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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6화 〉 앙코르 : 나와 선생님이 2회차를 살아가는 방법♥(5) (256/301)

〈 256화 〉 앙코르 : 나와 선생님이 2회차를 살아가는 방법♥(5)

* * *

선생님이 즐거운 표정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평소라면 나도 그런 선생님을 보며 흐뭇한 기분이 들어야 하건만 지금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약점을 잡은 선생님은 집요하다.

오늘 밤은 기대할 만하냐며 울어온 선생님은 반드시 뭔가 저지른다.

그것도 터무니없는 걸로….

오늘 밤에 있을 그 시간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선생님이 아직 내게 그런 쪽으로 반응을 해준다는 사실은 알았으니… 피할까?

진수나 희진이를 은근슬쩍 불러봐?

아니, 그건 아니야.

선생님이 그랬었잖아? 이번 생은 나만을 바라보며 사시겠다고.

그런데 여기서 진수나 희진이를 부르는 건 선생님께 실례가 될 거야.

으… 어쩌지?

선생님은 어느새 노트북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어놓고 아주 멋대로인 사람이야.

뭔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주도권을 잡아야겠어.

선생님은 시작했다 하면 브레이크가 망가지는 사람이니까.

내가 분위기를 주도해서 멋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선생님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예요?”

“어? 진수.”

진수가 그새를 못 참고 전화를 해 온 것 같다.

진수는 참 파파보이였지.

선생님이 돌아가신 아버님을 떠올리며 진수에게 얼마나 애정을 표하셨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저렇게 가정에 충실하고 자상한 남편은 없다며 같은 동에 살던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하시곤 했었지….

“잠깐만.”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가셨다.

뭔가 둘이서만 할 이야기라도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진수도 선생님께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잠깐 기다리고 있으려니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선생님이 돌아왔다.

선생님은 아버님처럼 전화를 그리 오래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와 연애를 할 때에도 내가 먼저 전화를 걸고 대화를 주도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10분이나 통화를 하다니, 역시 진수는 나이를 먹어도 진수인가 봐.

그게 귀엽기도 하고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진수가 뭐래요?”

“불편한 거 없나, 필요한 거 없나, 뭐… 그런 이야기지.”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 앉으셨지만, 뭔가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팍팍 느껴졌다.

뭘까?

뭔가를 숨기고 있을 때 종종 내비치는 태돈데….

“잠깐만 나갔다 올게.”

“어딜요?”

“요~ 앞이야, 요 앞.”

선생님은 뭔가 서두르는 사람처럼 외투를 걸치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설마?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한창때 남고생의 몸을 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며 줄어들었던 성욕이 최고조에 오른 상태라는 뜻이지.

그러니까 선생님이 외출한 건 어쩌면 그렇고 그런 걸 준비하려고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떠냐고 물으면 솔직히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한다.

기대되긴 하는데 그, 너무 과한 건 좀….

그리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돌아왔다.

“다녀왔어.”

“어딜 다녀… 그 짐은 다 뭐예요?”

“그냥 뭐 이것저것.”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사 온 물건들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뭘 사 왔나 했더니 상당한 양의 식재료였다.

“장 보고 왔어요? 그럴 거면 같이 가자고 하지.”

“양이 많은 것도 아닌데 뭘.”

이상하다.

장 보는 것도 하나의 데이트라고 하던 사람이 선생님이다.

부부란 그저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법적 관계가 아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걸어 나가는 동반자다.

그러니 집안일과 육아부터 장을 보는 그런 작은 일까지 함께하자고 했던 사람이 선생님이다.

진짜 뭐가 있는 걸까?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선생님은 답변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혹시 포인트라도 쌓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전생에 그런 광고를 봤던 것 같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분명히 게임기 광고였지?

인터넷에 종종 그런 글이 올라오곤 했다.

정말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아내가 허락해줄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 남자들이 거기에 댓글을 다는데 그게 제법 재밌었다.

아내의 허락을 얻기 위해 1달 동안 미리 착한 짓을 하는 남편의 이야기.

몰래 모아놓은 비상금으로 물건을 사고 경품으로 속이는 남편의 이야기.

새 제품인데 중고로 싸게 샀다고 말하며 속이는 남편의 이야기 등등.

보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선생님은 전혀 공감이 안 돼서 잘 모르겠다고 그랬었지.

우린 평생 그런 거로 다툰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의 이 태도는 아무리 봐도 그 광고에서 봤던 태도다.

아내에게 뭔가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도대체 뭘까?

이제 와서 선생님이 나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라고 해도 잘 모르겠다.

부부싸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폭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서로 불편한 문제가 생기면 쌓아두지 말고 그 자리에서 풀자는 것이 우리 집의 방침이었다.

선생님이 내게 용서를 구할 일은 없다는 이야기다.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선생님이 아니고 나다.

선생님은 괜찮다고 했지만, 선생님 가슴을 멍들게 했던 그 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늘 점심이랑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

“…네.”

선생님이 콧노래를 부르며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아까까지 뭔가 고민하던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지금은 상당히 편안한 표정이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느낌으로 선생님이 차린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사과를 깎아왔다.

“자.”

사과를 포크로 찍어 내 입에 넣어주기까지.

이렇게까지 해주니까 이젠 감사함을 넘어 찝찝하기까지 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아냐.”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으로 내 옆에서 TV를 켜고 사과를 먹었다.

의문은 깊어져 갔다.

***

한동안 노트북 앞에 앉아 소설을 쓰던 선생님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요?”

“식사 준비하려고.”

“벌써요?”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4시.

진수와 희진이가 집을 나간 다음부터 우린 오후 6시쯤에 식사를 했다.

식사 준비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른 시간이다.

그런데 왜 벌써부터?

“오랜만에 그거 좀 해보려고.”

선생님은 그리 말하며 냉장고에 들어있던 식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꺼낸 식재료를 보고 있으려니 대충 어떤 요리가 나올 건지 견적이 나왔다.

“그거네요?”

“그래, 그거.”

선생님은 내게 처음으로 만들어줬던 그 요리를 할 생각인 듯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내 생일도 선생님 생일도 아니다.

진수나 희진이 생일은 물론 아니었고 우리 결혼기념일도 아니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날이다.

역시 진수랑 전화해서 뭐가 있었던 것 같지?

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진수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선생님은 요리로 바쁠 테니 방 안에 들어가서 전화를 하면 눈치채지 못하겠지.

“여보세요, 진수니?”

ㅡ 예,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혹시 아빠한테 무슨 이야기라도 한 거니? 아까부터 그이가 이상해.”

ㅡ 아~

역시 진수 때문이었구나.

“진수야?”

ㅡ 그, 음, 어… 궁금하세요?

그럼 안 궁금하겠니?

ㅡ 그, 어제 짐 정리를 했어요.

“짐?”

ㅡ 네. 어머니랑 아버지가 사시던 그 집이요.

이제 우리가 없으니 처음엔 팔려고 했지만, 도저히 팔 수 없었다는 진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ㅡ 그래서 저희가 거기서 살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짐 정리를 하는데 그게 보이더라고요.

“그거?”

ㅡ 어머니가 예전에 쓰셨던 육아일기요.

“그게 왜?”

ㅡ 윤서가 쓴 육아일기가 있는데 그거랑은 좀 달라서요.

진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진수는 우리가 살던 그 집에 있던 짐을 정리하고 거기서 살아도 되는지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오히려 그 집을 아껴줘서 고맙다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고 했다.

진수는 고맙다고 말하며 짐을 정리하다가 그 물건을 발견했다고 한다.

내가 진수와 희진이를 키우면서 썼던 육아일기를 말이다.

ㅡ 예전에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기억이 있기는 한데 솔직히 가물가물했거든요. 근데 윤서가 보면서 놀라더라고요.

“왜?”

ㅡ 어머님은 정말 나랑 희진이를 많이 사랑하셨다고.

“응? 당연한거 아니니?”

ㅡ 그게요….

진수는 윤서가 썼던 육아일기를 이삿짐을 싸면서 읽어봤다고 했다.

그 육아일기는 내가 쓴 육아일기와는 제법 달랐다고.

ㅡ 그, 보니까 마음이 착잡해지더라고요.

진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썩 익숙한 내용이었다.

ㅡ 허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 배가 무겁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었다가 손목을 다친 것 같다, 인대가 늘어난 것 같다… 그런 내용이었거든요.

“….”

산모가 흔히 겪는 이야기다.

나도 겪었던 이야기고.

ㅡ 어머니가 쓰신 육아일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윤서가 놀라더라고요.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시다고.

쓰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육아일기는 선생님도 보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이 날 얼마나 신경 써주고 있는지 아는데도 그런 내용을 적을 수는 없었다.

ㅡ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버지가 좀 복잡한 느낌으로 “음… 음….” 하시더니 전화를 끊으셨어요.

“그래?”

아무래도 선생님은 내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러니 내게 더 잘하려고 저렇게 하시는 거겠지.

아버님과 어머님껜 빨리 손주를 보여드리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꺼내곤 했다.

하지만 내심으론 조금 무서웠다.

인터넷에서 임산부가 겪어야 하는 불편함과 괴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난 괜찮은 편이었다.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니 선생님이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며 날 배려해줬으니까.

그러니 선생님이 빚으로 느낄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진수와의 통화를 끝내고 거실로 향하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요리를 하는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

“응?”

“저는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그리 힘들지 않았어요.”

“음.”

선생님은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좋은 남편감은 아니었지.”

“저한텐 최고였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많았잖아? 철도 없었고.”

선생님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곧 불혹을 맞이하는 나이였는데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못난 놈이었어.”

종종 도가 지나치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가 날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아는데도 어리광을 참 많이 부렸어.”

그만큼 선생님이 소중해서 그랬어요.

“전생에선 못난 모습도 많이 보여줬지만 말이야… 이렇게 새 삶을 살게 됐으니까 네겐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요?”

“이젠 널 챙겨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선생님은 진수가 들려준 육아일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엄마와 나누었던 약속이 떠올랐다고 했다.

날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약속 말이다.

아버님, 어머님도 우리 엄마도 더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 그만큼 더 날 사랑하겠다고….

선생님이 요리하느라 내게 등을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기울기 시작한 저 태양보다 더 새빨간 상태일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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