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신혼여행(16)
위이잉.
"누구예요?"
수진이와 신혼여행을 온 지 벌써 8일 차에 접어든 날.
점심을 끝내고 호텔 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소화를 시키고 있는데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부모님."
"아."
신혼여행은 4박 5일의 계획이었다.
서로 급한 일이 없어 조금 길어질 것 같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언제 오는지 궁금하실 시점이 되긴 했지.
내가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하니 수진이가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여보세요. 저 수진인데요. 제가 다시 걸게요."
수진이는 그렇게 몇 마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럴 거면 왜 전화를 끊은 거지?
내가 좀 의아한 표정으로 수진이를 보고 있으려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폰?
"선생님 여기 봐요 여기."
아무래도 영상통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나의 팔을 당겨 옆에 나란히 앉게 하였다.
`신혼여행 중에 미안하네. 언제쯤 돌아오니?`
"글쎄요... 언제쯤 돌아갈까?"
"그냥 내일 돌아가죠."
"엉?"
"이제 볼 것도 없잖아요?"
확실히 이제 별로 볼 게 없기는 하다.
그래도 신혼여행이니 좀 더 즐기다 가자는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수진이의 입에서 바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무래도 본인이 독촉전화를 건 상황이 되었다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어머님. 저희 진짜 갈만한 곳은 다 가봐서 가는 거예요. 산책코스도 여섯 군데는 돌았고요. 말도 타고 재래시장도 갔다 오고 해수욕장도 들러봤고 산도 가봤고 숲길도 걸었어요. 같이 바다에서 스킨스쿠버도 하고 잠수함도 타봤어요!"
수진이는 조금 당황했는지 랩을 하는 것처럼 속사포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수진이의 그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에서 조금은 진심을 느끼셨는지 안심한 표정을 지으셨다.
"진짜로 갈만한 곳은 다 가봤어요. 저희도 언제 돌아갈까 생각 중이었어요."
`그러니? 그럼 언제 들를 예정이니?`
"원랜 바로 갈 생각이었는데 짐을 풀고 갈게요. 음, 내일모레?"
어머니는 신혼여행을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 하신 다음 전화를 끊으셨다.
"후우, 신혼여행은 내일로 끝~"
"괜찮겠어?"
"조금 아쉽긴 한데 저도 슬슬 과제도 하고 공부도 해야죠. 그리고 신혼여행만 여행인가? 매년 여행 다니면 될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신혼여행은 일생에 한 번 뿐인데 굉장히 쿨하구나.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즉흥적으로 신혼여행 기간을 늘렸던 녀석답게 즉흥적으로 신혼여행에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아, 선생님이 아쉬운 건가?"
히죽 이며 내 볼을 검지로 쿡쿡 찔러오는 수진이.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 손가락을 혀로 날름 핥아주었다.
수진이는 잠깐 놀라서 손을 움츠렸다가 침이 묻은 본인의 검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손가락을 본인의 입에 집어넣고 이상야릇하게 빨기 시작했다.
꼭 내 자지를 핥는 듯한 동작.
나는 수진이의 손목을 붙잡고 침대로 눕혔다.
"꺄아! 강간범이 나타났어~"
우리의 신혼 마지막 섹스가 시작되었다.
***
"흐읏~ 아! 서울 공기가 이렇게 탁하구나."
씩씩하게 캐리어를 끌고 내 앞으로 걸어나가는 수진이.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서방님~ 얼릉 와요~"
수진이와의 신혼여행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지막으로 추억을 남기자는 생각에 너무 무리했다.
신혼여행 내내 섹스했으면서도 그리 무리를 했더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몸에서 뭔가를 배출하니까.
분명히 잠은 충분히 잔 것 같은데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당분간은 조금 자제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10년 후의 미래를 보았다."
수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 얼굴에 삿대질을 해왔다.
"우리 서방님 얼굴이 지금 10년은 늙어 보여."
"그럼 9년만 힘내야겠다."
"아이 씨! 잘못했어요."
수진이는 미안하다며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간지럼을 태우며 애교를 부려왔다.
흐, 요물 같으니.
신혼여행 내내 힘들다 뭐다 했으면서 이젠 완전히 전세역전이네.
"운전은 제가 할 테니까 좀 쉬세요."
"미안..."
"그러게 제가 적당히 하랬는데. 하여튼 남자들이란..."
사귄 남자는 나밖에 없고 주변에 남자라고 해봤자 처남밖에 없는 아싸 녀석이 남자를 다 안다는 것처럼 말하니 웃음 밖에 안 나온다.
내가 수진이를 빤히 보고 있으려니 수진이가 내 옆구리를 꼬집어왔다.
"아파."
"지금 또 아싸니 뭐니 그런 생각 했죠?"
아니, 어떻게 알았지?
"꼭 경험해봐야만 아나? 그러면 판타지물은 쓸 수가 없는데?"
"그러니까 수진이에겐 친구가 판타지라는 말이군."
"아이 씨!"
수진이가 옆구리를 검지로 콕콕콕콕 하고 찔러온다.
제법 아프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쳐다본다 수진아."
"보라고 해요. 신혼여행 다녀오는 부부 처음 보나?"
이젠 아주 막 나가는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오는 수진이를 데리고 공항을 나섰다.
"자, 출발합니다~"
"그래."
수진이가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지난 신혼여행을 떠올려 보았다.
4박 5일이 8박 9일이 되어버린 신혼여행.
해외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들과 비교를 하면 그리 긴 시간을 다녀온 것은 아니다.
제법 아쉬움이 남았을 테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수진이.
우리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리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 거로 생각한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한편으론 신경을 쓰게 해버려서 미안하다.
신혼여행이란 전적으로 신부를 위한 여행이라는 인식이 강하니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신혼여행.
수진이가 아쉬움이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신혼여행, 아쉬운 건 없었어?"
"당연히 있죠."
"그래?"
수진이는 빨간불에 차를 세우고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수학여행이 아무리 즐거워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쉽잖아요?"
수진이는 뭔가 그럴싸한 말을 한 사람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신호가 바뀌었음을 확인하고 액셀을 밟았다.
나는 수진이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친구가 없어서 수학여행도 노잼이었을거 같은데."
"김준수!!! 으아아아아악!!!"
"하하."
"진짜 집에 돌아가면 두고 봐! 오늘은 진짜 용서 안 할 거야!!!"
"두고 보라는 사람치고 두려운 녀석이 없지."
"으그그그극."
으득이며 제법 살벌한 소리를 내지만 차는 굉장히 모범적인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조금 더 장난을 치면 진짜 사고라도 날지 모르니 자제해야지.
나는 수진이에게 놀려서 미안하다고 작게 사과를 한 후 천천히 주변 경치를 둘러보았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직전과 무엇하나 달라진 게 없어 보일 텐데.
이상하게 이전보다 경치가 맑고 따스해 보였다.
그렇게 경치를 보고 있으려니 곧 익숙한 간판과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이 막히지도 않아서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구나.
차에서 내린 다음 트렁크에 들어있던 캐리어와 신혼여행 기념품을 손에 들고 내렸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집을 열고 들어갔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데이트라면 집에 돌아갈 때까지가 신혼여행이겠지.
이로써 우리의 신혼여행이 끝이 났다.
"신혼여행 끝~"
수진이는 캐리어를 집으로 끌고 들어온 다음 바닥에 철퍼덕 하고 주저앉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귀찮아~"
그 마음 잘 알지.
나도 캐리어를 한쪽으로 치운 다음 수진이의 옆에 누웠다.
"저녁은 시켜먹죠."
"그러자."
"메뉴는 내 맘대로. 콜?"
"콜."
신혼여행이 끝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턴 나와 수진이의 부부로서의 새 삶이 시작된다.
"여보."
"왜요 서방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도요. 그나저나."
스윽.
수진이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내 배 위로 올라탔다.
"우리 김준수 씨. 내가 두고 보자고 했지?"
"여, 여보?"
"우리 김준수 씨. 19년 동안 힘낸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열심히 세워야 해?"
그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 수진이.
...역시 장난은 도가 넘으면 안 되는 법이지.
***
"어서 오렴."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웃으면서 우리를 반겨주시던 어머니의 표정이 뭔가 어색한 표정으로 바뀐다.
"얘는 나이가 몇인데..."
"어머님, 이건 비밀인데 우리 서방님이 그렇게 변태에요."
"후훗, 그러니?"
"저 얼굴 좀 보라구요. 신혼여행 내내 어찌나 못살게 굴던지."
어머니와 재잘거리며 거실로 들어가는 수진이.
내 얼굴은 어머니의 눈으로 보기에도 수척한 모양이다.
설마 지쳤다 지쳤다 했던 녀석이 그렇게 착정을 해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로 복상사하는 줄 알았다.
무서운 녀석이다.
"왔느냐."
"다녀왔습니다."
"크흠, 적당히 하거라."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얼굴을 힐끔거리시다가 다시 TV를 보시는 아버지.
예, 적당히 해야죠.
너무 무리했다.
당분간은 하루에 한 번. 진하게 하는 것으로 자제해야겠다.
"그래서 이렇게 잠수하고 하늘 위를 바라보는데 보석처럼 반짝반짝해서 예쁘더라구요. 사진으로 찍고 싶었는데 고장 나거나 잃어버릴까 봐 못 찍어서 아쉬워요."
"정말로 재밌었나 보구나. 잘됐네."
"네, 정말로 재밌었어요."
어머니와 재잘거리며 신혼여행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시작하는 수진이.
아버지 쪽을 힐끔 바라보니 리모컨으로 음량을 조금 낮추고 계셨다.
아무래도 수진이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들의 신혼여행 이야기가 내심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한참 재잘거리던 카나리아가 나를 바라보곤 살짝 얼굴을 붉히고 한쪽 뺨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곤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서, 서방님이 밤마다 너무 열심이셔서 금방 아이가 생길 것 같아요." 라는 소리를 했다.
TV를 보는 척하며 수진이의 이야기를 훔쳐 듣던 아버지는 마시던 물을 푸웁하고 뿜어버리셨다.
갑자기 어색해지는 분위기.
수진이는 나를 바라보며 히죽 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해골에 가죽만 씌워둔 것 같은 아들의 몰골과 어디서 개기름이라도 바르고 왔는지 탱탱해 보이는 새아기의 피부.
아버지와 어머니는 굉장히 어색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셨다.
대단하다 이수진!
설마 부모님 앞에서 정사에 관한 농담을 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크흠, 아이, 아이라. 그래. 이름은 정했고?"
아버지는 헛기침한 다음 곧바로 화제를 전환하셨다.
"아직 이요. 좀 생각해보려고요."
"이이는 참. 무슨 벌써 아이 이야기를 하고 그래요?"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좀 일찍 낳고 싶은데요."
"그, 그러니?"
어머니는 이 상황이 굉장히 어색하신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뭔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계셨다.
부모님은 수진이가 마냥 귀엽고 참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계셨겠지만, 이번 일로 아셨겠지.
귀엽고 참하긴 하지만 태풍 같은 여자기도 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