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철철 흘리는 걸 보다 못한 엘리스가 붕대를 가져와 출혈을 막아줬음에도 불구하고 한세아와 그레이스가 오지 않는다. 횡설수설하는 초보 모험가의 이야기를 듣고 붕대를 감는 시간이면 여관에서 길드까지 오고도 남았는데.
-이거 발동 조건이 머임?
-마을에서 필드보스가 왜나와 ㅋㅋㅋ
-게임이 루즈하다고는 했는데 이건 너무 짜릿한데여
-롤랑센세 없이 늑대 사냥 가능한가?
-근데 디지면 방송도 강제 휴방임 제발 살아라
채팅창을 키자 의심은 곧바로 확신이 되었다. 아무래도 한세아는 길드에 오는 길에 여관 근처에서 나온 뿔늑대와 마주친 모양. 테이블에 기대 둔 철퇴를 챙길 새도 없이 곧바로 길드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섰다.
내딛는 발에 휘감기는 건 10년의 세월 동안 단련하고 단련한 마력. 이동기 따위 없는 탱커형 캐릭터지만 무식한 깡 스탯과 아득바득 그러모은 마나는 어지간한 스킬보다 강력한 위력을 지녔으니까.
“롤랑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엘리스의 비명을 뒤로한 채 다리에 힘을 줘 뛰어오르자 귓가에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훤히 트인다. 첫걸음은 길드 앞 도로를 박살 내고, 두 번째 걸음은 눈에 익은 여관 지붕에 내 발자국을 새긴다.
도로에서 지붕으로, 지붕에서 허공으로―
“비―― 사아아아앙!”
뛰어오르며 가슴이 터지기 직전까지 들이마신 숨을 마력과 함께 토해내듯 소리친다. 탑을 향해 바쁘게 걷던 모험가들도, 거리를 바쁘게 오가던 시민들도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인다.
높게 뛰어올라 주변을 살피니 몇몇 골목에 커다란 털북숭이들이 어슬렁거리는 게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혼자 뛰어가 뿔늑대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모험가를 동원하는 것.
“도시 내부―― 몬스터, 출혀어어언!”
중력에 이끌려 내려간 몸이 다시 한번 애꿎은 건물 지붕에 흉터를 남긴다.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 박는 방식밖에 몰라서 미안하구만, 이거.
여관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다시 한번 몸을 날리자 발밑에서 나는 목재 쪼개지는 소리에 뺨에 살이 퉁퉁 오른 아저씨 하나가 화들짝 놀라 내게 삿대질을 한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건물 지붕을 디딤대 삼아 뛰어오르며 고함을 지르자 눈치 빠른 놈들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반 시민과 초보 모험가에게 있어 뿔늑대는 마주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재앙이지만, 중급 모험가에게는 이미 수없이 상대해 본 한낱 몬스터일 뿐.
“이 씨발, 이게 뭐야!”
“진짜다! 야, 장비 가져와!”
“건물로 못 들어가게 막아! 상회 쪽 경비들이랑 같이 몰라고!”
못 듣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렁차게 울려 퍼진 내 목소리. 무식하리만치 때려 박은 마력이 모험가들에게 믿음을 줬는지 거리 곳곳에서 무장한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력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가 헛소리할 리 없다는 믿음 때문에.
모험가들이 칼을 차고 움직이자 그 소란스러운 움직임에 거리의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들도 황급히 움직이는 게 눈에 보인다. 데엥― 하고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여관에 도착할 무렵에는 5인 1조로 돌아다니는 무장 병력이 골목을 구석구석 수색하고 있었다.
“한나! 그레이스!”
“아, 롤랑 님?”
아침인 만큼 조용했어야 할 운수 좋은 놈팽이 여관. 그 입구에 버티듯 서 있는 한세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야 그럴 게, 여관의 입구 근처가 무슨 슬래셔 무비에 나올 수준으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이게?”
“갑자기 뿔늑대가 나왔는데, 여관에 있던 모험가가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나서서는….”
한세아가 슬쩍 눈짓하는 곳을 보니 벽에 기댄 채 죽어있는 모험가가 보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앳된 얼굴은 눈물범벅이고 양손으로 부여잡은 배는 피투성이인 시체.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는 고작해야 롱소드 한 자루.
뿔늑대가 뭔지도 모르는 초보 모험가가 술이 덜 깬 채 덤벼들었구나.
“너랑 그레이스는 다친 데 없지?”
“네, 저희는 무사해요.”
“여관에 있던 다른 모험가들이 입구를 막고, 저랑 한나 양이 공격하니 들어오지는 못했거든요.”
한세아와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경비원들이 와 시체를 치운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치기 어린 초보 모험가의 시체.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벌써 십수 명은 넘게 죽었나 본데.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는 한세아가 작게 중얼거린다.
“아, 이거, NPC랑 야한 일 하는 것 때문에 19금 게임인 줄 알았는데… 되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네. 모자이크가 있어도 좀 그렇다…?”
“한나, 괜찮아? 오늘은 좀 쉴까?”
“음, 언니,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화전민 마을에서 사냥꾼으로 살던 그레이스는 삐져나온 내장과 시체에 익숙한 모양이지만 한세아는 아닌 모양. 창백한 한세아의 안색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레이스가 슬쩍 여관 안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그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저, 롤랑 님? 제가 뿔늑대의, 음, 마력을… 감지하고 추적해 봤는데요.”
슬금슬금 돌아가는 눈동자는 의뢰 이야기를 할 때와 같이 내 가슴팍의 옆 허공을 쳐다보는 상황. 아무래도 퀘스트 창을 읽고 있나본데.
“안내해.”
“제가 거기에 가 봐야 할 것 같은… 네!”
진짜 거짓말 못 하는구나.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한세아는 거짓말을 참 못한다. 도시 내부에서 뿔늑대가 나타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현상에 다들 난리가 나 있지만, 그녀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난리가 나 있었다. 함께 걷던 그레이스가 몇 번이고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달래 줄 정도로.
그레이스는 한세아의 일그러진 표정이 사람 죽는 모습을 처음 본 초보 모험가의 트라우마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채팅창을 읽은 나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 게 이야기를 짜내는 부담감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종의 사유로 도시와 탑이 연결되었다… 나쁘지 않은데?’
채팅창에 올라온 무수히 많은 의견 중 그럴싸한 의견을 보니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한세아의 안내에 따라 골목길을 걸으며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나 죽어버린 시민들을 보며 낄낄 웃을 순 없으니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지만.
슬라임도 뿔토끼도 뿔여우도 고블린도 아니고 도시에 잔뜩 등장한 건 오직 뿔늑대. 그렇다는 건 도시와 탑의 10층이 연결된 거니까 게이트 기능 같은 게 열리지 않을까― 라고 적힌 장문의 채팅을 읽자마자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거든.
사람이 꽤 많이 죽었지만 그 정도야 알 바 아니지. 까놓고 말해서 탑 내부에서 죽는 사람은 이거보다 많을 텐데. 한세아의 얼굴에 서려 있는 부담도 마찬가지다. 퀘스트 시나리오 때문에 게임 NPC가 죽었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이야기 지어내느라 머리 굴리는 거지.
어지간한 개소리를 해도 맞장구쳐 줄 거지만.
“이쪽이에요. 이곳에서 마력이 강하게 느껴져요.”
공방 거리는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다. 대로에 번듯한 가게를 내지 못한 견습 대장장이나 가난한 연금술사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달동네 비슷한 거리였으니까. 복잡하게 얽힌 뒷골목과 통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
저러니 수풀에 몸을 숨기는 습성이 있는 뿔늑대가 잡동사니 더미 속에 숨어 있다가 사람을 기습하지.
마력을 추적하는 중이라고 주장하듯 스태프를 추어올린 한세아가 잡동사니를 요리조리 피해 길을 안내한다. 물론 고정된 시선은 그녀가 마력이 아니라 미니맵을 보고 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중.
“…아-”
그렇게 뒷골목을 헤치고 가니 결국은 뿔늑대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까진 경비병들이 못 들어왔나 보네.”
사람 하나를 으적으적 씹어 먹고 있는 녀석을.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다 해도 배를 물어 뜯겨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별하기 직전인 시체는 보기 힘들겠지. 그 점을 배려하는지 곧바로 그레이스가 한세아의 앞으로 나서 시야를 슬쩍 가려준다.
뒷골목에 뭐라도 버리러 나온 사람을 꿰어 죽였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기다란 뿔. 식사를 방해받아서 기분이 나빠졌는지 지저분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지만 그래 봐야 10층 수준.
어제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평화로운 탑 등반기였던 게임에 갑자기 온갖 시체가 등장하니 적응이 어려운가. 묘하게 굳어 있는 한세아와 그레이스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짐승의 본능 덕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으르렁거리지만, 의미는 없다.
쩌억――
무기를 놓고 온 탓에 뺨을 올려붙이듯 휘두른 손바닥만으로 놈은 마석이 되었으니까.
“다시 앞장서, 한나. 시체는 경비병들이 수습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네!”
처참한 몰골의 시체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그레이스의 반응이 새삼스러웠는지 놀란 눈을 껌뻑거리는 한세아. 뿔늑대였던 하급 마석과 발톱 두어 개를 챙기자 황급히 받아들고 인벤토리에 쏙 집어넣는다.
사람이 죽은 건 죽은 거고, 사냥의 결과물은 챙겨야지.
그렇게 가끔 마주하는 뿔늑대와 시체를 지나 미로 같은 골목길을 돌파하길 한참. 한세아의 설명이 없어도 수상해 보이는 골목이 등장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역시나 우리 파티의 탐색꾼 그레이스.
“여기, 풀 냄새가 나는데요. 공방 거리에서 쓰이는 재료 냄새가 아니라, 초원의 냄새가.”
대장간과 연금술 공방의 매캐하고 지독한 냄새 사이로 느껴지는 산뜻한 향기. 갑자기 등장한 보스 몬스터에 사람이 죽어나는 상황과 달리 상쾌하기만 한 공기에 미간을 찌푸린 그레이스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그런 그녀의 말이 맞다고 주장하듯 살랑살랑 불어오는 옅은 바람에 연두색 풀잎 몇 조각이 더러운 골목 밑바닥에서 뒹군다. 사용하고 버려진 풀 쪼가리라고는 보기 힘든 싱싱한 잎새.
“한나, 이 골목이 맞아?”