가...

예전에 국민 여동생이 16살에 본인보다 10살 가까이 연상인 남자랑 강제로 결혼해서 동거하는 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여고생이랑 결혼이라니 미쳤다고 욕을 하면서도 영화 자체가 재밌어서 웃으면서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여고생한테 여보라는 소리를 들으니 발기하는 지금 꼬라지를 보니 내가 정말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겉으로 태연한 척을 하며 차를 몰았다.


오후 9시 이후로 소등되는 서울은 평소보다 고요했고 차는 막힘없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우리의 다사다난한 2020년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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