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한 속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그녀와 시청자들이 듣고 싶어 할 말을 던져주었다.
“음, 네가 마법사로 활약을 보인다면 내가 전위에 서는 것도 좋겠지.”
“…정말요!?”
“고층에서 훌륭한 마법사는 찾기 힘들거든. …대부분 연구를 위해 마탑으로 빠지니까.”
정확히는 마법사들도 노숙 생활을 하기 싫어 나처럼 후방으로 빠지거든. 사기급 육체를 지닌 나도 노숙 생활에 넌더리가 났는데 연약한 육체의 마법사들이 독성이 가득한 늪지에서 반년 넘게 노숙을 할 리 있나.
그래서 탑의 최상층에 머무는 최상위 모험가들은 물자 보급에 허덕이는 것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마법사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닌다. 한세아가 쭉 레벨링을 한다면 아마 모든 파티에서 러브콜이 오지 않을까. 이 정도 실력이 유지되면 플레이어가 아니어도 탑 위에서 노숙하는 망령들이 입맛을 다시며 진지하게 납치를 고민 할 정도의 재능.
“확실히, 노숙은 좀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쩌겠어, 탑을 오르려면 해야지. 나도 이 정도 쉬었으면 많이 쉬었지.”
단순히 지도자 선배 모험가가 아닌, 같은 파티를 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넌지시 흘려주자 한세아는 물론이요 몰래 엿본 채팅창도 난리가 났다. 전 세계 유일한 6★ NPC가 슬금슬금 떡밥을 던지니 게이머들이 열광할 수밖에.
그렇게 밀당을 하듯 말로 미끼를 살살 던지며 입장한 탑. 한세아가 한 번 와봤다고 당황하는 모습 따위 없이 어둑한 입구에 망설임 없이 들어선다. 언제나처럼 청량하기 그지없는 탁 트인 초원이 그런 우리를 반긴다.
“오늘은 탑을 조금 올라가 볼까.”
“어디까지 가나요?”
“깊숙이 갈 생각은 없으니까 5층 정도만 눈에 익힌 뒤 돌아오자. 그 이상은 파티원들과 함께 가는 게 좋아. 아무리 고블린밖에 나오지 않는 약한 층계라지만 멀리 가게 되면 위험성이 증가하니까.”
그렇게 말해준 뒤 품 안에서 모험가의 패가 아닌 작은 랜턴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손때 묻은 나의 것, 다른 하나는 동료 접수를 부탁할 때 길드 카운터에서 슬쩍 챙긴 새것. 당연히 새 랜턴은 한세아에게 주기 위한 물건이다.
풀 내음을 맡으며 팔을 한껏 뻗어 스트레칭을 하는 그녀. 가죽 갑옷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풍만한 가슴으로부터 빠르게 시선을 떼어낸 뒤 랜턴을 건넸다. 품 안에 집어넣고 다닐 수 있는, 손바닥보다 자그마한 황동랜턴.
“이건 뭔가요?”
“다음 층으로 가는 통로 위치를 알려주는 물건. 원래는 파티의 길잡이가 들고 다니는데, 챙겨놔서 나쁠 건 없어.”
황동랜턴의 안에는 기름 먹은 심지 대신 마석 조각이 둥실 떠 있었다. 마치 물 위에 띄운 나뭇잎에 바늘을 올려 만든 나침반처럼 허공에 떠 있는 길쭉 뾰족한 마석 조각. 모험가 패에 있는 마석이 꾹 눌러 홀로그램을 만든다면, 이 녀석은 나침반 바늘처럼 한쪽 방향을 가리킨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는 모험가의 패. 탑 위로 올라가는 길을 알려주는 마법의 황동랜턴.
내 랜턴은 어딘가를 향해 마석이 떠 있지만, 한세아의 것은 마석이 가라앉은 상태. 고장이 난 기계를 고치듯 툭툭 랜턴을 두드린 한세아가 내 쪽을 바라본다.
“저기, 제 껀 안 움직이는데요.”
“랜턴은 자기가 한 번 도착한 계단만 인식하거든. 마탑의 설명으로는 탑의 통로를 구성하는 마력을 추적한다는데 자세한 내용까지는 이해를 못 했어.”
“그러면 오늘 눈에 익힌다는 게?”
“랜턴에 등록해두면 파티를 모았을 때 편하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 보는 궁수에게 의존해서 이 초원을 전부 뒤지고 다닐 생각이 아니라면.”
좋은 정보를 알았다는 듯 두드리던 랜턴을 허리춤에 냅다 달아버리는 그녀. 가죽 갑옷에 익숙해진 게 밤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해 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송인이 이미 1층을 돌파하고 위로 올라간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 뒤 랜턴을 보고 초원을 걷는 일은 아주 수월했다.
“고블린 이하의 몬스터에게 마법은 낭비야. 발로 걷어차기만 해도 잡을 수 있고, 뿔 때문에 부츠나 각반이 상할까 걱정된다면 스태프로 때려죽여도 상관없으니까.”
슬라임은 밟아서 죽이고 가끔 튀어나오는 뿔토끼와 뿔여우는 스태프로 내리쳐서 사냥하면 되니까. 뿔에 찔리면 송곳에 찔린 것처럼 피가 나고, 깨물린다면 이빨 자국이 나겠지만 그건 맨 몸일 때의 이야기. 마법사도 가죽 갑옷을 입고 다니는 모험가들을 상대로는 중고 가죽 갑옷에 생채기 하나를 늘릴 뿐이었다.
칼도 몇 번 막아내는 갑옷을 토끼 앞니가 뚫어버린다면, 장담하건대 나는 37층이 아니라 탑의 5층도 가지 않고 바깥세상에서 살았을 거야.
“고블린이다! 마법, 써 볼까요?”
“이번에는 매직 미사일 말고 다른 마법을 써 봐.”
조금 전에 나온 고블린은 매직 미사일에 맞고 그대로 죽었다. 스태프에 맞아도 죽는 놈이다 보니, 스태프보다 몇 배는 강한 마법을 버텨낼 리 있나. 허공을 가른 매직 미사일이 이름값 하듯 고블린의 콧대를 주저앉히며 일격에 죽여버렸지.
그러니 이번에 사용해 볼 마법은 다른 마법.
“다른 마법…, 스파크!”
내 설명이 꽤 인상 깊었는지 성큼 나아가 스태프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우는 한세아. 창으로 찌르듯 스태프가 쭉 뻗어지자 허공에서 파직!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생겨났다. 애초에 노렸다는 듯 고블린의 못생긴 코 아래에.
케야악?!
암컷이 고팠는지 다짜고짜 한세아에게 달려들던 고블린은 제 인중을 지져버린 불똥에 화들짝 놀라 뜀박질을 멈추고 허공에 손을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반응이 격한 걸 보니 타이밍도 알맞게 숨을 들이켤 때 지져버렸나.
“에잇!”
고개를 흔들며 따끔한 고통을 털어내느라 정신이 팔린 고블린. 그런 고블린을 보며 한세아는 쭉 뻗은 스태프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 뒤 그대로 내리찍었다. 지난번 동작이 야구 방망이의 스윙이었다면, 이번 동작은 스태프로 행한 검도의 머리 내려치기를 닮았네.
“마법도 정확했는데 스태프 휘두르는 궤적이 깔끔하네. 어디서 검술이라도 배웠어?”
“에헤헤, 어릴 적 검도를 조금.”
“검도?”
“아, 검술을 조금 배웠어요.”
어릴 때 태권도 도장 대신 검도 도장을 다닌 케이스인가? 스태프 끝자락이 정확하게 고블린의 정수리를 후려치는 게 어지간히 운동 신경이 좋은 것 같네. 하긴, 그러니까 운동 방송도 겸해 유명해진 것이겠지.
그 뒤로 이어지는 전투도 일방적이었다. 라이트 마법으로 달려오는 고블린의 시야를 가리고 측면으로 이동해 찌르거나, 워터 마법을 눈 쪽에 뿌려 동시에 달려들던 고블린 하나를 멈추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싸웠지만 실수는 없었다.
‘…근데 진짜 게임 잘하네.’
오늘이 두 번째 전투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한세아의 싸움법. 어차피 스태프로도 사냥할 수 있다는 걸 아니 마법에 집착하지 않고 발차기와 봉술, 마법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게 대단해 보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험가 1년 차의 나보다 훨씬 낫네. 그때의 난 붕붕 펀치를 날리는 초등학생의 싸움처럼 갑옷만 믿고 달려드는 모양새였으니까.
고블린을 잡고, 마석을 주운 뒤 계속해서 초원을 나아간다. 이쯤 걸었으면 다른 모험가를 한 번쯤 만날 법한데 오늘따라 한산하네. 초원이 아무리 넓다 해도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통로를 향하는 모험가들은 모일 수밖에 없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그리 생각하며 걷고 있으니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모험가 파티인가요?”
“통로로 가는 길이니 슬슬 만날 때가 되었지.”
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블린의 켁켁거리는 울음소리가 아닌 건 확실하다. 경로가 겹쳤는지 랜턴을 따라 걷고 있으면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것들이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신체 능력이 뛰어난 나한테만 그렇게 보인 거고, 아직 한세아의 카메라에는 점처럼 보이나 보네.
파티의 구성은 남자 전위 두 명에 여자 전위 한 명, 여자 궁수 한 명. 전위 셋에 궁수 한 명이라는 꽤 보편적인 초보 모험가 조합이었다. 전위라는 게 전문적으로 검술을 배우지 않았어도 칼과 방패 들고 앞에 나서면 일단 전위로 치니 사람이 좀 많거든.
“이게 내 탓이야?!”
“그럼 내 탓이게!”
슬슬 한세아에게도 네 명의 초보 모험가 파티가 보일 때가 되니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전위들이 입은 갑옷이 멀끔하게 손질된 걸 보니 적어도 5층 이하에서 허덕이는 개막장 폐급 파티는 아니네.
그러니 고블린 따위의 급습은 두려워하지도 않고 저렇게 괴성을 지르며 말싸움을 하고 있겠지.
말싸움하는 건 네 남녀 중 두 명의 여자. 여전사와 여궁수가 고함을 지르며 벌게진 얼굴로 삿대질을 하고 있으니, 나이 좀 먹은 아저씨와 젊은 남자가 말릴 생각도 못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저렇게 방관하는 걸 보니 파티의 리더가 여자 쪽인가 보네.
“…무슨 상황일까요?”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 아니겠는가. 서로 삿대질을 하다못해 드잡이질이라도 할 것처럼 바짝 달라붙은 두 사람의 모습에 한세아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른다. 그와 동시에 황급히 날아가는 카메라 드론.
…싸움 구경치고는 한세아의 반응이 좀 격렬한데.
카메라도 저 멀리 날아갔겠다, 한세아도 방송에 집중하느라 내 쪽에 신경을 껐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나도 싸움 구경을 하는 척 채팅창을 켰다.
-2★3★ 가슴이 옹졸해지는 싸움이다
-그래도 3★정도면 초반에 모셔가야지
-지금부터서로싸워죽여라
-뭔진몰라도 궁수눈나 데려가면 안되냐
-싸워서 이긴 년 롤랑센세랑 파티짜게 해줘
뭐야, 3★ 캐릭터가 있어?
내게 게임 시스템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한세아의 접속과 동시에 도시에 등장한 NPC들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저기서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두 여자는 각자 ★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이었다. 황급히 게시판까지 열어보니 별이 하나라도 있는 캐릭터는 없는 사람보다 무조건 우위에 있나 보네.
촌뜨기 한스가 1★ ‘시골뜨기’ 스미스랑 싸우면 무조건 스미스가 이기는, 그런 느낌.
그러다 보니 3★은 커녕 2★ 여검사 코라 정도만 되어도 진지하게 탑의 중층부를 노려볼 수 있는 인재였다. 별이 없는 남자 둘은 그저 그런 모험가로서 탑의 하층과 바깥의 잡일을 도맡는 모험가라면, 여검사 코라는 진지하게 검을 배우면 중층을 뚫고 올라가 유망한 여검사가 될 수 있는 수준. 멀리 있는 초보자 파티를 바라보는 척 게시판을 몰래 훔쳐봐서 나온 결론이었다.
다양한 방송인들이 2★ 파티원과 첫 파티 전투를 치렀는데 거의 다 NPC에 밀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