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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3) (230/301)



〈 230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3)

진수의 재롱잔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날 발견한 다음부터 힘차게 팔다리를 흔들어서 넘어지면 어쩌나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진수는 재롱잔치로 준비한 춤이 끝나자마자 나를 향해 후다닥 뛰어오기 시작했다.

"아빠!"

진수는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는 끝까지 동작을 까먹지 않고 춤을  진수가 자랑스럽고 또 대견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춤 잘 추던데?"

"응! 엄마는?"


나는 수진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과 장모님과 함께 앉아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선 진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수야!"


"엄마!"

진수는 수진이를 향해 달려갔다.


수진이는 무릎을 꿇고 팔을 벌려서 뛰어오는 진수를 품에 안았다.

그리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며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진수는 수진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장모님도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셨다.

"할아부지!"

"그래. 진수야!"

진수는 수진이의 품에서 벗어나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는 수진이처럼 몸을 살짝 숙여선 진수를 끌어안았다.


희진이 때문에 섭섭하셨는데 진수의 애교에 섭섭함이 사르륵 녹아버리신  같다.


진수는 아버지와 어머니, 장모님을 차례대로 끌어안고 재롱을 부렸다.


이 녀석은 타고났다.


그래. 수진이 같은 패션 인싸가 아닌 처남 같은 진짜 인싸란 말이지.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는지 잘 아는 타고난 녀석이다.


이 녀석이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 기대가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나는 진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진수야, 뭐 먹고 싶어?"

오늘은 진수의 재롱잔치였다.

특별한 하루였으니 진수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여주고 싶다.


"음..."

진수는 수진이가 아무거나를 꺼낼 때처럼 음~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수진이 Mk.2 같은 녀석이 어떤 음식을 먹을지 잠깐 기다려주기로 했다.

다들 진수의 선택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는데 주위를 둘러보던 진수가 갑자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진수가 달려간 방향을 보니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부모님이 오시지 않은 걸까.

"아빠! 혁진이야!"


"그래, 혁진이구나."


 아이는 우리 아파트에 사는 아이로 진수와 자주 놀고 있는 아이다.

진수는 혁진이의 손을 잡곤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혁진이는 눈가가 조금 촉촉했다.

그래. 그날의 김준수를 보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혁진아."

"네..."


"혁진이 부모님이 오늘 바쁘셔서 아저씨한테 대신 부탁했거든. 혁진이 재롱잔치 동영상 좀 찍어달라고."


"동영상이요?"

"그래. 그리고 아저씨한테 돈을 주시면서 정말 미안한데 혁진이랑 진수랑 먹고 싶은  먹고 오라고 그러셨어. 먹고 싶은 거 있니?"


이런 거짓말이 통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울적해 보이던 혁진이는 이내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그리며 웃기 시작했다.

"떡볶이요!"


"그래. 떡볶이 먹으러 가자. 진수도 좋지?"


"어!"

진수는 혁진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자그마한 녀석이 갑자기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겨우 5살짜린데 친구를 신경쓰다니... 대견하다.

오늘따라 진수의 색다른 모습들을 많이 발견하는  같다.

아이들은 이리도 빨리 커가는 것일까.


"진수가 참 대견하네요."

"그러게.  히어로 같네."

"아, 그러고 보니 진수를 모델로 한 소설 써보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그러네.  봐야겠다."


그래도 그 소설이 잘 써질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진수는 굳이 이야기로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히어로처럼 멋있고 듬직했으니까.

***


진수는 행동은 어른스러웠으나 입맛은 유치원생이었다.


떡볶이를 먹자고 했으면서 막상 떡볶이를 시키니 매워서 잘 먹지 못하고 혀에 부채질하기 바빴다.

옆에서 태연하게 떡볶이를 먹고 있는 혁진이에게 경쟁심이라도 생겼는지 계속 먹으려고 하길래 간장으로 양념한 떡볶이를 시켜줬다.


"누굴 닮아서 이런지..."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본다.

"엄마 닮아서 그렇지."

"아빠 닮아서 그런 거거든요?"

"엄마 닮아서 그런 건데?"

"어휴. 누가 보면 신혼인지 알겠어, 이것아."


장모님은 나와 수진이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인상을 찌푸리셨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뭐, 어쩌나.

우린 언제나 이런 느낌인데.


진수는 간장으로 양념 된 떡볶이가 나오자 신이 나선 열심히 포크를 찌르기 시작했다.


승부욕이 강한 건 엄마를 닮았는데 달달한걸 좋아하는 건 날 닮았구만.

"아, 아버지. 괜찮아요?"

"뭐가?"


"떡볶이요."


"이것도 다 쌀인데 밥이랑 똑같지."

아버지는 그리 말하면서 별로 입맛에 맞지도 않은 떡볶이를 입에 넣으셨다.

음, 아버지. 그거 밀떡입니다.


쌀이나 밀가루나 탄수화물인 건 똑같지...


진수가 먹고 싶다는데 안 먹겠다고 하기도 뭐하니 그냥 오셨겠지.


그러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수진이를 힐끔 쳐다보자 수진이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가를 히죽이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밀떡이라는 말을 꺼냈다.


역시 부부는 일심동체로구만.

***

점심을 먹은 다음엔 다 같이 집으로 향했다.


혁진이의 부모는 맞벌이라 저녁 시간이 되기 전까진 집에 혼자 있어야 해서 오늘은 우리 집에서 진수랑 같이 놀라고 집으로 초대했다.

혁진이는 이미 몇  우리 집으로 찾아온 경험이 있어서 처음에만 우리 눈치를 살피고 이후엔 또래 아이들처럼 즐겁게 웃으면서 놀기 시작했다.

"맞벌이가 좀 그렇긴 하네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진수랑 놀고 있는 혁진이를 조금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예전엔 맞벌이하는 부부가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이가 재롱잔치를 하는 모습도 보러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이건 조금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휴가를  순 없었던 걸까.

그렇게 급한 안건이 있던 걸까.


안다. 혁진이의 부모는 회계사로  다 같은 회계법인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다.


어린이집의 재롱잔치는 12월에서 2월 사이에 하는 행사고 지금은 1월.

바빠서 휴가를 내기엔 여유가 없었겠지.

하지만 저 어린 녀석의 마음에 생채기가 생겼음을 부모가 눈치채줬으면 좋겠다.

돈도 중요하지만... 그 돈은 아이를 위해 벌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버님이랑 어머님. 그냥 내려가셨네요. 자고 가시지."

"그러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수의 재롱잔치를 보고 점심을 먹으시곤 바로 내려가셨다.

아까 누구랑 통화하시던데 무슨 약속이라도 잡히신 모양이다.

"그래서 진수를 주인공으로  소설로 어떤 걸 쓰실 거에요?"

"글쎄... 이건 어때?"


나는 예전에 재밌게 봤던 영화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가 주연으로 나오는 라스트 액션 히어로.


그게 참 재밌었지.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던 꼬마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스크린에서 튀어나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걸 모티브로 쓴다고요?"


"그래. 방금 떠올린 스토린데 이거 어때?"

요즘 진수는 어린이 만화와 쫄쫄이를 입은 독수리 오형제 비스름한 녀석들이 나오는 드라마 비슷한 걸 본다.

그러니 히어로 물을 써도 재밌게 봐주겠지.



방금 떠올린 이야기의 주제는 대강 이런 느낌이다.

진수가 읽던 히어로 만화의 주인공이 현실 세계로 튀어나와서 겪는 좌충우돌을 그린 이야기.

처음엔 자신이 좋아하던 히어로를 만나게 되어 기뻐하는 진수지만 히어로는 항상 빌런이 있어야 성립하는 존재.

돌아갈 방법도 없고 빌런도 없으니 완전 폐품 같은 아저씨가 되어 집에서 코나 파며 밥이나 축내는 식객이 되어버린다.

진수는 히어로에게 실망하고 만화책도 전부 버려버리는데 어느 순간 빌런들이 현실 세계로 튀어나오기 시작하며 사건 사고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히어로는 어떻게든 빌런들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싸울 때마다 다쳐간다.

진수는 이야기에 나오던 주인공처럼 빌런을 해치우지 못하는 히어로에게 실망을 하면서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멋있음을 느끼며 그를 도와 빌런을 해치우고 마지막엔 눈물의 이별을 하며 성장하는 스토리.

"어때?"


"어떻고 자시고 완전히 파쿠리네."


"파쿠리 아니거든."

소재의 유사성이라고 불러라.


"주인공이 주체가 아니라 히어로가 주체라서 호불호도 심하게 갈리고 히어로가 남자니까 브로맨스 소리 듣겠네요.  다음 똥꼬충."

"어차피 진수밖에 안 읽거든."


"아."


"그럼 히어로를 여캐로 하면 어때?"

"심심하면 여자 등장시키는 한남충!"

어쩌라는 거지?

나는 평소처럼 수진이와 티격태격하며 장난을 쳤다.


밖에서 우느라 피곤했는지 잠이 든 희진이와 거실에서 장난감 칼을 들고 칼싸움을 하는 진수와 그 친구.


커피를 마시며 장난을 치는 나와 수진이.

평화로운 오후의 한 때다.


위이잉.

나는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누구예요?"


"어머니네. 도착하셨다고 전화하셨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준수니?`


"네. 잘 들어가셨어요?"


`그래. 그, 준수야.`

"네. 말씀하세요."

`...미안했단다.`

"네?"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

`진수 재롱잔치를 보고 있으려니 예전에 우리 준수... 재롱잔치에 못 갔던 게 생각나서. 미안했단다. 그때 유치원 선생님이 우리 준수가 펑펑 울었다고 말해주셨는데 집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서 한동안 몰랐어. 그냥, 그냥 우리 준수가 대견하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했단다.`


"됐어요. 옛날이야긴데요 뭘. 편히 쉬세요."

`그래. 몸조심하고.`


"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 진수의 재롱잔치를 보시지 않고 나를 바라보시길래 왜 그러시나 했더니 옛날 생각이 나셔서 그랬나 보네.


나는 조금 씁쓸한 기분에 적당히 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다방 커피의 달달함이 조금은 씁쓸한 기분을 희석해주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수진이는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저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수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도대체 몇 번이나 부정하는 거야? 독자들이 욕하겠다."


"여긴 분충 밖에 없습니다~"

수진이의 농담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었다.


그래. 옛날 일이지.

조금 씁쓸했던 추억에 불과하다.


"고마워."


"별말씀을."


오늘따라 수진이가 더 사랑스럽다.

나는 자연스럽게 수진이의 뺨으로 손을 뻗고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수진이도 내가 키스를 하려고 한다는  눈치챘는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짧은 키스.


아주 잠깐 입술이 닿고 떨어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닿은 그 순간 수진이를 향한 애정이 흘러넘쳤다.

나는 내 가슴이 시키는 데로 다시 한 번 키스하려고 했다.


수진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키스를 하려고 눈을 감았는데 거실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뚝 끊겼다는  눈치챘다.

그래서 거실 쪽을 힐끔 쳐다봤더니 진수랑 혁진이가 나와 수진이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수진이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조숙한 꼬맹이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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