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너와 함께 하는 내일(12)
나는 버튼을 난타하느라 화끈거리는 손을 죔죔 하다가 수진이의 손을 잡아서 살펴봤다.
손이 조금 화끈거리고 약간 붓기가 느껴졌지만 손가락 마디를 만져봐도 아프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멍이 들거나 그러진 않은 모양이다.
이거 정말로 해로운 게임기로구나.
나도 수진이도 제법 승부욕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집이 있는 편이지.
알 수 없는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옆에서 보면 참 이상한 커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면 서로 닮은 점이 많다.
나는 한참 수진이의 손을 살피다가 천천히 내려줬다.
수진이는 싱글벙글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좀 져주지 그래요? 왜 매번 그렇게 이기고 싶어 해요?"
"나도 몰라. 그냥 정신을 차리면 그러네. 그러는 너야말로 그냥 포기하면 되지 왜 이렇게 무리를 해?"
"저도 몰라요."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가볍게 몇 번 턴 후 내 팔에 팔을 걸었다.
"후우~ 더워라. 오늘 재밌었어요.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아직은 좀 이른데? 좀 더 놀아도 돼."
"손이 아파서 못 하겠어요."
"으이구~"
뭐 사실 나도 손이 아파서 게임은 못 하겠다.
수진이를 데리고 오락실을 나가려고 하니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어 하키가 보였다.
내가 그쪽에 잠깐 시선을 주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가 나를 올려다본다.
"저것만 마저 하고 갈래요?"
"좋지."
"남자는 남자라니까. 후훗."
수진이는 내 팔에서 팔짱을 풀고 손을 내밀어 왔다.
나는 수진이의 손바닥에 동전을 올려줬다.
"선공은 레이디 퍼스트로 부탁합니다. 선생님."
"네네."
아깐 너무 무리했다고 반성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으면서 승부가 시작되니 다시 불이 붙은 모양이다.
선공을 가져가서 한판 해먹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도 이게 수진이의 좋은 점이지.
이런 거 말고도 수진이는 나를 이기는 게 많고 자랑할 것도 많다.
대표적으로 소설을 비교하면 승부조차 되지 않지.
그런데도 이런 사소한 것에 승부욕을 드러낸다.
상업적 가치가 없는 내 소설을 세상 그 어떤 소설보다 재밌다고 말해준다.
시간이 지나면 수진이에게 품은 감정이 점점 식어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날은 아주 먼 훗날이 될 것 같다.
내가 조금 감성적인 기분이 되어 수진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팍! 하고 손을 내밀었다.
탁탁!
벽에 한번 튕기고 나서 곧장 내 골문으로 들어가버린 하키 퍽.
나는 눈을 껌뻑이고 수진이를 바라본다.
"후훗! 1점~"
수진이가 엣헴 엣헴 신이나 같은 느낌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크흠."
이 자식 상당히 고수다.
정면으로 하키채를 두고 있으니 골에 안 들어갈걸 계산해서 한번 튕기고 집어넣은 거다.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순간적으로 강하게 밀친 것도 그렇고 상당히 전문적이 느낌이 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하키 퍽을 꺼냈다.
고작 게임에 불과하다. 이런 걸 이긴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미묘하게 나를 약 올리는 듯한 수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 꺼져가던 불씨에 불이 붙는 느낌이다.
나는 천천히 하키 퍽을 올려두고 하키 퍽을 쳤다.
탁! 타닥!
직선으로 뻗어 나간 하키 퍽이 수진이의 채에 맞고 퉁겨져 돌아와서 바로 강하게 쳤다.
눈으로 쫓기엔 조금 빠른 속도로 왔다 갔다 부딪히는 하키 퍽.
수진이는 어떻게든 막으려고 열심히 하다가 하키 퍽을 본인의 손으로 넣어버렸다.
자책골.
수진이가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
"훗."
찌릿.
수진이의 눈에 불이 켜진 느낌이다.
수진이는 허리를 숙이고 다시 하키 퍽을 꺼내곤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그리곤 나와 내 손의 채를 바라보며 허점을 찾고 있다.
그러다가 살짝 왼쪽을 쳐다보고는 제법 놀란 눈빛을 보인다.
뭐지?
수진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탁탁!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리며 다시 하키 퍽이 내 골로 들어가버렸다.
"..."
싱긋.
이것도 다 전략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수진이.
얄밉다.
하긴 내가 낚였으니 내 잘못이지.
나는 수진이를 바라보다가 하키 퍽을 꺼내서 바로 위로 올리고 속공처럼 퍽을 쳤다.
하지만 수진이는 그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오히려 내 퍽을 더 강하게 쳐서 돌려줬다.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골이 들어가버렸다.
"후흥~"
이건 질 거 같다.
그래도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저 득의양양한 표정을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힘차게 허리를 세워서 하키 퍽을 테이블에 올렸다.
자, 이번에는 내 차례다.
그런 느낌으로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또다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은 속지 않는다.
나는 퍽을 강하게 쳐서 수진이 쪽으로 보냈다.
하지만 아쉽게 수진이의 채에 부딪혀서 골이 들어가진 않았다.
수진이의 필드에 멈춰서 있는 퍽.
이건 수진이의 득점 찬스다.
하지만 수진이는 한쪽을 바라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수진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보았다.
수진이와 비슷한 또래의 커플로 보이는 한 쌍이 서 있었다.
그들도 수진이와 눈이 마주쳐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러다가 옆에 있는 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며 나와 수진이를 번갈아 바라본다.
방금까지 수진이에게서 느껴지던 즐거움이 불쾌한 무언가로 바뀌기 시작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나는 퍽과 채를 내버려두고 수진이에게 가서 그들의 시선을 가리는 것처럼 등지고 수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오락실에서 나왔다.
그동안에도 수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수진이를 데리고 평소에 가던 카페로 가려고 하다가 망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프렌차이즈 카페로 갔다.
다행히 빈자리는 있었고 수진이도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2잔의 카푸치노를 사서 수진이의 앞과 내 앞에 놓았다.
오늘은 카푸치노의 부드러움이 필요해 보였다.
커피를 마시며 수진이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자 수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봤던 여자... 중학교 때 저랑 가장 친하게 지내던 애예요. 옆에 있던 남자는 그 당시에 그 애가 좋아한다고 했던 남자고."
"아."
그렇게 된 거구만.
수진이가 들려줬던 이야기 중에 본인이 누굴 좋아한다고 먼저 말해서 다른 여자들에게 눈치를 준다던 그 이야기.
그 당사자가 아까 그 여자였나 보다.
대단한 순애보 납셨네.
중학생일 때 좋아하던 인간을 대학생이 돼서 사귀고 있는 건가?
아니면 고등학생일 때 사귀던 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걸까?
수진이의 조금 딱딱해진 표정이 안타깝다.
수진이는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천천히 커피를 내려놓고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카푸치노."
"조금은 마일드해졌지?"
"바보."
수진이는 키득 이며 다시 커피를 마셨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잠깐 당황해서 그랬어요. 생각해보니 이제 결혼하는 사인데 아는 사람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렇지."
수진이는 다시 아까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줬다.
하지만 난 그 모습에서 조금은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3년도 더 전에 잃어버리고 온 것.
입으로는 또래의 애들이 미련하고 멍청해 보인다고 욕을 하지만 그들과 즐겁게 지내던 과거를 다 버리지는 못한 게 아닐까.
나는 수진이의 양손을 모아서 내 손으로 잡아주었다.
"선생님?"
"19년 인생. 그까짓 거 80년에 비하면 뭣도 아니지."
"..."
"오히려 좋네. 수진이는 동창회도 결혼식도 안 가니까 내가 다 독점해서."
"야 이 나쁜 놈아!"
수진이가 버럭 화를 내며 내 정강이를 살짝 걷어찼다.
그래. 차라리 이런 건강한 수진이가 더 잘 어울리지.
수진이는 우는 모습보다 활기찬 모습이 더 예쁘다.
수진이는 나를 노려보다가 커피를 마셨다.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입천장이 데서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것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더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아까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김 서방도 어서 오고요."
"네. 안녕하세요. 장모님."
수진이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수진이의 친가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도 그래서 함께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가 되었다.
수진이를 바라본다.
방긋거리며 오늘 나와 있었던 데이트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장모님은 옆에서 쫑알거리는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작게 웃고 계신다.
"아, 김 서방. 커피라도 마실래요?"
"엄마, 우리 카페 갔다 왔어."
"그래. 그럼 둘 다 소파에 앉아있어."
"알았어~"
수진이는 나의 손을 붙잡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역시 집에 오니 좋은 모양인지 카페를 나섰을 때 보다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수진이의 옆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줬다.
수진이는 내 손결을 느끼다가 내 어깨에 머리를 실었다.
"수진이가 김 서방을 더 좋아하는 거 같아."
"맞는데?"
"얘도 참. 누굴 닮아서 이러는지."
장모님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수진이 때문에 조금 부끄러우신 모양이다.
하긴. 장모님의 입장에선 아직 한참이나 어린 아이 같은 녀석이 사랑이니 뭐니 운명이니 뭐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데 남사스럽긴 할 거 같다.
"오라비는?"
"요즘 시험 때문에 고생 좀 했다고 한숨 잔다던데?"
"오라비가? 군대 갔다 와서 사람 됐나?"
"얘는 왜 그렇게 지 오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네."
"그냥 팩트만 말했을 뿐인데?"
하하호호...는 아니고 티격태격하며 말을 주고받는 모녀의 모습.
주제가 휙휙 바뀌지만, 대화가 끊어지지는 않는다.
역시 수진이는 인싸가 될 운명을 타고난 아인데 안타깝네.
나는 수진이를 조금 아련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참을 떠들던 수진이는 내 눈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왜요?"
"수진이 결혼식엔 친구가 없으니까..."
"아이 씨!"
"이수진!"
"아 왜!"
"말버릇이 그게 뭐야!"
"이건 선생님이 잘못했잖아! 왜 나한테 그래!"
또 티격태격하는 장모님과 수진이.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자 수진이가 제법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고 다시 장모님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나중에 두고 보자는 의미인 듯하다.
오늘 밤은... 수진이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조금 두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