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10)
봄이 찾아오고 나와 수진이는 꽃놀이를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수진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 요란한 준비가 웃음이 나와 왜 그리 꾸미느냐고 물었더니 여자는 몇 살이 되어도 나갈 땐 꾸미는 거라면서 오히려 나를 할아버지가 다 됐다며 잔소리를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런 수진이의 투덜거림에 어울려줬다.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도 내 눈엔 아직 꼬맹이들로 보이는 것처럼 수진이는 나이를 먹어도 내 눈엔 짓궂은 눈으로 장난을 치던 19살 여고생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 투덜거림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거겠지.
수진이와 옷을 갖춰 입고 나갈 준비를 하자 수진이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것이 보였다.
"왜?"
"진수랑 희진이한테 전화하려고. 꽃놀이 같이 가자고 그랬었거든."
"나 참 그 녀석들도..."
몇 살을 먹어도 우리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 큰일이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니 수진이가 웃으면서 내 뺨을 쓰다듬어왔다.
"선생님이 애들을 애들 취급해서 그런 거야."
"그런가?"
전화가 연결되고 홀로그램에 진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진수는 우리가 꽃놀이를 간다는 것을 듣고는 바로 준비하고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희진이도 그리 다르진 않았다.
나는 그저 수진이와 조금 느긋하게 주위를 산책하며 꽃을 보고 풍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녀석들도 참...
"기쁘구나?"
수진이가 보기엔 내가 기뻐 보였나 보다.
나는 뭔가 아니라는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입을 다물었다.
그래. 기쁘다.
그 나이가 돼서 가정을 이루고 독립을 했음에도 아빠라고 챙겨주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애들이 날 너무 노인 취급한단 말이야."
"노인 맞잖아요?"
수진이는 희죽거리며 나를 놀려왔다.
나는 프론트 더블 바이셉스 포즈를 취하며 이두근을 강조하며 보여줬다.
"80에 턱걸이 20개 하는 노인 본적 있수?"
"눈앞에 있네요?"
"틀린 말은 아니네."
그리 수진이와 장난을 치고 있으려니 진수가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 모시러 왔습니다."
"뭘 모시러 오고 그러냐? 아빠 아직 건강해."
"그래도..."
"아빠는 이 나이에도 턱걸이 20개나 한다고?"
"네, 네. 가시죠."
"수진아, 아들놈이 날 자꾸 할애비 취급하는데 어떻게 할꼬?"
"맞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마누라도 아들내미도 참 야박한 녀석들이다.
난 아직 건강한데 말이야.
"혜은이는?"
"친구들이랑 꽃놀이하러 갔어. 날씨가 좋잖아."
"그래? 수진이랑 다르게 친구가 많나 보네."
"여보~?"
수진이는 얼굴 가득 미소를 보이며 내 옆구리를 꼬집어왔다.
몇 살을 먹어도 수진이의 꼬집기는 아팠다.
"전 얇고 넓게가 아니고 좁고 깊게 사귀는 거에요."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부인.
그냥 장난이니 그만 놓아주시오.
***
"윤서는 왜 안 데리고 왔나 했더니 이러려고 그랬구만."
"네. 한 분만 모시기도 그렇잖아요."
어차피 인한이 녀석은 종종 연락을 주고받고 집도 근처여서 자주 만나는 데 말이다.
그래도 왔으니 인사라도 나눠야지.
"잠깐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수진이와 진수를 남겨두고 인한이에게 다가갔다.
인한이는 나를 발견하자 씨익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왔다.
이제 이 녀석도 곧 있으면 여든 살이 되는데도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오랜만이야."
"오랜만은 무슨 오랜만. 2주일 전에 만났잖아."
"그 정도면 오랜만이지. 이 사람은 진짜 정이 있는 건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인한이는 그리 말하며 나에게 종이컵을 건네주고 맥주를 따라주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 옆에 있는 음료수를 따라달라고 했다.
그러자 인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었다.
"형님은 변한 게 없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가깝다더라."
인한이가 따라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으려니 윤서와 제수씨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인한이가 대화를 나누라고 자리를 피해 준 느낌이다.
나는 그 작은 배려에 감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진수와 수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왔어요?"
"어. 인한이도 여전하네."
"후훗.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나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나의 옆에 앉아 하늘하늘 흔들리는 벚꽃을 올려다보았다.
따사로운 봄날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광경에 숨을 죽이고 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진수가 내 비어있던 오른쪽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 놈이 징그럽게 뭐하는 거냐?"
"..."
아무래도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치여서 시선으로 얼른 말을 해보라고 재촉하니 진수가 벚꽃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있잖아요... 저 예전에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기억하세요?"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과 수진이에 관한 기억이라면 뭐든지 기억하고 있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실은 작가가 아니고 아버지가 되고 싶었어요. 제 장래희망이 아버지셨어요."
"나? 내가 돼서 뭐하게?"
"선생님, 그냥 좀 들어봐요."
수진이는 진수가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한 모양인지 내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낯간지러운 느낌에 볼을 긁적이며 진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정말 한결같으셨죠. 공부하라고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고 운동 좀 그만하라고 신경질도 내지 않으셨고 제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하셨죠."
"그랬지."
진수 만큼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길 바랐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외로움과 서러움을 진수에겐 전해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내버려두지도 않으셨죠. 제가 공부가 어렵다고 하면 제 옆에서 같이 공부를 하시고 제가 축구가 재미없다고 그만두려고 하니까 주말에 운동장에 불러서 같이 축구를 해주셨죠."
"그랬지."
이렇게 나이를 먹은 인간도 할 수 있는데 아직 젊은 진수가 못할 게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쓴 소설을 제 눈으로 직접 읽어보고 저도 아버지처럼... 소설가가 되자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절 주인공으로 해서 히어로 소설을 써주셨지만, 저한텐 아버지가 히어로였어요."
"갑자기 낯 뜨겁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 옆자리에 앉은 진수를 슬쩍 바라보니 어느새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붉어진 진수가 있었다.
날 닮아서 술도 잘 못 마시는 녀석이 이런 낯뜨거운 이야기를 하려고 술이라도 마신 걸까.
"평생 화를 내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딱 한 번 화를 내셨죠."
"아, 그때 말하는 거니?"
"네."
수진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수.
화라... 아, 그랬지.
딱 한 번 화를 낸 적이 있긴 했다.
진수와 희진이가 장난을 치다가 나와 수진이의 나는월억킥&K-헤밍웨이 머그컵을 깨먹었을 때지.
그땐 머리에 피가 올라서 버럭 소리를 쳤던 걸로 기억한다.
"그땐 아버지가 왜 화를 내셨는지도 몰랐고 갑자기 화를 내시니 낯설고 반항심도 들어서... 막말해서 죄송했습니다."
"뭐 그런걸..."
이제 와서 말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자 진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소설가를 포기한 건 그땝니다.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처음으로 쓰신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날 밤에 밤새도록 읽었거든요."
"뭐?"
"아버지가 쓴 소설... 보다보니 전 못 쓰겠더라고요. 그것보다 재밌는 소설을 쓸 자신도 없어졌고요."
"그러냐..."
뭔가 많이 부족했던 소설이었지만 진수에겐 다르게 느껴졌나 보다.
나는 진수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벚꽃이 흩날리는 광경을 쳐다봤다.
"소중한 머그컵... 깨버려서 죄송했습니다. 이제서야 사과를 하는 못난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하고요."
"진수야."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진수가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다.
이미 40대가 되어 얼굴엔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녀석.
하지만 그 모습은 잘못을 저지르고 어찌할 줄 몰라하던 초등학생 때의 진수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머그컵... 그거 언젠간 깨질 거였어. 이제 신경 안 쓴다."
"아버지..."
"너무 오래 썼더니 실금도 간 상태여서 그냥 쓰지 않고 찬장에 넣어두려고 했는데 욕심 때문에 계속 쓴 게 문제였지. 아버지란 사람이 철없이 애들한테 화풀이를 한 거야. 넌 잘못 없다."
내 말에 진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주었다.
이 녀석은... 나보단 낫다.
언제 죽을지 모를 부모에게 본인이 잘못했던 일에 사과를 구하는 것은 용기가 있는 행동이니까.
내가... 아들을 참 잘 키웠지.
"진수야."
"네, 아버지."
"넌 내게 죄책감이었다."
아버지에게 받았던 서러움과 외로움 그리고 아버지에게 전하지 못했던 죄송함과 사랑한다는 감정을 진수에게 쏟았다.
진수에게 최선을 다할수록 마음이 편해졌었다.
나와 아버지를 닮은 이 녀석에게 내 모든 사랑을 쏟는 것이 아버지를 향한 사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진수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죄했어야만 했다.
나의 씁쓸한 후회가 입 밖으로 내뱉어지자 수진이가 내 손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그 온기가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위로하는 느낌이어서 가슴이 술렁였다.
"아버지. 그럼 지금은..."
"지금은 네가 내... 자랑이지. 친구놈들이 자식 자랑을 해도 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거로만 보였다. 너는 언제나 내 자랑이야."
아버지에게 들려주지 못했던 죄송하다는 말.
아버지에게 전해주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
그 모든 후회와 사랑을 진수에게 쏟았다.
그리고 진수는 훌륭하게 어른이 되어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그저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부끄럽네요. 이 나이에 그런 말을 들으니."
"짜식아. 내가 늘 하는 말이 있지? 사랑은 표현해야 하는 거야."
가슴에 담아두고 상대방도 알고 있을 거라며 전하지 못하면 언젠가 후회하는 날이 온다.
사랑한다면 늦기 전에 표현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그리 결론을 내고 있으려니 진수가 수진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부끄러워서 얼굴 붉히고 계시는데요?"
내가 옆을 슬쩍 쳐다보자 수진이가 왜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멋쩍어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자 진수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을 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웃어라.
나를 닮은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에게 지어 보였던 환한 미소가 떠올라서... 더 나은 기분이 되니까.
너는 평생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고 쳐서 결혼한 것도 죄송했습니다."
진수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여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윤서가 꼬셨겠지?"
"네?"
"중학교 때부터 여친이 없던 적이 없는 놈이 그 정도 앞가림도 못했을 거라곤 생각 안 한다. 어차피 윤서가 꼬셨겠지. 그지?"
진수는 내 말에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어색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다 안다. 여자들이 원래 그렇지."
"여보세요 김준수 씨. 여자는 나밖에 모르면서 왜 그리 다 안다는 소리를 하실까?"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엄마가 엄청 불여시인거 아냐? 우리 결혼기념일이 왜 5월 29일 인줄 알아?"
내가 그리 말하자 수진이가 내 등을 조금 세게 두드리며 애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생각이냐며 얼굴을 붉혔다.
수진이 녀석은 내 기억 속에 조금이라도 남을 전 아내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굳이 5월 마지막 주에 결혼식을 올리는 여자다.
그런 불여시같은 마누라랑 평생을 함께했는데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하진 않는다.
진수와 함께 사고를 쳤다고 찾아왔을 때 내가 결혼을 허락하자 해냈다는 듯이 입가를 씰룩이던 윤서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니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이지 마라.
아니, 앞으로 나한테 사과하지 마라.
진수야. 더는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만약 내세가 허락된다면 다시 나의 아이로 태어나줬으면 싶을 정도로... 너희는 나와 수진이의 자랑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