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드베릭 록 하이젠버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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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베르그릭에 방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테라리스가 죄다 멸망한 지 천 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우리 왕국을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라면 다른 이들의 앞에 당당히 나서기는커녕 부끄러워 평생 숨어 지냈을 것입니다.”
네로멜티아는 회담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적인 이야기를 줄이려 했다.
그러나 드베릭 왕은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화제가 제시되자 새롭게 짜인 판에서는 어떻게든 주도권을 쥐기 위해 다시 한번 기 싸움을 거는 것이었다.
세계의 멸망이라는 막중한 결과를 앞세워 마왕을 힐난하는 책임론.
마왕을 죄인으로 깎아내려 기를 꺾을 셈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 점은 아직도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조금만 더 대책을 잘 세웠더라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폐, 폐하…!!”
“면목이 없구나. 일이 이렇게 되어서 왕국을 다스리는 일도 무척 힘들었겠지. 미안하다.”
네로멜티아는 자신을 변호하기보다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을 택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에게 책을 잡으려고 기를 쓰는 드베릭 왕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말 몇 마디로 그를 가지고 놀았던 네로멜티아였기에, 그녀가 순순히 사과하는 모습은 넬라넬라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넬라넬라는 사과를 입에 올리는 네로멜티아를 말리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으나, 네로멜티아가 손짓으로 그녀를 저지한 까닭에 차마 나서지 못했다.
주군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 거나 주군의 말을 막는 것은 평소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불경이라 생각했을 것이었으나, 넬라넬라는 그런 사리를 논할 정도의 정신도 없는 상태였다.
네로멜티아가 손짓으로 저지하지 않았다면 넬라넬라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네로멜티아의 무죄에 대해 열변을 토했을 것이었다.
넬라넬라는 테라리스의 멸망이 네로멜티아의 탓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네로멜티아와 맺고 있는 개인적인 친분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고, 네로멜티아를 만나기 전에도 넬라넬라는 지금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네로멜티아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 가며 무고한 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모든 잘못은 전쟁의 불길로 테라리스의 모든 것을 앗아간 휴미안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전쟁을 막으려 애썼던 이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넬라넬라가 가진 정의로써는 그런 것이었다.
“그나마 좀 아시니 다행이군요. 정말이지 왕국 통치에 얼마나 힘을 쏟고 있는지, 잠도 맘 편히 못 이룰 지경입니다. 망자가 되셨던 지난 천 년 동안 어디에서 무얼 하셨는지, 저는 사후세계 따위를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네로멜티아님의 실수 때문에 몰려온 멸망에서 드베르그릭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룬 제 고생이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말리는 이도 없고 상대 또한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눈치였기에, 드베릭 왕은 더욱 신이 나서 상대를 힐난했다.
자신이 약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았다 생각했는지 누가 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선을 넘는 것이었다.
이미 그가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은 비판이 아닌 비난이었다.
그러나 네로멜티아는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그의 가시 돋친 말들을 모두 수용해 줄 뿐이었다.
“그래. 이 맥켄지 시티에 도착해 보니 바깥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평화가 있더군.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흠흠. 알아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실수’라는 단어까지 언급해가며 매몰찬 비난을 내뱉었으나, 네로멜티아는 화를 내지 않았고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는 데다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선뜻 칭찬해 주기까지 하니 드베릭 왕은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오히려 자신의 말이 너무 심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고, 멋쩍어진 드베릭 왕은 적의를 태우던 태도가 다소 누그러지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세금을 금화나 은화로 걷는다고 하던데.”
“윽…!”
드베릭 왕은 방심하다 한 방 먹었다 싶어 뜨끔하는 모습을 보였다.
순순히 주도권을 내어주나 싶더니 불시에 자신의 약점을 치고 들어왔구나 싶어 놀란 것이었다.
이 멸망한 세계에서 세금의 명목으로 금화를 긁어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헐뜯고 비난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 그건 여기 맥켄지 시티에 경제가 살아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지. 거리에서도 화폐가 쓰이는 것을 보면 실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고. 자원이 모자란 상황이었다면 필요한 물품들을 위시한 물물교환을 더욱 선호하게 될 테니 화폐의 가치는 진작에 땅에 떨어졌겠지. 그 화폐의 가치가 여전하다는 건 네가 이 왕국을 모자람 없이 잘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구나.”
“아하하… 아, 안목이 높으시군요! 마왕이셔서 그런지 무척 지혜로우십니다! 그, 그 모든 걸 단번에 간파하시다니! 으하하하!”
이제는 드베릭 왕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그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네로멜티아.
드베릭 왕 자신 역시 이 정도로 좋게 포장될 줄은 몰랐던 지라 얼떨떨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전혀 예상에 없었던 칭찬에 무척 기분이 좋아서 웃음조차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물자에 모자람이 없는 상황은 선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드로겐하임이 워낙에 왕국 정비를 잘 해 두어서 그런 것이었으니 경제에 대해서 드베릭 왕의 공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었다.
온갖 작물과 가축을 생산하는 농경 구역도 선왕 드로겐하임이 구축한 것이었고, 턱없이 부족한 목재를 장작으로 사용하는 대신 용암을 끌어 올려 도시 곳곳에 보급하는 화력 지원 방식도 드로겐하임이 고안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공업 지구는 먼 옛날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인류에게 쓰이는 물건 대부분은 모두 창조할 수 있는 장인의 종족이 드워프였기에 만들지 못할 물건이 없어 물질적으로도 모자랄 것이 없는 여건이었다.
그러니 결국 엄밀히 따지자면 네로멜티아가 칭찬한 점들은 모두 드워프 사회의 특징과 선왕 드로겐하임이 일궈낸 결과일 뿐, 드베릭 왕의 통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 것이었다.
드베릭 왕 자신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와중에 네로멜티아가 굳이 복잡한 분석을 해가며 모든 것을 그의 공으로 돌려 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짐은 향후 재건될 헤모니겐트와 드베르그릭 사이의 교류에 관하여 논하고자 왔다만, 그에 응해볼 생각은 있는가.”
“… 교류… 말씀이십니까…….”
기분 좋아서 절로 웃음을 짓던 모습과 달리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드베릭 왕.
사실 그가 네로멜티아에게 그토록 홀대하고 책을 잡았던 것은 모두 네로멜티아를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명확히 말하자면 두 국가 사이의 교류와 만남을 통해 자신의 비리를 발견한 네로멜티아가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며 드베르그릭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투성이였던 네로멜티아가 오히려 자신을 좋게 포장해 주고 있으니, 처음과 같은 경계심은 어느 정도 사라진 상태였고 다소 불안감만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장 동맹 수준의 큰 움직임을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국가를 재건하는 입장에서 모자란 자원을 드베르그릭에서 지원 받고, 나아가 우리 헤모니겐트는 드베르그릭에 합당한 보상을 지불할 계획인 것이지. 드베르그릭으로써는 거저 주는 것이 없는 철저한 거래가 되는 것이다.”
드베릭 왕은 네로멜티아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솔깃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네로멜티아가 정의나 도의 따위의 가치관을 내세워 협조를 구했다면 드베릭 왕은 몹시 귀찮고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거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서로가 납득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고 조율하여 정해진 대로만 주고받으면 되는 국가간 거래는 네로멜티아에게서 자신의 부정과 부패를 감추며 이득을 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의 교류인 셈이었다.
“허나… 우리 드베르그릭에서는 부족한 것이 그다지 없습니다. 반면에 오염된 지상의 세계에 건설할 헤모니겐트는 여러모로 필요한 것들 투성이일 텐데요. 그럼 거래가 성립되기는 힘든 것 아닙니까?”
드베릭 왕은 거래 상대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헤모니겐트의 상황을 일부러 낮잡아 보았다.
헤모니겐트의 재건은 그 모습을 구경해 보기는커녕 지금에서야 처음 듣는 소식이었으니 그 상황은 당연하게도 전혀 모를 일이었지만, 적어도 멸망이 가득한 지상에 세우려는 국가가 풍족할 리는 없을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이었다.
백성도 거의 없고 그나마 존재하는 이들은 오염에 병들어 허덕이며 변종 마물이나 뜯어 먹는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나마 거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마왕 네로멜티아라는 존재 단 하나 때문이었다.
12신들과 양극단에 서서 힘을 겨루었다는 루이나의 여신이 얼마나 값진 보물을 가지고 있을까 기대될 뿐이었던 것이다.
“다시 이야기 하겠다만 드베르그릭이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래 조건을 들어 보고 거절하면 그만인 거 아니겠나. 그러나 장담컨대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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